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져 버린 어떤 사이트에서
제가 무려 2년을 넘게 올렸던 글을 아곳에다 복사하여 올립니다..
그냥 그 사이트가 지금도 존속한다면
전 어떤곳에도 제 글을 올리지 않았을거고
그리고 이곳 박사모를 방문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겁니다...
무려 제 57부 까지 올렸던 제글을 이곳에다 다시 올립니다..
운영자님들과 박사모 회원님들의 노여움이 없길 바라며..
그져 즐겁게 읽어 주실분이 한분이라도 있었어면 하는 바램으로 이글을 올립니다...
다들 즐거운 하루 되시고여...
대제 징기스칸의 후예들. 1탄
1968년 아자시가 국민학교 6학년 1학기 사회책 첫 페이지엔..
우리 민족은 북방에서 흘러 들어 온 북방 우랄알타이계 라고 가르치더만
최근엔 어린녀석들 교과서에선
울 민족은 얼굴 특징으로 남방계[인도?] 글구 북방계 로 나누더만...
1960ㅡ70년대에 이 광수 이후
한국문단의 금자탑을 이룬 고[故] 선우휘씨[70년대 조선일보 만물상 주필]
한결같은 주장은 ..
울 민족은 농경 민족이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아주 순수한 민족이다 하고선 가끔 그 말을 조선일보에 실어 시더만..
1978년대초에 일본에서 "축소지향의 일본인" 이란 글로
일약 스타가 되신 "이 어령" 님이 울나라에 금의 환양하신 후에
중앙일보 논설 위원으로 신문에 글을 싣길..1985년 전후로 기억됨
"우리는 기마민족의 후예들이다"
이땅의 젊은이들이여 대륙을 뒤 흔들어 놓았던
우리 선조들의 용기를 가지고
다시 도전하는 그 기백으로..[당시 중앙일보 에서 본 기억]
다음날 조선일보에서 선위휘님이 반박 비슷한 글을 올립니다
한결같은 그분의 주장처럼 "우린 농경민족이다"
그다음날 중앙일보에서 다시 이어령님이
"우린 기마 민족의 후예다"
그 다음날 조선일보에서 다시 선우휘님 반박성 글..
그리고 또 중앙일보에서 이어령님이 악악 되었쪄..
사태가 묘하게 돌아가자 언론들이 입방아를 찍습니다
한국문단의 원로와 신예의 첨예한 대립 운운 하면서..
이 어령님이 사과성 해명을 합니다
결코 대선배님에게 대항하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언론이 너무 앞서는것 같다는 내용?으로 하튼 유화 제스처를 취하고선
선우휘님이 이걸 수용하는 선에서 사건이 매듭지어 집니다..
다음날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중에서 기억 되는 부분들..
우리민족은 오랜전엔 기마 민족일거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한반도에서 정착하면서 농경문화에 익숙해져선
우리도 후천적으로 농경 민족화 되었다..
일례의 예를 살펴보자
우리 민요는 흔히들 4 박자 혹은 2 박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진짜 우리 민족의 박자는 7박자다
즉 3분의 7박자..
민족의 고유 민요에 3 박자 문화는 흔히들 말 발굽소리 처럼 경쾌하다
그리고 4박자 문화는 농경 문화에 필수적 인거다..
헌데 우리 민요는 세박자와 네 박자를 더해 7박자 문화인거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세박자 문화에 익숙해져 있음은
우리 몸 속에서 우리가 기마 민족의 후예이란 증거인거다..
우리의 시조도 이와 잘 부응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이방원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챠죽어...정몽주
거의 동일선상의 7박자 문화
이것이 우리 민족의 문화이다 ....이상은 당시 이규태님 글 내용중에서
느낀 아자시 느낌 입니다...
비록 보잘것 없는 쇤네 글 이지만 혹 님들게서
아자시랑 함께..
몽고 초원의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몽고 부족국가를 29살에 통일시킨후에
37세에 중국을 짓밟고선 52세에 유럽 대륙을 공포로 몰아 넣었던
인류 역사가 기록한 전무후무한 대 제국의 제왕
저 자랑스런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웅
대제 징기스칸의 영광을 찾아서
아자시랑 함께 여행을 가지 않을래여?
첫댓글 징기스칸...대제는 말로 표현하기 못할정도로 위대한데...그 후예들은 꽝수준...저거나라 문자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지금은 러시아어도 아니고 중국말도 아니고 이상무리한 언어와 문자를 써고...민족 대영웅인 징기스칸의 묘지가 어딘줄도 모리고...
러시아(당시 키에프 공국) 및 동구권 쳐들어 가서가 거기서 만든 혼혈인이 진짜로 용맹하죠...코사크족...2차대전당시 유럽 레지스탕스계를 주름잡은 장본인들...
글 잘읽었습니다. 계속 후편 기대하겠습니다.기마민족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