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 파탈
1 팜므 파탈 곁에 없어도 여전히 내 사랑이라 부르며 개울을 건너갔다.
곁에 없어도 여 전히 내 사랑이라 부르며 세월을 건너간다.
곁에 없으므로 더 절실한 사랑이어서 곁에 없어도 미친 듯 사랑, 사랑 내 사랑이라 부르면서 간다. 팜므 파탈, 팜므 파탈, 팜므 파탈 부르며 간다.
2 이제 이 세상 모든 꽃도, 꽃을 이루는 말도 팜므 파탈이라고 하자.
신라의 가시내도 강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도 다 팜므 파탈, 자야도 나타샤도 팜므 파탈,
소녀도 아가씨도 아줌마도 여자를 이루는 모든 말도 팜므 파탈,
남자란 치명적으로 여자에게 노출되는 것, 여자를 닮은 달빛도, 여성성인 물도, 사시나무 그늘도, 나비의 날개도, 풀의 고갱이도, 닭 울음의 긴 여운도, 버지니아 울프도,
자욱한 안개도 안개에 묻힌 언덕도, 폭풍의 언덕도, 격렬함도, 고요도 다 팜므 파탈, 무력감에 불을 지피는 팜므 파탈, 상처를 주는 모든 말도 팜므 파탈,
붉은 암술을 가진 꿈도, 바람의 무릎을 가진 어둠도, 언젠가 한번 들른 적 있는 조용한 바닷가도 팜므 파탈,
속살을 보여주던 조개도, 속살을 살며시 가리던 물 묻은 가녀린 손가락도, 시집의 첫 페이지도, 소설의 마지막 장면도, 팜므 파탈,
내 아래를 쓰다듬고 가는 4 월의 어린 바람도, 이마를 스치듯 다가온 가쁜 달빛의 호흡도, 수면에 드러누운 처녀인 별빛도,
저 아득한 곳에 열려있는 블랙홀도, 내 영혼의 페이지에 끼여 있는 책갈피도, 책갈피에 쓰여진 비나 인생의 노래도 누구도 나도 부정 못할 팜므 파탈
한번 마주치므로 생이 달라질 팜므 파탈, 내 영혼의 동정을 버리고 싶은 팜므 파탈
다가가므로 소멸의 길 걷더라도 마주쳐 가면서도 서로를 알지 못한 날을 거슬러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팜므 파탈,
이 세상 모든 슬픔도, 슬픔을 이루는 말도 팜므 파탈이라 하자.
한번 들른 적도 없는 먼 시골의 논두렁 밭두렁도, 그곳에 핀 작은 풀꽃도 팜므 파탈이라 하자.
첫 대면에도 영혼이 오르라 들게 하는 팜므 파탈,
내게 처음일 팜므 파탈, 소실점을 이룰 아쉬운 팜므 파탈
3 팜므 파탈 너에게 가는 길에는 꽃물결 일게 하라,
노도의 새벽 닭 울음소리 앵강만을 말 달리게 하라
모든 고삐 풀린 바람이니 섬마다 핀 기일의 촛불이니
다 무화의 시간 속으로 가고 팜프 파탈 너만 만개하는 생명의 시간대로 조절하라
네 붉은 입술로 하늘마저 궁륭이라 찾는 무수한 붕이니 봉황 할단 새 주작 가릉빈가 비익조 가루를 노래하게 하라 시간의 이파리를 뒤적여서 사리처럼 맺힌 고혹적인 금단의 열매를 따보든지 팜므 파탈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붉게 핀 네 잎을 서늘하게 하라
너에게 가기 위해 풀뿌리처럼 맨발을 씻고 갓 태어난 그리움은 솎지 않았다. 퍼질러 놓았던 수 없는 기다림을 거두어서 씨앗처럼 가슴에 품었다. 팜므 파탈 사정 하듯 달빛을 쭉쭉 뿜어대던 달밤이면 더더욱 부음처럼 네 뚝뚝 지는 소리 더 먼 곳으로 보내면 멈춘 윤회의 바퀴 돌려 나마저 식물성 꿈으로 우리 조마구 같은 꿈의 나라로 함께 떠나자 아직은 쉽게 너의 모습을 데려다 오지 않는 길이며 세월의 멀미며 덜컹거리는 계절이며
하지만 팜므 파탈, 난 가고 있다. 천형의 길이라도 유배지로 가는 길이더라도 너만 있다면 기꺼이 그 어디든 가려고 느슨해진 신발 끈을 조이면 극락조의 울음소리 천년 대청을 울리면서 청아하게 찾아오지 않으랴
팜므 파탈 너를 찾아가는 길에 비로소 내 생의 눈이 실뱀처럼 떠진다.
너를 받아들일 요량으로 중앙고원 같은 가슴에는 말울음 소리 들풀처럼 겁 없이 번진다.
- 김왕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