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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항가리 전, 두번째 골 먹는 장면
[ 1954년 제5회 스위스 월드컵 ]
제5회 1954년 월드컵은 유럽의 스위스에서 6월 16일부터 7월 4일까지 총 19일간 치러졌습니다. 이 대회는 FIFA 창설 50주년을 맞아 FIFA 본부가 위치한 스위스에서 치러진 기념비적인 월드컵으로 역사 속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월드컵에 참가한 대회였고 서독이 예상을 깨고 막강한 전력의 항가리를 꺾고 우승했던 대회였습니다. 이 우승은 2차대전 패배의 아픔 속에 놓여있던 서독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 스위스와 잉글랜드 전
* 참가국들의 조편성
각국은 조별로 풀리그를 벌이지 않고 두 경기씩(추첨) 하고 성적순으로 2개국씩 토너멘트 게임에 진출했습니다.
1조 브라질, 유고, 프랑스, 멕시코
2조 항가리, 서독, 한국, 터키
3조 우루과이, 오스트리아, 체코, 스코틀랜드
4조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위스, 벨기에
< 한국이 처음으로 출전한 월드컵 >
한국은 처음으로 이 대회 지역예선에 참가하여 일본과 본선 진출권(아시아는 1장의 진출권 부여)을 놓고 다퉜습니다. 종합 스코어 7-3으로 일본을 완파한 대한민국은 아시아 대표로 사상 첫 본선 진출에 성공하면서 왕왕거리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용약 스위스로 향했습니다.
* 한국 대표팀
이 대회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인 항가리가 예선 첫 경기에서 격돌한 것은 아시아의 유일한 대표 한국이었습니다. 항가리는 벌써 오래전에 스위스에 도착해서 연습게임을 갖는 등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한국 팀은 64시간의 장거리 비행을 강행한 끝에 대회 개막일 오후 늦게야 허둥지둥 도착, 미처 피로가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이틀을 쉬고 월드컵 데뷔전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취리히의 그라스 호퍼 경기장은 3만 5천여 명의 관중으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한일 예선(종전 직후 한국의 운동장 사정으로 1,2차전 모두 도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한국과 항가리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도열해 섰습니다. 경기 전 행사 때문에 센터서클 한가운데 서 있던 김용식 감독은 감개무량했습니다. 18년 전 일본 축구대표팀의 일원으로 베를린 올림픽에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참가했던 그는 돌아가는 길에 바로 이 구장에서 친선게임을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기개시 1분전, 한국의 베스트 일레븐을 모아놓고 몇마디 작전지시를 내린 뒤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한국팀을 김감독은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한국팀은 연습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채 고국을 떠나온 데다가 무엇보다도 비행기의 심한 진동 속에서 이틀밤을 견딘 피로가 선수들의 표정 속에 짙게 깔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은 골키퍼 홍덕영을 비롯해서 박규정, 박재승, 강창기, 민병대, 주영광, 정남식, 성낙운, 최정민, 우상권, 박일갑 등 11명이 선발로 나갔습니다. 항가리는 당시 유럽 최고의 선수였던 푸스카스를 비롯하여 코시스, 치보르, 보스치크 등이 선발 라인업이었습니다.
전반 20분까지 한국은 그럭저럭 잘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23분경 치보르가 선제점을 기록했습니다. 이 선제점으로 그동안 버텨내던 한국의 수비진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28분경 코시스가 두 번째 골을 박아 넣었습니다.
한국의 열세는 뚜렸해졌습니다. 한국 선수들은 쉴새없이 뛰면서 온몸이 땀투성이가 됐지만 항가리의 눈부신 패스웍을 잘라 낼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32분 마술같은 오버헤드킥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페널티 박스 안으로 전력 질주하던 코시스가 별안간 돌아눕더니 마이나스킥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은 총알처럼 네트를 출렁이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은 그 뒤 무려 6개의 골을 더 먹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공이 들어갔는지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습니다. 그냥 정신없이 볼만 쫓아다닐 뿐이었습니다. 항가리는 지칠대로 지친 한국팀에 대하여 마구 두들겨 댔습니다.
골키퍼 홍덕영은 나중에 회상하기를 “항가리의 슈팅은 대포알 같았고 푸스카스나 치보르가 때린 공은 거의 안보일 정도였다”라고 했습니다. 특히 골포스트나 크로스바에 볼이 맞으면 마치 천둥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한국 선수들은 기진맥진 숫제 걸어 다녔으며 거의가 쥐가 나면서 하나씩 둘씩 운동장에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한국의 원드컵 데뷔 무대는 9대0으로 끝났습니다.
* 입장하는 양국팀
* 한국의 대패 요인
한국의 대패 요인은 무엇보다도 겹친 피로 때문이었습니다. 6월 11일 서울을 떠난 우리 대표팀은 일본으로 가서 선발대 11명만 먼저 비행기를 타고 이틀 밤을 꼬박 기내에서 자면서 경유지인 로마에 닿자 공항에 나온 한 이탈리아 기자가 “도대체 대회개막일이 언제인지 아느냐?”고 핀잔을 줄 정도였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항가리와의 대전에서 쥐가 나 쓰러진 것은 비행기의 좌석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너무 높아서 앉으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진동이 심한 기내에서 축국선수의 생명인 허벅다리가 의자에 매달린 채 혹사당한 것입니다.
* 시작은 좋았는데...왼쪽은 푸스카스 항가리 주장, 오른쪽은 최정민 한국 주장
한국의 늦은 도착 때문에 항가리 전은 원래 예정보다 이틀 뒤에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틀간의 휴식으로는 도저히 풀릴 피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축구 변방에 위치한 한국이 그것도 6.25 전쟁의 와중에서 연습도 제대로 못한 채로 본바닥 축구팀들과 겨루었던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간신히 경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 선수단은 모두들 놀랐습니다. 6.25 전쟁 당사국인 한국에 관한 소식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가자 곳곳에서 구호품들이 답지한 것입니다. 호텔 마당에 고기, 술, 초콜렛, 넥타이, 시계, 축구공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닷새 뒤의 터키전에서 7대0으로 다시 또 대패하면서 첫 번째 월드컵 무대에서 쓰라린 탈락을 감수하면서 총총히 귀국길에 오르게 됩니다.
* 장도에 오르면서...
< 베른의 난투극 >
항가리와 브라질의 준준결승은 ‘베른의 난투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면서 월드컵 사상 최악의 집단 난투극이었습니다. 경기 개시 3분 뒤 항가리의 주장 히데구티가 치보르, 코시스 콤비와 함께 브라질 수비진을 교란, 문전에서 혼전이 일어났습니다.
얽히고 설킨 가운데 히데구티가 강슛, 선취골을 뽑았으나 역사에 오점을 찍은 베른의 난투극이 여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자신이 때린 공이 브라질의 네트에 꽂히는 것을 확인하고 난 히데구티는 갑자기 아랫도리가 허전한 것을 느꼈습니다.
* 항가리와 브라질 전
슈팅하는 순간 누군가가 히데구티의 팬츠를 뒤에서 잡아당겨 찢어버린 것입니다. 히데구티가 아랫도리를 감추고 있는 틈을 타고 양팀 선수들간에 옥신각신 실랑이가 벌어지더니 기어코 주먹질이 벌어졌습니다. 흥분한 관중들까지 그라운드에 몰려들어가 패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경비경찰이 투입되어 이를 말리는 등 경기장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위기는 험악할 지경을 넘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고 축구장은 대형 킥복싱장으로 변해 여기 저기서 차고 때리는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습니다.
간신히 사태가 진정되고 한참 뒤에 경기가 지속됐지만 싸움은 게속되었습니다. 경기는 몸을 내던지는 육탄전으로 펼쳐져 불꽃 튀기는 파울의 대결로 거칠기 한량없었습니다. 양팀 선수들은 대부분 부상으로 절룩거렸고 부상한 몸이지만 그들의 태클은 더없이 거칠고 깊었습니다.
시합은 결국 4대1로 항가리의 승리로 끝났지만 시합 직후 브라질 선수들은 항가리 선수들의 탈의실을 습격, 샤워 중인 항가리 선수들과 또 다시 집단 난투극을 벌임으로써 패배의 분풀이를 이어갔습니다. 이런 난투극 후유증 때문에 결승전에서 항가리가 패배하는데 일조를 하게됩니다.
< 항가리와 서독의 결승전(베른 경기장) >
“수학의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아이라면 이 경기의 승부는 점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 5회 스위스 월드컵의 결승전을 앞둔 여론의 집약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두 팀이 예선에서 맞붙었지만 항가리의 2진 선수들에게 8대3으로 나가떨어진 서독이었기에 누구든지 항가리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 항가리 대표팀, 왼쪽 주장 푸스카스
그러나 그것이 서독의 감독 헬베르거의 악마와 같은 무서운 계략인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서독 역시 주장인 프리츠 바르터만 뛰게 했을뿐 모두 2진을 기용함으로써 일부러 져 준 것입니다.
“항가리에 져도 상관없다. 터키를 꺾고 2조에서 2위로 오르면 브라질과 우루과이 등 강적을 만나지 않고 쉽사리 결승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헬베르거의 계산이었습니다. 항가리는 푸스카스, 코시스, 치보르 등 최강의 공격진을 기용 서독을 가볍게 누름직해 보였습니다.
과연 스타트는 순조로웠습니다. 전반 25분경까지 항가리는 서독 골문을 두차례나 유린하면서 2대0으로 앞서 나간 것입니다. 과연 무적 항가리라는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나 서독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전반이 끝날 무렵엔 양팀이 2대2로 균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후반에 들자 서독은 그때까지 보도 못한 4.3.3이라는 공수의 틀을 더욱 눈부시게 갖추면서 항가리를 압박하면서 드디어 헬무트 란이 역전골을 집어넣게 됩니다. 항가리는 주포 푸스카스, 코시스, 치보르 등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으나 베른의 바다에서 외롭게 떠 있는 거함 항가리호는 그동안 32연승 무패의 신화와 함께 극적으로 침몰하고 맙니다.
서독의 예상을 뒤엎은 승리는 패전 서독 국민들에게 더 할 수 없는 부흥의 의지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당시 아데나워 수상은 스위스 국경까지 마중 나와 이들을 맞았고 거대한 환영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패전의 상처 속에 신음하고있던 서독 국민들에게 그야말로 희망의 선물이었던 셈입니다.
* 서독의 승리
< 항가리의 전설, 페렌츠 푸스카스 이야기 >
* 왼발 하나로 유럽을 평정한 사나이
1950년대 유럽 축구게를 풍미한 헝가리의 축구영웅 페렌츠 푸스카스는 특별히 체격조건이 좋은 것도, 달리기가 빠른 것도, 그렇다고 해서 펠레나 마라도나만큼 천부적인 테크닉을 타고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푸스카스의 왼발 슈팅은 누구보다 강력했고, 또 정확했습니다. 푸스카스가 성공시킨 A매치 85경기 84골, 리그 통산 529경기 514골 가운데 대부분의 득점은 바로 이 황금의 왼발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 질주하는 소령
푸스카스는 군인들의 팀 부다페스트 혼베드(항가리어로 육군의 일등병을 의미)의 간판선수이자 공산주의 국가 헝가리를 위해 일하는 성실한 군인이었습니다. 푸스카스가 축구선수로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할 때쯤의 계급은 소령이었는데, 그로 인해 붙여진 별명도 ‘질주하는 소령(The Galloping Major)’이었습니다.
푸스카스의 체구는 작고 땅딸막했지만, 부지런히 그라운드를 누비고 다니는 활동량과 왼발 슈팅만큼은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었습니다. 47/48, 49/50 시즌 헝가리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며 스타덤에 오른 푸스카스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더욱 뛰어난 활약을 펼쳐 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이 대회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며 우승을 차지한 헝가리 팀 역시 ‘매직 마자르’라는 전설의 별명을 얻었습니다. 푸스카스와 매직 마자르의 전설은 바로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올림픽 이후에도 헝가리의 무시무시한 상승세와 국제 경기 무패행진은 계속됐습니다. 이듬해 1953년에는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를 유서 깊은 웸블리에서 6-3으로 완파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잉글랜드가 웸블리에서 당한 역사상 첫 패배였습니다. 이 경기에서 푸스카스는 혼자 두 골을 성공시키며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 오른쪽에서 두번째 푸스카스
특히 푸스카스가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수비수 빌리 라이트를 가벼운 발놀림으로 따돌리고 성공시킨 득점은 웸블리 팬들을 경탄시켰던 것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듬해 잉글랜드는 웸블리 참패를 설욕하기 위해 직접 부다페스트 원정길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대참사에 가까운 1-7 완패였습니다.
결국 종주국 잉글랜드는 꼬리를 내렸고, 헝가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팀으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헝가리의 주장이자 에이스였던 푸스카스에게도 ‘세계 최고의 선수’ 칭호가 주어졌음은 당연했습니다. 헝가리의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우승을 의심하는 사람도 결코 많지 않았습니다.
* 베른의 기적? No, 베른의 악몽!
아니나 다를까, 뚜껑을 열어보니 헝가리의 전력은 생각 이상으로 막강했습니다.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대한민국을 9-0으로 초토화시킨 헝가리는 서독에게도 8-3 완승을 거뒀고, 8강과 4강에서는 남미의 강호들인 브라질과 우루과이마저 연파해 버렸습니다.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오른 헝가리는 조별리그에서 이미 대승을 거뒀던 서독을 최후의 상대 팀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헝가리의 문제는 브라질, 우루과이와 난투극에 가까운 경기를 치르는 동안 크게 체력을 소모시켰다는 점, 그리고 주장 푸스카스의 부상에 따른 컨디션 난조 등이었습니다.
결국 푸스카스는 정상 컨디션이 아닌 상태로 결승전 출전을 강행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푸스카스는 선취골까지 성공시키며 그 명성을 재확인시켰지만, 시간을 거듭할수록 서독의 거친 수비진을 뚫어내는 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스코어는 3-2, 서독의 리드가 막판까지 이어졌습니다.
경기 종료 직전에는 푸스카스가 성공시킨 동점골이 오프사이드로 취소되는 불운까지 겪었습니다. 이는 심판진의 오심에 가까웠지만 푸스카스는 서독의 주장 발터에게 악수를 청하며 묵묵히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유럽의 중위권 국가에 불과했던 서독이 최강 헝가리를 침몰시키고 그 유명한 ‘베른의 기적’을 일으킨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헝가리 입장에서는 베른의 기적이 아닌 ‘베른의 악몽’이었겠지만 말이죠. 그러나 푸스카스를 비롯한 헝가리 선수들은 충격적인 패배에도 불구, 그렇게까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쩌면 4년 뒤 1958년 월드컵에서 만회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헝가리에게 만회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956년에 일어난 헝가리 내란은 푸스카스와 치보르를 비롯한 스타 선수들이 해외 망명을 결심하도록 만들었고, 그로 인해 매직 마자르 역시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습니다.
얼마 후 푸스카스는 조국을 등지고 떠난 배신자로 낙인찍혔음은 물론, 유럽축구연맹(UEFA)에 의해 2년간 출전정지라는 중징계의 철퇴까지 맞아야 했습니다. 스페인으로 망명한 푸스카스는 2년의 공백기를 가진 뒤에야 가까스로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 오른쪽 푸스카스
* 레알 마드리드의 저승사자
1958년, 푸스카스는 31세의 나이로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데뷔 무대를 가졌습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디 스테파노, 헨토, 코파 등을 앞세워 이미 챔피언스컵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푸스카스까지 가세함에 따라 레알 마드리드는 ‘날개 단 호랑이’처럼 더욱 무서운 기세로 유럽 무대를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푸스카스는 스페인 진출 이후 6시즌 연속 20골 이상을 기록하는 한편, 라 리가 5연패와 챔피언스컵 3회 우승, 그리고 4차례 리그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하며 보란 듯이 제2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30대 초반의 나이 및 2년간의 공백기로 인해 주위의 우려 속에서 데뷔했음에도 불구, 푸스카스의 전성기는 30대 중후반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푸스카스는 39세까지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현역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지난 2006년 향년 79세로 타개했습니다.
* 오로지 왼발
푸스카스는 오른발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고집스런 왼발잡이였습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왼발 하나로만 플레이했던 오랜 습관 때문이며, 잉글랜드의 전설 보비 찰튼 역시 “푸스카스가 오른발로 볼을 차는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없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푸스카스는 슈팅, 드리블, 패스 등 거의 모든 볼 처리를 왼발 하나에만 의존하는, 어찌 보면 비교적 단순한 스타일의 선수였습니다.
또한 푸스카스의 몸싸움 능력이나 스피드 역시 그리 특출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푸스카스가 이러한 신체적 능력의 부족을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효과적인 개인기였는데, 특히 푸스카스는 슈팅 모션을 취하며 볼을 접는 페인트 동작과 발바닥을 활용한 볼 다루기에 굉장히 능했다고 합니다.
* 역시 왼발
이러한 개인기 이후 벼락같은 왼발 슈팅으로 득점을 뽑아내는 것이 푸스카스의 주특기였습니다. 이 중에서도 발바닥으로 볼을 끌어 당겨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는 개인기는 푸스카스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습니다. 빌리 라이트를 비롯한 잉글랜드 수비수들 역시 이러한 개인기에 철저히 농락당한 바 있는데, 영국 사람들은 이 개인기에 ‘드랙-백(Drag-back)’이라는 영어식 호칭을 붙였습니다.
그 외에도 왼발로 슈팅 동작을 취하며 상대를 속인 다음, 접고 들어간 볼을 오른발로 차는 것이 아니라 왼발 아웃사이드로 처리하는 패턴도 자주 활용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러한 몇 가지 패턴을 바탕으로, 그것도 왼발 하나로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득점 기록을 달성해낸 인물이 바로 푸스카스였습니다. 펠레, 디 스테파노, 마라도나와 같이 경기 전체를 휘어잡을 만한 지배력을 지닌 선수는 아니었지만, 골을 만들어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득점 방정식’을 갖고 있었던 셈입니다.
한편 푸스카스는 예술적이고 절묘한 골장면을 자주 만들어내는 것으로도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이에 팀 동료 치보르가 “푸스카스의 골에는 2득점을 매겨야 한다.”는 유명한 한마디를 남겼을 정도였습니다.
FIFA에서도 이러한 푸스카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9년부터 한 해 동안 가장 멋진 골을 성공시킨 선수에게 ‘푸스카스상(FIFA Puskas Award)’을 수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