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작가님께서 주신글]
덕수궁 돌담길
석조전은 경운궁 안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유럽의 궁정을 본 땄습니다
. 현관에는 대한 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부는 서양식 가구와 벽난로, 화려한 전등으로 장식되어있습니다.
고종 황제가 세상을 뜨면서 석조전은 일본그림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바뀌었습니다.
고종이 석조전을 건축한 러시아 공사에게 물었습니다. 귀국의 궁전과 비교하면?
황제 폐하의 덕수궁이 모스코바 크레므린 궁전 보다 훨씬 크지요.
황제의 어차는 캐딜락이었습니다. 이완용은 포드나 쉐보레를 타고 다니는데 덕수궁 석조전 앞에 세워두었다고 합니다. 백성들에게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중동 어느 토호국에서 우리 대사관에 문의가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저택 사진을 들고 다니는 한국인이 석유 수입을 원한다고 하는데 그 분의 신용을 알고 싶다고
덕수궁 분수대에서 석조전 방향으로 포즈를 잡고, 내복 바람으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덕수궁을 정문인 대한문에 들어서면 처음으로 막는 것이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大小官吏過此者皆下馬) 는 하마비입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가로수 옆에 서있는 조명이 쌀쌀한 저녁의 산책길을 따듯하게 밝혀줍니다.
조명은 특이하게도 길바닥에 동그랗게 설치되어 있어 떨어진 낙엽들이 춥지 말라고 불빛으로 덮어줍니다.
은행잎을 비추면 노란색으로 변하고, 단풍잎을 비추면 빨간색으로 변하니 도시에서 느끼는 늦가을의 정취가 이런 거구나
일찍 해가 저물어 벌써 환하게 켜진 가로등에 비친 은행잎과 단풍잎을 보니 가을의 끝자락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저녁나절 조명 불빛에 화려해서 시립미술관 건물과 교회당, 성공회 성당을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
일명 ‘정동길’이라고도 불리는 덕수궁 돌담길은 걷기 좋은 길로 명성이 나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사랑하는 연인들이 이 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애잔한 속설이 담겨있다.
덕수궁의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고종 황제는 경운궁을 거처로 선택하였다.
지금의 덕수궁 돌담길 역시 경운궁의 확장과 함께 길이도 길어지고 크기도 더 커졌다.
후궁 원혼들의 저주
경운궁 안에는 왕의 승은을 입지 못한 후궁들이 모여 살던 처소가 있었다, 그래서 일까?
이곳에서 외롭게 죽어간 후궁들의 한이 지금도 떠돌며 덕수궁 돌담길을 거니는 다정한 연인들을 시기(猜忌)하여 헤어지게 한다는 '돌담길 속설' 내려오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의 시작은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부터 시작 되는데 이대한문도 덕수궁 돌담과 잠시 떨어져 있던 시절이 있었으니 이곳에서 헤어지게 되는 것은 비단 연인들만은 아닌 듯싶다.
차도가 확장 되면서 덕수궁 돌담은 대한문 뒤쪽으로 복원되고 대한문만 차도 가운데 섬처럼 혼자 남게 되었다.
이혼법원 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의 가장 확실한 근거는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있었던 대법원과 서울가정법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부가 헤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둘이서 서울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나온 이야기라는 말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처녀귀신 설
정동 뒷골목은 무당이 많아 ‘무당골’ 이라 불렸다. 이곳에서 무당들이 굿이나 산제를 지냈다.
바람난 남편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굿이었다. 버림받은 여인네들의 한이 서린 곳이다.
덕수궁 옆 국회의사당 자리는 옛날에 ‘양말산’이라 불렸다, 이곳은 궁녀들의 화장터였다.
옮겨 간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돔이 상여를 닮았다는 말도 있어서인지 국회에서 처녀귀신이 자주 출몰한다는 헛소문이 돈다.
출처,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정말 헤어질까? 한남기 작가의 사진이 있는 이야기, ⓒ sangjomagazine.com
암연 / 고한우
내겐 너무나 슬픈 이별을 말할 때
그댄 아니 슬픈 듯 웃음을 보이다
정작 내가 일어나 집으로 가려할 때
그땐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어.
울음을 참으려고 하늘만 보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내 품에 안겨와
마주 댄 그대 볼에 눈물이 느껴질 때
나도 참지 못하고 울어버렸어.
사랑이란 나에게 아픔만 주고
내 마음 속에는 멍울로 다가와
우리가 잡으려 하면 이미 먼 곳에
그땐 때가 너무 늦었다는데
차마 어서 가라는 그 말은 못하고
나도 뒤돌아서서 눈물만 흘리다
이젠 갔겠지 하고 뒤를 돌아보면
아직도 그대는 그 자리에
가수 이문세의 비하인드 스토리
캐나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30대 젊은이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신장 185cm 의 훤칠한 키에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이상만 박사다. 당시는 이직 미혼이었다.
신부 감을 마련하지 못한 이 박사는 ‘몇 월 며칠’이라고 혼자서 날짜를 잡아 놓고, 그날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흰소리를 하고 다녔다.
이 박사의 신부 고루는 기준은 유별났다.
적토마를 타는 여포는 탁월한 칼싸움 실력 덕분에 양귀비 뺨 칠 정도로 예쁜 전족(纏足) 미인 초선을 뇌물로 받았다. 초선의 발은 얼마나 작았던지, 여포의 손바닥에 올라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전족을 하면 몸의 균형을 잡기위해 배꼽 아래에 힘을 집중시켜야한다. 은밀한 부분의 근육이 발달하여 그곳이 명기(名器)가 된다.
소녀경(素女經)에도 없는 명기 만드는 비법이다, 당연히 수혜자는 남성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20cm 넘는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레이디 가가, 피겨스케이팅 스타 김연아 그리고 토슈를 착용하고 연기를 하는 발레리나 강수진 정도다. 이 박사는 이 중에서 발레리나를 최고로 쳤다.
그리고 약속을 지켜. 이름 있는 발레리나인 신부와 그 날짜에 맞춰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후일 이화여대 교수가 된 육완순 여사다.
이 박사에게는 딸이 있었다. 이화여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U 대학 유학 중이었다.
어느 날 머리통이 말 같이 크고 이상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찾아와 넙죽 절하며 딸을 달라고 하였다.
직업을 물어보니 백수란다.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노래 밖에 없다고 했다. 기가 찼다. 딸자식 굶기기 십상이다.
무위도식하는 딴따라 킹카의 꼬임에 빠졌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바로 이 베짱이는 딸을 꿰차고 도망을 쳤다.
육안순 교수는 가출한 딸 걱정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세옹지마(塞翁之馬)라면 수지맞는 장사잖소. 다 게네들 운명이요. 옆에서 보고 우리는 즐깁시다.” 하는 부인의 설득에 이 박사가 백기를 들었다.
바로 그날 저녁, 딸은 백마를 타고 돌아왔다. 불한당 같은 도둑놈은 이문세다. 참고로 이문세는 8살 연상이다.
이상만 박사는 허주의 은사 (민감한 사항이라 해당 가수의 검토를 필했습니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힌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힌 조그만 교회당
까꿍 아침산책 200330
=======================================
임영웅 Cover 암연 (고한우)
첫댓글 암연 / 고한우
내겐 너무나 슬픈 이별을 말할 때
그댄 아니 슬픈 듯 웃음을 보이다
정작 내가 일어나 집으로 가려할 때
그땐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어.
울음을 참으려고 하늘만 보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내 품에 안겨와
마주 댄 그대 볼에 눈물이 느껴질 때
나도 참지 못하고 울어버렸어.
사랑이란 나에게 아픔만 주고
내 마음 속에는 멍울로 다가와
우리가 잡으려 하면 이미 먼 곳에
그땐 때가 너무 늦었다는데
차마 어서 가라는 그 말은 못하고
나도 뒤돌아서서 눈물만 흘리다
감사드립니다
고운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