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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고린도전서 제5강
몸은 성령의 전
말씀 / 고린도전서 5:1-6:20
요절 /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늘은 고린도 교회 내의 음행과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이것은 세상 어둠의 요소가 교회 내로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교회 공동체는 어떠해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또 성경은 교회를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실제로’ 또는 ‘심지어’ 이런 의미의 단어를 시작으로 5장의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믿기지 않는 일이 고린도 교회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전해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교회 내에 음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 중에 아버지의 아내, 엄밀히 말하면 계모를 데리고 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세계에서도 금지하는 일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성도들이 그냥 덮어두고 방관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원어 신학 사전에 보면 고린도 교회 당시 시대 풍조를 이렇게 말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춘부와 성교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필수적이며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그리스 헬라인들의 삶의 관점이었다. ... 기혼 남성이라도 민법상 혼인을 위반하지 않는 한 그가 원하는 대로 혼외 성관계가 허용되었다.” 또 고린도 교회에는 헬라의 이원론 사상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몸과 육신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는 스스로 음란과 방탕에 빠짐으로 육체라는 ‘감옥’을 빠져나가고자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영적으로는 구원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육체로 범하는 어떤 더럽고 부정한 일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그들은 영적 자만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미 영혼은 구원받았다며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교회 내에 그런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애통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회개하도록 마땅히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죄에 대해 무감각했습니다. 가증한 행위가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질 않았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려면 ‘권징’이 필요합니다. ‘권면과 징계’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참 교회의 3대 표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의 참된 전파(말씀), 성례의 올바른 집행(성찬), 권징의 신실한 시행(치리).” 대표적 종교 개혁자인 존 칼빈은 권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이 교회의 생명인 것처럼 권징은 교회의 근육이며 이 근육에 의해 몸의 지체들이 서로 결합하고 각각 자기 자리에 있을 수 있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서 예수님도 교회의 권징에 대해 말씀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교회가 공적으로 합당한 결정을 내려 권징하면 예수님도 그 결정을 인정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교회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권면하고 죄악에 대해서는 분명한 징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모와 음행하는 자를 교회에서 반드시 책망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징계하여 출교 조치까지도 내려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나 한 사람이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되면 다른 성도들도 악영향을 받게 되고 공동체 전체가 죄의식이 흐려집니다.
바울은 몸은 고린도 교회에서 떠나 있지만 마치 그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계모와 음행하고 있는 자를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5절에 ‘사탄에게 내준다’는 것은 ‘출교시킨다’는 것입니다. 출교당하면 그 사람은 영육 간에 죽은 것처럼 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방랑자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람을 버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같은 조치가 궁극적으로 그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이 같은 조치를 통해 그 사람을 ‘구원받게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출교처럼 무심해 보이고 너무 강해 보이는 징계 조치가 그 사람을 구원받게 할 것을 바울은 확신합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이라면 영육 간에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서 마음이 겸손해져 자신의 죄악을 깊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과정을 통해 그 사람도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징계하지 않고 놔두면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바울은 음행이 교회 공동체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누룩에 비유해 말해 줍니다. 누룩은 조금일지라도 온 반죽 덩어리를 다 부풀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통 누룩을 죄의 악영향을 설명하는데 가져다 붙입니다. 죄의 악영향은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냥 놔두다 보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급격히 퍼져 교회 공동체 전체를 부패하게 만듭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거룩함입니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됨입니다. 세상의 죄악 된 문화와 교회의 문화는 달라야 합니다. 이를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교회가 감당해야 합니다. 당시 고린도 사회는 너무나 음란하고 향락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음란의 물결이 너무나 거셌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한눈팔아도 온갖 음란 문화를 접하게 됩니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스마트폰과 컴퓨터 인터넷을 통해 음란 문화에 금방 빠져들어 갑니다. 어떤 신학자는 음행의 죄악은 고대로부터 시공간과 사람의 인품에 무관하게 두루 침투했다고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구라도 음행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애굽에서 장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장자 재앙을 내리실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그냥 지나쳐 넘어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유월절에 어린 양의 희생처럼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며 죽으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을 때 우리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누룩을 제거한 빵을 먹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 공동체를 형성한 교회도 누룩을 제거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의 시궁창에 뒹굴던 때의 삶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적은 죄의 누룩일지라도 교회 공동체 안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자로서 교회 공동체 내에 단 한 사람의 음행일지라도 묵인하거나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누룩 없는 빵으로 유월절을 기념하고 명절을 보냈듯 구원받은 성도들도 누룩 없는 거룩한 삶으로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순결과 진실함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자고 권면합니다. 우리 교회가 죄의 악영향을 경계하고 누룩 없는 순결과 진실함의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서로가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나누며 우리 각자의 삶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 따라 살아가며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늘 영적인 은혜 가운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전에도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했습니다. 그 편지에도 음행을 경계하며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편지 쓴 의도는 교회 내의 형제자매가 음란하거나 탐욕스럽거나 우상 숭배하거나 남을 모함하고 험담하거나 술에 절어 살거나 남의 것을 빼앗으면 그런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지 말라고 경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하여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게 아닙니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부르심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양과 같은 제자들을 이리 떼가 득실득실한 세상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결코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을 세상을 향해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은 교회 내의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죄악은 그 크기나 종류와 상관없이 단호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책망하여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합당한 권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교회입니다. 계속해서 죄를 저지르는 자녀를 가만 내버려두고 방관하고 있는 부모가 참된 부모일까요? 부모라면 아픔이 있더라도 죄를 저지르는 자녀에 대해 책망하고 야단을 칩니다. 어찌하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교회라면 권징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성도가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책망하고 징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책망과 징계는 단순한 정죄 판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의 마음으로 책망하고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 형제자매가 다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다시 교회 공동체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책망과 징계를 받은 사람은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신대원 때 ‘교회 행정과 권징’이라는 3학점짜리 필수 과목을 수강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과 교회법을 공부하면서 교회 권징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저는 총회 헌법 해설서를 쭉 읽고 공부해 가면서 ‘아, 교회가 이대로만 지켜도 사회의 덕이 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생명력 넘치는 교회가 될 텐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에 법이 없어 세상 법정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총회 헌법대로 권징이 제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세상 법정에 갈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총회 헌법대로 교회에서 권징이 실시되지 않기에 세상 법정으로 들고 간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함이 들었습니다. 총회 헌법은 성경에 기초해 만들어진 교회법 조항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세우신 교회 내의 질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권징을 실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일이므로 중요합니다. 교회의 징계가 정당하게 시행만 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셔서 죄를 범한 성도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때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되고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 순결과 진실함이 살아있는 교회, 성장과 성숙으로 나아가는 교회, 열매 맺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릴 줄 믿습니다.
바울은 음행 문제에 대해 교회가 판단하지 않고 있는 것을 책망한 김에 6장 1-11절에서 또 다른 판단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성도 사이의 법적 판단을 내려주지 않았고 성도들도 교회 내에서 판결을 받기보다 세상 법정으로 쉽게 발을 돌렸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툭하면 고소하고 법정의 판결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변론을 지켜보는 것이 그들의 오락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가 고린도 교회 내에도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성도 간의 다툼이 생기면 교회 내에서 판결을 구하기보다 세상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바울은 세상 법정의 재판관들이 죄악 되다는 의미보다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불의한 사람들’로 이야기합니다. 당시 대부분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가 컸습니다. 남의 것을 훔쳤거나 욕심 내 강제로 빼앗았거나 속여서 빼앗았거나 남을 중상모략하여 헐뜯거나 등의 이유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성도끼리 법정에서 다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교회 내에서 권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세상 법정에서 볼썽사나운 모습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세상 법정의 재판관들에 의해 판결을 받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물론 성도들 역시 불가피한 상황에 따라서는 세상 법정의 판결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을 모색한 이후 그래도 안 되면 자기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사용하는 차선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또 성도들은 세상 법정으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을 때 마땅히 법정의 질서 절차를 따라 출두하여 해명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 역시 하나님 나라 자녀임과 동시에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 하고 사회법의 정당한 보호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툭하면 세상 법정으로 문제를 가지고 가서 판결받기를 좋아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성도의 신분이 어떤 것인지 일깨워줍니다. 바울이 가르쳐 주는 성도의 신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성도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판단하고 심판할 존재들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하고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장차 세상이 성도들에게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또 성도들은 타락한 천사들도 심판하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도들이 거꾸로 세상 법정에 판결을 받겠노라 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벌이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고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동역하기보다 서로 판단하고 교만하게 행하며 분쟁했습니다. 그럴 때 지극히 작은 일로도 불신자들 앞에서 싸우고 세상 법정에 소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간의 소송은 같은 몸을 이루는 지체끼리 다투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체끼리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 또 교회에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못해 세상 법정에 고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의 관계는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지체 간의 관계가 끊어지면 몸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지체가 끊어져 나가는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또 교회는 세상의 판단과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성도 간의 문제는 세상 법정에 끌고 가지 말고 교회 내에서 해결하고자 해야 합니다. 불신자들 앞에서 성도들이 서로 소송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성도 간의 문제는 세상 법정의 판결보다 성경에 근거하고 사랑과 용서와 관용을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면 갈수록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동체 의식이 날로 약화 되어 갑니다. 그러나 나만의 권리를 내세우기보다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주님은 다른 형제자매를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셨습니다. 나와 소송하고 있는 그 형제, 그 자매를 위해서도 주님은 동일하게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며 보배 피를 흘려주셨고 나만이 아니라 그 형제자매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나의 권리에만 집착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인 형제자매를 고발하고 소송한다면 주님이 어떻게 보실까요?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여기 ‘뚜렷한 허물’은 ‘완연한 패배’를 의미합니다. 성도 간에 다툼이 있어 세상 법정에 고발하면 서로 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불신자들에게 ‘교회 다니는 것들이 저 모양이냐’는 욕을 먹고 세상에 대해 선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기 권리는 챙길지 모르지만 형제와의 관계도 파괴되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이러느니 바울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억울할지라도 손해 보고 속아주는 것이 더 낫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진실을 다 드러내십니다. 패배같이 보일지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승리하는 길입니다.
바울은 소송하느니 불의를 당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반면 교회 내에 불의한 자들 또한 책망합니다. 성도 간에 불의를 행하고 속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 사함 받고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도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불의를 행하고 속이고 있는데 그것도 성도인 형제자매에게 이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의 영향을 교회가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이 세상에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시킵니다. 사실, 고린도는 성적으로 극도로 문란한 도시였습니다. 대낮에 불륜이 버젓이 행해졌습니다. 또 성적 타락은 우상숭배와 병행되었습니다.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천 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밤만 되면 창녀로 변해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고 합니다. 9절에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는 동성연애자들을 의미합니다. 고대 이름 꾀나 있는 유명한 철학자들과 로마 황제 대다수가 이런 변태적 죄악을 즐겼습니다. 미소년들을 껴안고 잤습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몸은 영혼의 무덤이다’라고 했습니다. 영혼만 귀하고 신체는 천한 것이니 아무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망대로 정욕을 따라 마음대로 방탕하게 사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받아 죄의 종노릇하던 데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므로 다시 마음대로 죄지으며 죄의 종노릇하던 데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주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당시 고린도 성도들은 음행을 마치 음식 먹는 것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듯 허기진 성욕을 채우기 위해 음행을 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 몸이 음란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을 위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지체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몸을 가지고 창녀와 결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고린도 성도 중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매춘부와 관계하는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창세기 말씀에 기초해 그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우쳐줍니다. 창녀와 관계를 맺으면 창녀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요 그리스도와 연합한 지체로서 또 창녀와 결합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성도들의 몸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주고 사신 것이기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행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 발은 복음 전하는 발로, 입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 전하는 도구로, 손은 형제들을 섬기고 돕고 치료하는 도구로,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형제자매의 말을 경청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눈은 성경을 읽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살피는 데 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몸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지만 역설적으로 주님께 매이고 주님의 말씀에 매여 사는 삶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생입니다. 음란하고 불의한 세대 속에서 우리가 성도요 주님의 것으로서 순결과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