옹이
석야 신웅순
아팠을 땐 지문이 그대로 남아있고
그리웠을 땐 나이테가 그냥 남아있다
세월도 옹이 지는가
화석이 되어 남아있다
-신웅순의 「옹이-묵서재일기 32」
세상을 살면서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쩌면 한으로 남았을 말 못할 아픔과 그리움이다. 사람들은 이 곳을 누구도 비껴갈 수가 없다. 바람도 눈비도 비껴갈 수가 없다.
그 때의 지문과 나이테가 지금도 그대로 그냥 남아있다. 이제는 세월도 옹이져서 화석이 되어 남아있다.
나에게 아버지는 아픔이었고 어머니는 그리움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 내가 주경야독할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결혼 전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 내가 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결혼 후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영원한 아픔으로 남아있고 어머니는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아픔과 그리움의 지난 세월은 나에게는 커다란 버팀목이었다. 때로는 빗방울이었다가도 눈발이었고 때로는 부엉새 울음이었다가도 소쩍새 울음이었다.
고희 고개에 오르니 지나온 굽어진 길들이 멀리도 내다뵌다. 가까이 보였다가도 멀리 보이기도 하고, 가물가물 보이다가도 까마득 보이지 않기도 한다. 지나온 길을 생각하면 아찔하고 몸서리쳐진다. 그것이 어디 나뿐만이랴.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산이 되어 서있는 아픔과 강이 되어 흐르는 그리움은 천축국 어디쯤서 잠을 이루고 있을까. 나는 지금 어느 회억의 역을 지나고 있는 것인가.
따오기 울음 같고 두루미 울음 같은 별똥별 아득히 고향으로 떨어지는 이 눈 먼 사랑, 이 귀 먼 사랑을 어찌하면 좋은가.
옹이는 세월이 지나면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사람답게 해주는 것 같다. 얼마나 아팠고 그리웠으면 옹이 되어 아름다운 시와 그림으로 남는 것인가. 그 때를 기다려본다.
한 수 읊는다.
아파트 경비실 초겨울의 낯선 바람
반백년 지나 이제금 안부를 묻고 가나
초겨울 저녁 햇살이 서럽도록 고즈넉하다
-신웅순의 「적(寂)- 묵서재일기 6」
고향 떠난 지 반백년이 지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 어머니의 젊은 얼굴을 떠올려 본다. 그 때가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만큼 아늑하고 평화로운 때는 없다. 세월의 옹이가 없었다면 가능이나 했을 것인가. 우리 아이들에게 고향은 어디이며 어떤 모습일까. 언제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곳이 어머니 아버지 품이었으면 좋겠다.
- 석야 신웅순의 서재, 여여재, 2022.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