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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5:2-5 성경 신앙
(요 15:2-5)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성경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신앙(믿음)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육적인 것이 아닌 영적 신앙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나름 열심을 가지고 살면서 싱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현실은 양적인 목적의 신앙에 열매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는 분명 복음적이지 못한 신앙 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사람들이 그 기준(어떤 사람의 신앙 수준이 좋다든지 혹은 나쁘다든지 하는)을 따질 때 가장 손쉽게 등장 되는 것이 바로 그가 얼마만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교회의(?) 기준이 양적(量的)인 개념에 기준을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헌금을 얼마나 하고, 하루 중 기도하는 시간은 얼마며, 또한 성경 말씀 보는 시간은 어느 정도며, 전도하는데 들이는 열심이 얼마 만큼이냐에 따라서 신앙의 정도가 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이런 외형적인 것들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소위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사랑, 희락, 온유, 절제 (갈 5:22) 등 내적인 문제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문제도 그가 어떤 사랑을 얼마만큼 현재 하고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으며, 희락도 어떠한 기쁨의 생활인가는 아랑곳없이 험난한 역경, 고난 가운데서도 참고, 기쁨의 생활을 많이만 누리면 그 사람을 향해 신앙의 점수를 후하게 매기는 경향이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변명을 한다면 우선 질을 논하기 전에 양이 있어야 될 것 아니겠느냐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양적으로 많이 성장하면 질적인 뒷받침은 뒤따라오는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훌륭한 품질의 선행(先行)이 양적인 수요를 증가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랑의 행위(예를 들어 구제를 한다. 남을 도와준다. 등)를 많이 하면 할수록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의 질이 낳아지거나 좋아지는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훌륭한 질의「사랑」이 속에 존재해야만 비로소 적은 양의「사랑함」이 가능한 것입니다.
참사랑(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이 속에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서 하려고 하는 사랑(종교 행위나 교육에 의한 습관)으로 사랑하려고 하니까 외형적인 사랑의 모습만 띠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원하시지, 사랑의 모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을 아는 사람은 모두 아는 진리입니다.
막 12:41-43절에 보면, “예수께서 연보 궤 앞에 앉으사 무리의 돈 넣는 것을 보셨을 때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실제로「돈」을 양적으로 많이 넣지 않았는데도 예수께서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신부분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많이」라는 형용사 외에도 다른 형용사 - 훌륭한, 나은, 좋은 등-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그 과부를 향하여「많이」넣었다고 칭찬을 하셨는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부자들은 양적으로 헌금을 많이 했지만 과부는 질적으로 헌금을 한 것 아니겠느냐, 그래서 예수님도 과부의 그 점을 칭찬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질이라는 것을 좋고 나쁨의 문제이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닐진대 왜 본문의 기록은「많은 헌금」이라고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헌금을 했다든지 좋은 헌금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야 내용과 글이 부합될 것 아니겠는가 하는 지적입니다.
어쨌거나 그 과부가 비록 양적으로는 두 렙돈 밖에 헌금하지 못했지만, 이를 칭찬하신 예수께서 요한복음 15:2, 5에서는 왜 「많은」 과실을 우리에게 요구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성경이 이렇게 「많은」 열매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많은 기도, 많은 사랑, 많은 봉사, 많은 기쁨, 많은 헌금, 많은 …등등, 당연히 맺혀져야 할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하여 애쓰고 수고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지나쳐 이제는 분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 교회에 「두 렙돈 신앙」의 설 자리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좋은」, 「훌륭한」, 「나은」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인간들의 일에서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듯이- 이것은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 손의 「많은 수고」를 바라시겠습니까?
때문에 이사야 5:2에서는 “…땅을 파서 돌을 제(除)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 좋은 포도를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라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기준으로는 ‘들 포도라도 많이만 있으면’ 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 들 포도를 맺힌 포도나무를 찍어 불사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들 포도를 아무리 많이 맺었다고 그것이「신앙」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극상품 포도와 들 포도는 양을 가지고 비교할 문제가 아니고 질의 문제라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의「과실을 더 맺게」와 「과실을 많이 맺나니」는 무슨 말씀입니까?
본문의 말씀은 더 훌륭한 과실을 맺게’, ‘더 좋은 과실을 맺으면’으로 바뀌어져야 이사야 5장의 말씀과 뜻이 맞아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보다 ‘더 많은’(양적으로)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그들과 도토리 키 재기식의 경쟁을 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의의 차원, 의의 질이 그들보다 나아야, 좋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히 3:3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나 존귀함이 모세의 그것보다 「많다」 는 의미가 아니라 질적으로 「나은」 것이라는데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언급을 하면 틀림없이 이런 반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의라든지 영광, 존귀 등은 원래부터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많다」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할 수 있지만, 열매는 구체적인 것이므로 「많다」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라고 할 때, 일견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의 문제도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너희 의」를 많이 늘어놓지 말고, 「그의 의」를 가지라고 권면하듯이 의에도 양의 문제와 질의 문제는 공존(共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도 마찬가지인 것이 예를 들어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의 영광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가를 질문해 보면 됩니다. 또한 은메달 백 개보다 금메달 한 개의 가치를 더 높이 사는 것은 그것의 양의 차이도 아니오, 무게의 차이도 아니며, 오직 색(質)의 차이인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 논리를 억지라고 한다면, 제사의 문제로 생각을 해보십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히 11:4)
여기서 왜 아벨이 가인보다「더 많은」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하지 않고「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서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까?
창세기의 기록이 결코 아벨이 가인보다 더 많은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의 횟수(양) 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질의 문제라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요한복음 본문의 번역은 양적으로 많은 것으로 번역되어 있습니까? 열매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는 번역자의 선입견(先入見)이 본문을 그렇게 보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본문 2절의 말씀은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깨끗케 한다는 것을 영어 번역은 가지치기를 의미하는 prune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에 있어서 가지치기를 하는 목적이 과연 더 많은 포도를 맺게 하기 위해서이냐 아니면 더 질 좋은 포도를 맺게 하기 위해서이냐를 생각해 보십시다.
말할 것도 없이 포도나무의 가지를 잘라주는 것은 과실이 달릴 가지 수를 제한하여 지나치게 열리는 것을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열매가 많지 않아야,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도 본문의 번역은「많은 열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좋은 열매」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얘기를 해야 하겠으나 성령의 열매(갈 5:22)를 예(例)로 들어 보십시다.
「화평」이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화평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화평의 사전적 의미에 대하여 묻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의미에 대하여 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포용성으로 모든 사람들을 감싸고 그들과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화평」이고, 우리가 이를 위하여 노력해서 많은 화평의 열매를 맺어야 된다는 말일까요? 그래서 화평의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지는가 말입니다.
혹시 예수도, 성령도 모르는 사람들도 가지고 있고, 논하고 있고, 실천하고 있는「화평의 삶」을, 그 양적인 비교로 성령의 열매가 ‘있다’ ‘없다’를 재려고 하지는 않는지요?
만일 그렇다면 예수는 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불화(不和)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4-39) 라고 하셨을까요? 왜 예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화평하지 못(안)했는가요?
그러면 예수에게 성령이 없었단 말인가요? 아니죠? 예수의 화평이 참 화평이요, 하나님의 화평입니다.
예수의 화평을 가지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 세상(바리새인: 율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대명사)과의 불화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화평은 그동안 하나님을 향하여 불화(不和)하고 세상과 화평을 누리던 우리의 삶이 세상과 불화하고 대신 하나님과 화평(하나됨)을 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엡 2:15)
이것을 이웃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는 삶으로 말하거나 강조하게 되면 -그러한 삶이 나쁘거나 잘못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아닌 것을 성령의 열매로 오해케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화평은 존재요, 인격(人格)이지 우리의 기질(temper)이 아닙니다. 존재로서의 화평은 질적으로 좋은, 훌륭한 화평이고, 기질로서의 화평은 우리가 우리의 성질을 잘 다스리냐의 양적 화평인 것입니다.
비극의 발단은 기질적으로 사람들과 잘 화평하는 것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 운운할 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력이고 수고이며, 그에 대한 삯이요 대가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어찌 노력의 결과로 주어질 수 있는가요? 왜냐하면 그것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나에게 「원인」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좋은 열매」입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므로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합시다.”라고 외치며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이 바로 「많은 열매」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열매는 우리 의이고, 좋은 열매는 그의 의인데, 이런 「우리 의」 의 양으로는 바리새인들을 따라갈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 의가 바리새인들 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렙돈 헌금한 과부의 비유(막 12:42-)에서 왜 예수님이 그녀를 향하여「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을까요?
부자들도「많이」 넣었는데 부자들의「많이」와 과부의「많이」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바로 양적인 신앙생활과 질적인 신앙생활의 차이이며「너희의」와「그의 의」의 차이이며, 또한 삯과 은혜의 차이이며, 지옥과 천국의 차이 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
(막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