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시간 한참 뒤 적막으로 잦아드는 노곤한 빌딩
늦게까지 사무실 못 떠나고
유리창 어둑할 때 단 하나 밝힌 노란 전등 밑에서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대양에서 멀리 떨어진 내지內地
잿빛 이른 봄날 당신 주위 평원의 거대한 공간 가로질러
희끗한 눈발 날릴 때 서점에 가서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견뎌내기엔 너무 많은 일들 일어난 방
침대 위 이부자리 둘둘 말려 노곤히 쌓여 있고
입 벌린 여행가방 떠나자 재촉해도
아직은 떠날 수 없는 그곳에서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지하철 속도 늦춰지며
여지껏 당신 삶에 결코 허용되지 않던 새로운 사랑 향해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전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팔레스타인 봉기 소식 기다리며
소리 없는 이미지들 번득이며 스쳐가는 텔레비전 화면 불빛 삼아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눈길 마주치거나 외면하는 낯선 이들과 엉겨 있는 대기실에서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소외되거나 스스로 소외시킨
젊은이의 권태와 피로감으로
형광등 옆에서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시력은 약해져 두꺼운 안경 끼고
너무 확대된 글자들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지경이지만
철자 하나라도 애틋하여 멈추지 않고
당신이 이 시를 읽어나가는 걸 난 압니다.
우는 아이 어깨 들쳐메고 우유 데우며
덧없는 인생의 목마름으로 손에 책을 들고 난로 옆 오가며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난 당신이 모국어 아닌 이 시를 읽는다는 걸 압니다.
웬만큼 읽지만 어떤 단어들은 추측밖에 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난 그 단어들이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마다할 수 없는 업무에 복귀하여
쓰라림과 희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뭐라도 들으려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당신이 멈춰선 그곳은
당신만큼 헐벗고 읽을 만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에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가지 않는 길 미국 대표시선], 창비, 2014.(옮긴이 손혜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