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잡학과 교수
<강의계획서>
1주차 : 북촌
2주차 : 국사당
3주차 : 성균관
4주차 : 조계사
5주차 : 인사동
내 예상과 달리 자네들에겐 유교보다 불교가 익숙한가봐.
성균관보다 조계사 답사를 더 잘 받아들이는 것 같은게...
오늘은 서울 답사 마지막 강의라네.
인사동으로 갈거야.
서울이 600년 고도라 하지만 옛 모습을 찾는건 굉장히 힘든 일이지?
그게 다 일제강점기랑 한국전쟁때문이야.
그나마 전통의 편린을 느낄 수 있는곳이 궁궐과 몇 안되는 곳인데
이 강의 시리즈가 바로 그 몇 안되는 곳을 둘러보기 위해 기획되었다네.
외국인들은 인사동을 '메리의 골목 Mary's alley'라고 부른다네.
왜 갑자기 메리? 아마many의 변형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데
그렇다면 이 이름은 북촌에서 봤던 꼬불꼬불한 골목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겠지?
그랬는데, 인사동도 옛날 모습이 많이 사라졌어.
길을 정비하고, 프랜차이즈가 즐비하고. 조선을 느끼기는 참 힘들어졌네.
그나마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향기를 찾아서 들어가보게.
인사동에는 고서점이나 필방, 화랑이 많은데
도화원이라고 아나? 그림과 글씨를 취급했던 관청. 드라마에서 종종 묘사됐었지?
거기서 사용되는 종이나 붓, 묵. 그리고 완성된 그림이나 글씨도 유통되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골동품 상점은 생긴 경위가 좀 다르네.
20세기 초에 들어서야 인사동에 골동품 상점이 생겼어.
왜 그렇게 늦게?
조선이 망하자 북촌에 살던 양반들도 같이 몰락할때
그때 그들이 가졌던 가구가 인사동으로 나오기 시작한 까닭이네.
가문이 망했으니 귀중품을 팔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고..
그들이 내놓은 물건은 보통 일본인들이 많이 사갔고
결국 인사동에는 자연스럽게 골동품 시장이 형성됐지.
그러다가 1945년에 일본이 전쟁에서 지자, 정반대의 시장이 형성되었어.
일본인이 조선을 떠나면서 샀던 가구를 다시 내 팔기 시작한거야.
이때의 주 고객은 미군이었네.
이때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골동품이 팔려나갔어.
골동품에는 옛날 책도 포함되는데
당시는 전통 문화에 대해 무관심했던 때라 고서들이 팔릴때도 제 값을 받지 못했네.
책 하나하나를 감정해 파는게 아니라 무게를 달아 팔았거든;
그냥 종이더미 취급을 받은거지.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아.
물건이 더이상 나오지 않기도 하고,
전통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지식도 많이 신장되었으니까.
한편 70년대 들어 정부가 골동품 시장을 견제했는데
여기서 검은 돈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라네.
결국 많은 골동품상이 인사동을 떠나 장안동으로 옮겨갔는데
거긴 그나마 요새도 거래가 많다고 하니 관심있으면 한번 가보게.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가게는 어떤 종류들이 있을까?
인사동에는 500개가 넘는 가게들이 남아있는데
그중 30%가 넘는 가게가 음식점이나 찻집이네.
대개 한식과 전통 차를 팔지.
차 문화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매우 발달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네.
왜냐면 차는 원래 불교랑 관련이 깊거든.
14세기 말까지는 불교가 국교였으니 우리도 꽤 다도 문화가 발달했지만
조선을 거치면서 불교의 관습을 멀리하게 된 거지.
게다가 조선의 사대부는 일상생활이나 의례때 차보다는 술을 선호했거든.
한식 상점의 경우, 인사동에서 제대로된 한정식을 먹기가 힘드네.
왜냐면 양반문화에서의 한정식은 손이 너무 많이 가서 수지타산이 안맞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전통 음식 문화가 제대로 전승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양과 일본 문화가 들어와 섞여버렸기 때문이야.
음식점 말고 가장 많은 상점은 화랑, 골동품가게, 필방이네.
서울의 필방 90%가 인사동에 밀집해있고
화랑은 80개가 넘는 수로, 서울에서 여기보다 화랑이 더 많은 지역이 없어.
고서점은 옛날보다 많이 줄었지만 '통문관'같은 곳은 80년 이상 되어
책방으로는 서울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말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됐단 뜻이기도 하다네.
공예품을 파는 가게도 있는데 공예품하면 도자기를 빼놓을 수 없겠지?
요새는 값나가는 도자기를 보긴 힘들지만
옛날엔 고려청자같은 아주 귀한 물건이 유통되던 곳이거든.
대신 지금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만들어진 도자기가 많이 거래되고 있네.
한편 인사동에서는 한복을 파는 가게도 꽤 많이 볼 수 있다네.
우리는 음식도 주거 형식도 우리것을 고수하고 있지만
의복의 경우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지.
오죽하면 한복입은 사람을 보고 코스프레 한다 말하는 사람이 있겠나.
사실 서양식 생활에 전통 한복은 불편한 감이 많긴 해.
그래서 디자이너들이 그 불편한 점을 개량해 내놓기 시작했는데
인사동의 한복점은 그런 개량된 한복을 많이 내놓는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량한복은 우리에게 그닥 환영받지 못하지만.
또 인사동에 많은 것이 떡집이라네.
우리나라 사람은 쌀이 주식이지? 그 쌀로 만든 밥은 일상생활용이라면
쪄서 만든 떡은 의례용이지. 용도가 명확하게 구분되네.
그래서 떡을 별미라고 칭했던거야.
왜 인사동에 떡집이 많냐고?
북촌 갔을때 서울은 남촌이랑 북촌으로 나뉜다고 했지.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촌은 떡이 유명하고 남촌은 술이 유명하다고 하더군.
왜냐면 궁궐에 살던 수라상궁이 인사동에 터를 잡았기 때문이네.
그래서인가 인사동의 떡집 역사는 꽤 길다네.
한번쯤 먹어보는것도 좋겠군.
이만하면 인사동에 있는 집들은 대개 다 보았는데
마지막으로 골목길을 다녀보라고 권하고 싶네.
은근히 재미있는 곳이 많아.
나이프 박물관이라던가 목인 박물관이라던가.
또 피마골이라는 곳도 있는데
조선시대 말을 타고다닌 사람은 관리들이었어.
그 관리들이 말을 타고 아침에 출근하면
평민들은 그자리에서 머리를 숙이고 관리가 지나가길 기다려야했지.
이 과정이 번거로와 하급 관리들은 결국 골목길로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피마골로 불렸던 거야.
근데 지금은 다 철거잼;
북촌에서 본 양반문화를 시작으로
국사당, 성균관, 조계사에선
한국인의 정신을 빚은 무교, 유교, 불교의 문화를 보았고
오늘은 구한말의 정신없던 우리의 옛 모습을 엿보았네.
재미있었길 바라네.
더불어 북촌답사때 거기 거주하는 학생 몇이
구경온 사람들로 너무 시끄럽다며 불편을 호소했었지.
왜 우리는 '우리 것'을 보는데 그렇게 사진을 찍어대고 호들갑을 떨까?
왜 한복을 입은 사람을 신기하게 쳐다보지?
왜 우리 것을 '일부러 찾아' 가야 할까?
나는 이 현상들이 우리가 우리 문화를 너무 멀리 두고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일상적이지 않은 위치에 우리것을 두고있으니까.
이번 답사를 통해 자네들이 우리것을 좀 더 친숙하게 두고 살았으면 하네.
그럼 답사기 제출하고 가게.
답사 끝났네.
해산해도 좋아.
첫댓글 수고하셨어요 겨수님 ㅠㅠ
하아... 교수님 열씨미 배울게여~
ㅠㅠ그동안감사했어여 겨수님
감사해요ㅠㅠㅠㅠㅠ
교수님 벌써 종강이라뇨 ㅜㅜ 수강신청 해놓도 다음강의 기다릴께요 ㅜㅜ
오 겨스님ㅜㅜ 멋져용..
교슈님 이전 강의부터 다시 돌려볼께여ㅠㅠㅠ
우앙ㅋㅋㅋ 재밋다 맨날 그냥 지나만 다니던 길이엇눈데ㅎㅎㅎ 피맛골 골목 막걸리 짱짱이야
글잘읽었어요ㅜㅜ 인사동 한번밖에 안가봤는데~!
오와~~~~~ 이런 서울 답사글 너무너무 좋앙!!! ㅜㅜ 거마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