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가 만들었나?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적어도 9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통설이 있었습니다.
“훈민정음은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 세종은 뒤에서 만들라고 시키기만 했을 뿐.”
통설은 이렇지만 실제로 훈민정음은 세종이 몰래 만든 글자입니다. 본인 혼자서, 혹은 가족들만 참여시킨 것이지요. 당시의 학자들이 참여한 정황은 없지요. 완성 전까지 이런 작업을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실록이나 기타 기록에서도 왕이 직접 만들었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일단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가장 반대한 것이 집현전 학자들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만리가 있겠습니다. 평생 청렴하게 살다가 훈민정음 반포 때 극렬히 반대해서 대대손손 까이는 인물이지요. 이 최만리가 당시 집현전 부제학이었습니다.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지요. 최만리의 눈을 피해 집현전 학자들 몇몇, 그러니까 최만리의 부하직원과 함께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내용은 집현전 학자들이 정리한 것 맞습니다. 세종이 강경하게 훈민정음 반포를 밀어붙인 뒤에 정인지 등의 학자들을 시켜서 해설서를 만든 것이지요.
2. 어떻게 만들었나?
실록에는 최만리가 훈민정음을 반대할 때 올린 상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세종실록> 세종 26년(1444) 2월 20일
이 외에도 기록의 곳곳에서 자방고전(字倣古篆)이란 단어가 나타나지요. 옛 것을 본떴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훈민정음이 창작이 아닌 다른 문자를 베꼈다는 주장이 나타납니다.
물론 세종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까지 수많은 음운학 서적을 봤다는 기록이 있지요. 신숙주가 중국에 갈 때마다 부탁한 것이 어학에 관한 책을 좀 사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앞서 말했다시피 비밀리에 만든 글자기에 신하들이 왜 그런걸 보냐고 물으면 ‘중국어 공부 좀 해놔야 사신들이랑 말 좀 잘하지.’ 정도로 둘러댑니다.
그러나 세종은 어디까지나 언어학의 원리 이해를 위해 서적들을 참고했을 뿐입니다. 강찬석 충북대 국문과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훈민정음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문자들의 모양을 본떴다거나 원리를 받아들였다는 증거는 확인할 수 없다.”입니다.
그 증거는 해례본입니다. 해례본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가 담겨 있는데, 글자의 모양새는 사람이 발음할 때의 구강구조를 반영한 것이지요. 당연히 이런 원리를 담은 문자는 훈민정음 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례본이 공개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문창살 무늬를 보고 만들었다는 등의 얼토당토 한 이야기가 퍼져있었습니다만, 해례본 덕분에 이런 주장은 사장된 상태지요. 창제원리가 남아있는 문자는 훈민정음이 유일합니다.
그럼 최만리는 왜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일까요? 간혹 최만리가 언급한 전서가 전 왕조의 문자라든지, 고조선의 문자라든지 하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자를 보면 잘 아시겠지만 여기서의 ‘전’자는 ‘앞 전(前)’이 아닌 ‘전자 전(篆)’입니다. 바로 한자 글씨체의 하나인 전서를 지칭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실록의 문장을 잘 보면 아시겠지만 이게 단정하는 게 아니라 ‘임금님은 옛날 중국 전서체를 모방했다고 말하시는데 제가 보기에는 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임. 이 원리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요?’입니다. 여기에 최만리는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게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고 격분하지요.
최만리의 상소에서 세종의 의중이 나타납니다. 글자를 만드는 건 학문적으로 중요하지만 동시에 외교적으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명에 대한 사대를 표방한 조선이니 만큼 독자적인 문자를 만드는 건 기존의 조공-책봉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라고 해석될 수 있지요.
때문에 세종은 훈민정음을 자신의 순수한 창작이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신하들이야 그렇다 치고 명나라에서 이걸 문제 삼으면 골치가 아파지니까요. 기록에서 자방고전이란 말을 그토록 중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문자를 참고했다고 광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이런 주장 역시 해례본에 상세한 제작원리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3. 왜 만들었는가?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일단 통치력 강화를 위한 것이란 설이 있습니다.
훈민정음 반포 후 가장 먼저 만들어진 책이 <용비어천가>입니다. 세종의 6대조 이안사(목조)부터 아버지 이방원(태종)까지 찬양하는 내용이지요. 최근 방영하는 ‘육룡이 나르샤’는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구절로 여기서 육룡은 원래 세종의 직계조상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만... 드라마에서는 뭔가 판타지스럽게 구성해놨더군요.
하여간 <용비어천가>가 대놓고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정권찬양물의 대표주자인 만큼 훈민정음 반포가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증도 존재합니다. 기록상 세종은 분명히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지요. 조정 대신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지배층에게 돌아가는 장점을 주장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조선이 지금처럼 선거 같은 걸 하는 나라는 아니니까요.
일본의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훈민정음은 어리석은 백성이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낙서하듯 그리기에 어려움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훈민정음에 연서와 삐침이 등장한 것은 창제 후 수 세기가 지나고 궁체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이와 비슷하게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많은 문자들이 대개 복잡하면서 장식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실용성만을 고려하여 장식성을 완전히 배제한 초창기 훈민정음의 모양은 어떻게 보면 당대의 서체 미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전위적인 형태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거의 근대 모더니즘을 연상케 한다.
-노마 히데키, <한글의 탄생> 중에서
그리고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기는 했으나 훈민정음은 조선 후기에 양반이 아닌 피지배계층들의 문화를 꽃피우는 근본이 됩니다. 무엇보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이 편하게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세종의 본심이 어땠든지 간에 훈민정음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창제된 글자라는 점을 완전히 부정하기 힘듭니다.
4. 양반들에게 핍박받은 언문?
사대주의에 빠진 양반들이 한문만 숭상하고 한글을 언문이라 부르며 배척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게 구한말 한글 학자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조선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은 결코 비하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이 훈민정음에 대해 보인 공식입장은 ‘성인이신 세종대왕이 인간을 초월한 지성으로 지어낸 글자’입니다. 물론 세종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대 임금들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 아래에 이런 입장을 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왕실의 입장이 이러한데 양반들이 대놓고 훈민정음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 보입니다.
언문이라는 표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언문이 비하하는 표현이 아닌, 단순히 구어체 문장을 뜻한다는 주장이 있지요. 애초에 훈민정음은 양반들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던 글자였습니다. 창제 초기에는 일반 백성보다 양반층 부녀자나 중인들이 더 많이 사용하였지요. 즉, 양반들이 훈민정음을 언제나 하찮게 여겼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첫댓글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한글날을 즈음해서 훈민정음에 대한
역사를 재인식 시켜주신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영화, 소설 등 판타지 문학류가 바로 역사적인 사실을 어지럽게하는바 검인정을 강화하던지 아니면 국정화 시켜야 합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