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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생유행(三生有幸)
세번 태어나는 행운이 있다는 뜻으로, 서로 간에 남다른 인연이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三 : 석 삼(一/2)
生 : 날 생(生/0)
有 : 있을 유(月/2)
幸 : 행복할 행(干/5)
삼생유행(三生有行)은 세번 태어나는 행운이 있다는 뜻으로, 아주 특별하고 끊어지지 않는 인연을 비유하고 또는 남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고마움을 표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삼생(三生)은 불교(佛敎)의 태어나기 전의 전생(前生), 지금 살고 있는 금생(今生), 즉 죽은 이후의 후생(後生)을 말한다.
불경(佛經)에는 다음과 같은 삼생유행(三生有行)에 관한 이야기가 보인다. 옛날 중국에 불교에 대해 학식이 뛰어나고 수행을 많이 한 승려 원택(圓澤)과 그의 친구 이원선(李源善)이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이 여행길을 떠났을 때 일어난 일이다.
원택이 만삭(滿朔)이 다된 어느 부인을 보고 “저 부인은 임신한 지 3년이나 지났는데 지금까지 내가 환생하여 자기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지. 지금까지 이를 피해 왔는데 오늘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네. 3일 이후에 그녀는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가 바로 나네. 그리고 13년 후 중추절(仲秋節) 밤에 항저우(杭州)에 있는 천축사(天竺寺)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말하였다.
이원선은 친구의 말을 듣고 그냥 웃기만 하였다. 정확히 3일 후 이원선은 친구 원택이 입적(入寂)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에 원택이 한 말을 상기하여 그 부인의 집에 가 보니 막 태어난 아들이 자신을 보고 웃는 것이었다.
이후 13년이 지나서 이원선은 천축사(天竺寺)에 갔다. 막 절 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소를 탄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삼생(三生)의 인연으로 맺어진 영혼인데 정든 사람이 멀리서 찾아왔네”라고 시(詩) 한 수를 읊었다. 삼생유행(三生有幸)이란 성구는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인류문화는 신이 전한 문화이며 역사는 오랜 기간 동안 누적되어 왔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듣고, 말하거나 심지어 늘 사용하는 말들도 깊은 문화적인 연원(淵源)이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이 신에 대해 믿지 않고 도덕이 쇠락해짐에 따라 사람들이 성구의 내포(內包)를 깨닫는 것도 점점 천박해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사람들은 삼생유행(三生有幸)을 아주 행운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생유행(三生有幸)은 아주 특별하고 끊어지지 않는 인연을 비유하는 말이며, 때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때 이 말로 고마움을 표시한다. 불교에서 삼생(三生)은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인 전생(前生),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인 금생(今生), 죽은 이후의 세상인 후생(後生)을 말하는데 삼생유행(三生有幸)의 본래 의미는 예를 들어 사람과 사람사이의 일종 특수한 연분(緣分)을 말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듣고 말하는 것 중에 깊은 문화적 유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다만 사람들이 점점 신을 멀리하고 도덕을 지키지 않아, 고사성어의 내포에 대한 이해가 점차 얕아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현재 삼생유행(三生有幸)을 굉장히 운이 좋은 것으로 해석하지만. 실제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삼생(三生)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상이라는 뜻에서, 전생(前生)과 현생(現生)과 후생(後生)의 총칭을 가리키며, 삼생유행의 본래의 의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특별한 인연을 뜻한다.
생명있는 모든 것들은 소멸과 생성을 거듭한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다.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인간의 삶도 인연이라 이름 지어진 업보 속에서 끝없는 윤회(輪廻)를 반복한다. 우리는 삼생(三生)의 인연에 따라 전생에 400번 이상을 만나야 이승에서 옷깃한번 스친다했다.
부모나 형제같이 혈연으로 이어진 연줄, 동창간의 우정,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맺어진 관계, 직업상 상종하는 얽매임, 이루지 못할 사랑에 가슴 태우는 연인, 이런 것들의 근원은 모두 인연으로 인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고 질기며 벗어나기 어려운 인연은 부부간의 연이 아닌가 싶다. 전생에 얼마나 깊은 인연이었기에 이승에서 이토록 억센 끈으로 이어졌을까. 그러기에 두 남녀가 짝지어지는 부부의 결합을 불가에서는 삼생의 연분이라 일러왔다.
우주가 둥글어 끝없이 순환하는 것과 같이 모든 피조물도 이 법도에 응하여 오면 가고, 가면 와서 끝없이 돌아가고 있다. 죽음도 소멸이 아니라 제 1의 생활에서 제2의 생활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바뀌어 돌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마치 곤충의 탈바뀜과도 같은 것이다. 만약에 무엇이고 간에 소멸과 끝이 있다면 영속이 없는 종말이 오게 될것이다.
순환에는 둘로 구분되어 있으니 즉 유형적순환(類型的循環)과 무형적순환(無形的循環)이다. 유형적순환은 육적(肉的) 순환을 말하는 것으로서 현실세계의 아버지와 나, 자녀의 삼세(三世) 순환을 뜻하는 것이다. 각세훈사(覺世訓詞)에 이르기를 ‘선천(先天)은 어디이며 후천(後天)은 어디인가. 온곳을 알게 되면 간곳도 알것이다. 전생을 생각하면 부모와 부모시고, 후생을 생각하면 자녀와 자녀로다’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우리 인간의 육신적 전생은 부모와 조상이 되고, 후생은 자녀와 후손이 되는 것이다. 부모와 조상을 공경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공경하는 것이 되고 자녀와 후손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영적(靈的) 순환은 무형적(無形的) 순환으로서 전생과 차생(次生)과 내생(來生)의 삼생순환을 말한다. 대게 사람들은 육신적순환들은 잘 알고 있으면서 영적순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각세훈사(覺世訓詞)에 이르기를 ‘없던 내가 있어보니 없음이 없었도다. 없음 없는 그 가운데 없을리는 없지마는 무식(無識)한 세상 사람 무법(無法) 행위하는 거동 무심히 볼 수 없어 무불간섭(無不干涉) 자연되어 무량복문(無量福門) 열어놓고 무궁대도(無窮大道) 전(傳)해주니 궁극(窮極)히 생각하고 궁극히 생각하라’하였다.
이는 전생(前生)의 존재에 대하여 강조하신 말씀인데 고금을 통해 수 많은 현철(賢哲)이 오고 가면서 인간의 사후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도 많았고, 일깨워 주심도 많았지만, 인간이 태어나게 된 근본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는 듯 하니 이제 인생의 근본문제를 밝혀 전해주니 그 뜻을 깊이 생각하고 생각하여 인생을 살아가라는 뜻이다.
오늘의 ‘나’라는 존재는 부모와 더 올라가서는 조상의 어느 한 사람이(정자) 상대의 조상 중 한사람과(난자) 결합하여 태어난 것이니 그 인생의 기질과 체질이 다시 발현되었으니 없던 내가 아니라, 있던 사람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에 인식되어 있던 대로 그대로 살 내가 아니다. 오늘의 삶은 전생의 삶보다 더욱 한차원 높이 성숙시켜 놔야 할 인생살이다.
저 하늘의 태양이 구름에 덮여 하루종일 빛을 내지 못하고 서산 너머로 간다면 그 태양은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어제의 그 태양이 오늘은 구름에 덮이지 않고, 활짝 개어 빛을 내어 세상을 환하게 비추다가 저녁 노을로 붉게 물들이고 가는 아름다움을 상기하며, 오늘의 우리 인생을 전생의 그 분 보다는 진실하고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전생의 나는 누구였을까? 선화공주? 서동왕자? 세종대왕? 연산군? 양귀비? 아니다. 바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의 전생이다. 그 분들이 바로 ‘나’이다. 나를 개량시키자. 무엇으로? 이는 도(道) 밖에 없다. 천지도(天地道)를 깨달아 바르고 참되고 원만한 성품을 연마하는 도를 닦는 것 밖에 없다. 남 이롭게 하려 애쓰고 남 잘되는 것에 기뻐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나도 잘 될것이다.
우리 인간은 세번 산다고 한다. 첫번째로 어머니 태중에서 280여일을 사는 것을 전생이라 하고, 두번째는 태어나서 겨우 100년 미만을 사는 것인데 이를 금생, 혹은 현생이라고 말한다. 세번째는 목숨이 다해 죽은 후 저승에서 영원히 사는것인데 이를 또한 내생 또는 후생이라하여 이 세가지를 일컬어 불교에서는 삼생이라 한다.
전생에서는 어느 누구나 다 같은 길을 가야 하지만 일단 모태를 벗어나 세상의 빛을 보며 금생의 길을 향할때는 각각의 운명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두 갈래 길이 대두되는 데 그중의 한쪽 길은 하느님과 부처님을 알고 그분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영혼의 참 길이며 다른 한쪽 길은 오직 나 하나 육신의 안락만을 위하여 금생을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육의 길이라 할수있다.
금생을 맞는 인생의 공통점은 유년시절 부터 육신의 형태를 갖추어서 장래의 꿈과 이상을 키우며 각자의 나름대로 다른 하나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길은 보람일 수도 있고 또한 허무맹랑한 길일 수도 있는 각기 다른 길인 것이다. 그러다가 나이 20세가 되면 약관(弱冠)이라 일컬어 남자는 쌍투를 틀어 관을 쓰고 여자는 머리 올림의 예식을 통해 어른이 되고 나이 30이 되면 이립(而立)이라 하여 꿈과 이상을 점차적으로 키워가며 계획대로 실천에 옮겨간다.
거의 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불혹(不惑)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때는 세상의 어떤일에도 정신이 흐리지 않고 사리판단이 분명하여 우왕좌왕하지 않고 두드러지게 명성도 떨쳐보고 싶은 심정에 정치가나 실업가나 여타 분야에도 원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
요즘은 금생(今生)의 평균수명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듯한 추세이다. 결국은 전생(前生)에서 280일여일 살고 금생(今生)에서 70여년을 보내고 나면 내생(來生)을 맞을 때는 떳떳하게 마감해야 한다. 이 삼생관을 믿고 깨달으면 올바른 길을 걷게 된다. 그러기에 사람은 만물의 주관자답게 남에게 존경받고 참 인간이 되어 가정과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참 삶의 소금이 되어야 할것이다.
삼생유행(三生有幸)
세 번 태어나는 행운이 있다는 뜻으로, 서로 간에 남다른 인연이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중국 송(宋)나라 때 법호가 원택(圓澤)이라고 하는 고승(高僧)이 있었다. 이원(李源))이라는 선비와 불학(佛學)에도 통하고 여러모로 뜻이 맞는 가까운 사이였다. 어느 날 함께 여행길을 떠나게 되는데, 어느 마을 앞을 지나게 되었다. 두 사람이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아 갔을 때, 우물에서 만삭(滿朔)이 된 중년여인이 물을 긷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여인에게 목이 마르다고 부탁하여 갈증을 해소하였다.
갈증을 해소한 두 사람은 계속해서 걸으며 원택 스님이 친구에게 뜻밖의 말을 건넨다. “방금 그 중년의 여인을 보았지요?” “예 그런데 만삭인걸 보니 며칠 안 되면 해산할 것 같던데요.” “그 부인은 임신한지가 삼년이 되었는데, 그 뱃속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에잇, 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입니까?” 하며 이원은 웃고 말았다.
그러나 원택 스님은 정색을 하며 “소승은 지금 장난이 아닙니다. 저는 그동안 환생(還生)을 피하려고 애를 썼으나 엉뚱한데서 모태(母胎)와 들어맞아 환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뜻이니 저 역시도 거역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소승은 사흘 후면 입적할 것이니 그때에 그대가 이 마을로 돌아와 저 부인의 집에 찾아와 아이를 대면해 보시오. 그래서 아이가 웃으면 소승인줄 아시오. 그리고 앞으로 십삼 년 후에 중추절이 되거든 항주(杭州)에 있는 천축사(天竺寺)를 가시오. 그러면 거기서 나를 만날 것입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워낙 근엄하고 평소에 실없는 말을 한 번도 않던 사람이라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그냥 넘겼다. 그런데 사흘 후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멀쩡했던 원택 스님이 가부좌를 튼 자세로 숨을 거둔 체 있었다. 스님들에게 장례를 부탁하고, 삼일 전 물을 마셨던 동네로 한걸음에 달려가 임신한 여인을 찾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한 집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그 댁 안주인이 배가 부른지 삼년이 되어서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며 걱정을 했는데 드디어 오늘 아침에 사내아이를 순산을 했습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지요.”
이원은 그 집을 찾아 간난 아이를 한번 보기를 청했다. 아이를 대면한 이원은 깜짝 놀랐다. 원택 스님의 말대로 갓 난 아이가 사람을 알아보고 방긋방긋 웃는 것이 아닌가. 이원은 아이의 웃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무서움이 몰려왔다. 보통의 갓난아이는 아직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알아보고 웃는다는 것이 반가움보다도 오히려 공포가 더 컸던 것이다.
그로부터 십삼 년이 흘러 중추절이 되었다. 이원은 자기도 모르는 어떤 마력에 끌려 원택 스님이 말했던 항주의 천축사를 찾아갔다. 달이 떠오를 무렵 도착했는데 사립문 안을 들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삼생 석 위에 서린 그 옛날의 혼백이여, 달 보며 풍월 읊던 옛일들을 말하지 말게. 송구스럽게도 정든 이가 멀리서 찾아와 서로 만났는데, 내 비록 몸은 다르지만 본성만은 여전하다네.”
지금도 이 전설은 항주 천축사에 두 사람이 만났다는 삼생석(三生石)이라고 불리는 돌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이 성어를 가지고 서로 간에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을 비유하여 서로의 돈독함을 말할 때나 특히 남이 나를 도와주었을 때 나와 당신은 삼생유행(三生有幸)이 있다고 감사하며 상대를 칭찬하여 말할 때 이 성어를 쓴다.
본래 삼생유행(三生有幸)은 아주 특별한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때 비유해서 많이 쓰는 말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도 고마움의 표시로 쓰기도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전생(前生) 금생(今生) 후생(後生)을 합쳐서 삼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한 삼생은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르니 항상 조심하며 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삼사인이나 오륙인이 떼를 지은 모양 또는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삼삼오오(三三五五), 삼순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일컫는 말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을 삼일천하(三日天下),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형편이 불리할 때 달아나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삼십육계(三十六計), 하루가 삼 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몹시 사모하여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삼추지사(三秋之思), 이러하든 저러하든 모두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삼가재상(三可宰相), 삼 년 간이나 한 번도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웅비할 기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삼년불비(三年不蜚),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삼간초가(三間草家), 봉건시대에 여자가 따라야 했던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삼종의탁(三從依托),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을 삼척동자(三尺童子),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세 칸에 한 말들이 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오막살이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간두옥(三間斗屋),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 곧 약혼을 이르는 말을 삼생가약(三生佳約),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치의 혀라는 뜻으로 뛰어난 말재주를 이르는 말을 삼촌지설(三寸之舌),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이라는 뜻으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삼면육비(三面六臂),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세 가지 아래의 예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지지례(三枝之禮),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이라 함이니 괴상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게 센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번 신중히 생각하고 한 번 조심히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삼사일언(三思一言) 등에 쓰인다.
▶️ 生(날 생)은 ❶상형문자로 풀이나 나무가 싹트는 모양에서 생기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만들었다. ❷상형문자로 生자는 ‘나다’나 ‘낳다’, ‘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生자의 갑골문을 보면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生자는 본래 ‘나서 자라다’나 ‘돋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生자는 후에 ‘태어나다’나 ‘살다’, ‘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生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본래의 의미인 ‘나다’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姓(성 성)자는 태어남은(生)은 여자(女)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生(생)은 (1)생명(生命) (2)삶 (3)어른에게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흔히 편지에 씀 등의 뜻으로 ①나다 ②낳다 ③살다 ④기르다 ⑤서투르다 ⑥싱싱하다 ⑦만들다 ⑧백성(百姓) ⑨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⑩자기의 겸칭 ⑪사람 ⑫날(익지 않음) ⑬삶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날 출(出), 있을 존(存), 살 활(活), 낳을 산(産)이 있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죽을 사(死), 죽일 살(殺)이 있다. 용례로 살아 움직임을 생동(生動), 목숨을 생명(生命), 살아 있는 동안을 생전(生前),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존(生存),말리거나 얼리지 않은 잡은 그대로의 명태를 생태(生太), 자기가 난 집을 생가(生家),생물의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생활 상태를 생태(生態),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사로 잡음을 생포(生捕), 태어남과 죽음을 생사(生死),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생업(生業), 활발하고 생생한 기운을 생기(生氣),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생모(生母), 끓이거나 소독하지 않은 맑은 물을 생수(生水), 어떤 사건이나 사물 현상이 어느 곳 또는 세상에 생겨나거나 나타나는 것을 발생(發生),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先生), 사람이 태어남을 탄생(誕生),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일단 못 쓰게 된 것을 손질하여 다시 쓰게 됨 또는 죄를 뉘우치고 마음이 새로워짐을 갱생(更生), 다시 살아나는 것을 회생(回生), 아우나 손아래 누이를 동생(同生), 사람이 삶을 사는 내내의 동안을 평생(平生), 어렵고 괴로운 가난한 생활을 고생(苦生), 살림을 안정시키거나 넉넉하도록 하는 일을 후생(厚生),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음을 생매장(生埋葬), 생명이 있는 물체를 생명체(生命體), 이유도 없이 공연히 부리는 고집을 생고집(生固執), 날것과 찬 것을 생랭지물(生冷之物),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생구불망(生口不網),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생기사귀(生寄死歸), 삶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움을 통틀어 일컫는 말을 생사고락(生死苦樂), 살리거나 죽이고, 주거나 뺏는다는 생살여탈(生殺與奪), 학문을 닦지 않아도 태어나면서 부터 안다는 생이지지(生而知之) 등에 쓰인다.
▶️ 有(있을 유)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달월(月; 초승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𠂇(우; 又의 변형)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有자는 ‘있다’, ‘존재하다’,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有자는 又(또 우)자와 月(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月자는 肉(고기 육)자가 변형된 것이다. 有자의 금문을 보면 마치 손으로 고기를 쥐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내가 고기(肉)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有자는 값비싼 고기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져 ‘소유하다’, ‘존재하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有(유)는 (1)있는 것. 존재하는 것 (2)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 소유 (3)또의 뜻 (4)미(迷)로서의 존재. 십이 인연(十二因緣)의 하나 (5)존재(存在)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있다 ②존재하다 ③가지다, 소지하다 ④독차지하다 ⑤많다, 넉넉하다 ⑥친하게 지내다 ⑦알다 ⑧소유(所有) ⑨자재(資財), 소유물(所有物) ⑩경역(境域: 경계 안의 지역) ⑪어조사 ⑫혹, 또 ⑬어떤 ⑭12인연(因緣)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재(在), 있을 존(存)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 폐할 폐(廢), 꺼질 멸(滅), 패할 패(敗), 죽을 사(死), 죽일 살(殺), 없을 무(無), 빌 공(空), 빌 허(虛)이다. 용례로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음을 유명(有名), 효력이나 효과가 있음을 유효(有效), 이익이 있음이나 이로움을 유리(有利), 소용이 됨이나 이용할 데가 있음을 유용(有用), 해가 있음을 유해(有害), 이롭거나 이익이 있음을 유익(有益), 세력이 있음을 유력(有力), 죄가 있음을 유죄(有罪), 재능이 있음을 유능(有能), 느끼는 바가 있음을 유감(有感), 관계가 있음을 유관(有關), 있음과 없음을 유무(有無), 여럿 중에 특히 두드러짐을 유표(有表), 간직하고 있음을 보유(保有), 가지고 있음을 소유(所有), 본디부터 있음을 고유(固有), 공동으로 소유함을 공유(共有),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라는 유비무환(有備無患),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음을 미증유(未曾有),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계란유골(鷄卵有骨), 웃음 속에 칼이 들어 있다는 소중유검(笑中有劍), 입은 있으나 말이 없다는 유구무언(有口無言) 등에 쓰인다.
▶️ 幸(다행 행)은 ❶회의문자로 夭(요; 일찍 죽다)와 屰(역; 거역하다)의 합자(合字)이다. 일찍 죽는 것을 면함을 좋은 일로 생각하여 다행하다의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幸자는 '다행'이나 '행복'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幸자는 干(방패 간)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방패'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幸자를 보면 양손을 묶는 수갑과 벽에 고정하는 쇠사슬이 그려져 있었다. 수갑은 죄를 지은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런데 왜 수갑을 그린 글자가 '다행'이나 '행복'을 뜻하게 된 것일까? 한자는 지배계층이 만든 문자다. 그들로서는 죄를 지은 사람을 잡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幸(행)은 ①다행(多幸), 행복(幸福), 좋은 운(運) ②요행(僥倖), 뜻하지 않은 좋은 운(運) ③거둥(擧動: 임금의 나들이) ④은총(恩寵), 베풀어 준 은혜(恩惠) ⑤오래 사는 일 ⑥다행히, 운좋게 ⑦다행하다, 운이 좋다 ⑧기뻐하다 ⑨임금이 사랑하다, 임금의 사랑을 받다 ⑩바라다, 희망하다 ⑪행복하게 하다 ⑫행복을 주다, 은혜를 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⑬좋아하다, 즐기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복된 좋은 운수로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를 행복(幸福), 행복한 운수나 좋은 운수를 행운(幸運), 사회가 어지럽게 되기를 바람을 행란(幸亂), 재앙이 일어나기를 바람을 행화(幸禍), 서로 사이가 벌어져서 틈이 생기기를 바람을 행흔(幸釁), 행복한 사람을 행인(幸人), 다행을 바람이나 행여나 하여 바람을 행기(幸冀), 운수가 좋음 또는 일이 좋게 됨이나 뜻밖에 잘 됨을 다행(多幸),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하늘이 준 다행을 천행(天幸), 기쁘고 다행함을 희행(喜幸), 감격하고 다행하게 여김을 감행(感幸), 마음에 잊혀지지 아니하는 다행한 일을 경행(耿幸), 더할 수 없이 다행함을 지행(至幸), 남에게 아첨하여 귀염을 받음을 폐행(嬖幸), 다시 더할 수 없이 다행하다는 말을 행막행의(幸莫幸矣), 남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는 말을 행재불인(幸災不仁), 남이 재화를 입음을 보고 좋아한다는 말을 행재요화(幸災樂禍), 매우 다행함을 이르는 말을 천만다행(千萬多幸), 부귀 할지라도 검소하여 산간 수풀에서 편히 지내는 것도 다행한 일이라는 말을 임고행즉(林皐幸卽), 다행하여 썩 행복하다는 말을 다행다복(多幸多福), 요행을 노리는 화살은 자주 차질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사행심의 발동으로 하는 일은 성취하기 어려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사행삭질(射幸數跌), 공교롭게 아주 못된 때를 만남을 이르는 말을 봉시불행(逢時不幸)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