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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의 소설가가 쓴 신작소설집 <롤러 코스터>(나무와 숲)에 실린 서문과 소설입니다. 교육소설로만 이뤄진 소설집입니다. 아이들에게 읽혀도 괜찮을 듯합니다. 꽤 선정적(?)인 내용의 작품도 있지만, 그만만한 아이들이 내보일 수 있는 행동양식을 그린 소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차마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다>
'3월 추위가 장독 깬다'는 옛말이 있다. 미루건대, 이상기후가 마냥 지금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번 겨울처럼 많은 비가 내린 적도 드물었다. 하우스에서 짓는 호박농사, 오이농사, 딸기농사를 망쳤다는 전언이다. 잦은 겨울비로 인한 일조량의 절대 부족과 3월 냉해가 원인이란다. 강원도엔 3월 말 경인데 대설이 내렸다. 망측한 날씨다. 이즈음의 한국사회가 날씨만큼 망측하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한 젊은이의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에 대한 통렬한 자기비판이 좁게는 대학 사회를 넓게는 한국사회를 숙연한 자탄의 시간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1천만원 대에 이른 등록금을 내고 학생들이 대학에서 배우고 익히는 건 뭔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로 전락한 대학. 이렇게 변모해버린 대학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병폐를 심화시키는 여럿의 연결고리 중 그 중심의 역할을 맡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고에 휘둘리며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를 고착화하는 책무를 대학이 선두에서 맡고 나선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생선발권의 위임을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중등교육을 입시지옥으로 몰아넣는가 하면, 기여입학제를 도입하려는 부단한 시도를 통해 부의 편중과 자본의 대물림을 꾀하고 있다.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이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도록 만든 대학(大學) 없는 대학은 한국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이럴진대, 대학사회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결코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단맛에 대학사회가 물들어 있다. 이런 대학사회를 지켜보는 건, 한국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아 슬프다.
하물며, 그런 대학에 기를 쓰고 보내야만 하는 부모된 자의 벋대지 못하는 심경이 참으로 시름겹다. 그런 대학에 진학해야만 하는 '유보할 수 없는 청춘의 세대'에 대한 나이든 자의 자리가 너무 추레하여 자성의 술잔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다시금 읽는다. 이런 젊음이 한둘이 아니기를 나약한 기성의 희망으로 희망해 본다. 부끄럽다. 가슴이 콩콩 뛰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번 신작소설집은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교육과 관련한 내용으로 한정한 글쓰기였다. 우리 교육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곱씹어보는 작업만으로도 유의미하다는 판단이었겠으나, 작가들에겐 매우 고통스러운 주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창백한 민주주의 시대에 글 쓰는 이로서, 더불어 학교에서 아이들 대하는 자로서, 감히 낯을 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참여했어야 하는 몇몇 작가는 끝내 글을 내지 않았다. 그들 또한 부끄러움의 다른 표현으로 작품을 못낸다 하였다. 여기에 실린 글은 그리하여, 부끄러움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남녘엔 꽃 피고 바람 또한 상큼하다. 허나, 우리는 오늘 차마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다.
2010년 봄날에
앞이 안 보여, 그만
한 상 준
한데 바람이 불어 댔다. 전선줄을 튕기듯 팽팽한 바람이 교무실 창문을 다시 할퀴고 지나갔다. 천장에 설치된 냉난방기에서는 푸석푸석한 온풍을 연신 쏟아내고 있었다. 바깥의 맹추위에 덩달아 달아올라 탁하고 건조한 바람이었다. 숨이 터억 막혀 왔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눈발이, 성근 눈발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나는 인터넷 동호인 카페에서 빠져나왔다. 목이 컬컬했다. 눈발이라도 받아 안고 싶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골프 동호인 카페였다. 닉네임이 러브샷인 회장이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카페에 들어가 보라는 내용이었다. 몇 주째 필드에 나갈 수 없어서 아쉬웠던 차에 기분전환도 할 겸 둘러볼 요량이었다. 물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석 인사를 하는 카페였다. 같은 연습장 출신으로 필드에 한두 번 나간 적 있는 초보자들을 위한 카페였다. 회장의 직업이 같은 직종이어서 덜 서먹했다. 필드에 처음 나섰을 때, 러프에서 그의 조언대로 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땡볕이 기승을 부리던 여름방학 초입에 이를테면 머리를 올렸다. 그 뒤 기를 써서 부킹을 했고, 라운딩에 빠져들었다.
23년차 교사인 나는 교감 승진을 포기한 교․포로, 중학교에 근무하던 때에는 전교조 지회 조직의 핵심 부서를 맡아 활동한 열혈 조합원이기도 했다. 중학 생활 8년째를 맞으면서 교직에 대해 혼란을 겪기도 하고 그렇게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고등학교로 내신을 냈다. 옮긴 지 이제 15년째였다. 고등학교로 옮기고 대여섯 해가 지난 뒤부터는 조합비만 내는, 무늬만 조합원인 상태로 변모했다.
인문계 고교로 옮긴 뒤, 입시에 매몰되어 가는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때때로 경계선을 걷고 있다는 자책에 빠져든 경우 또한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승진을 포기했고 교과수업을 열렬히 하고 있으며, 대학입시에서도 진학 성적을 인정받고 있으니, 어느 정도 경제적 뒷받침이 따르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마찬가지로 그에 따라 여가를 즐기는 것 역시 마땅한 보상이라는 인식적 단계에 천연덕스럽지는 않았으나 별 다른 내부 저항 없이 도달해 있었다.
테니스, 배드민턴, 논술모임과 오토캠핑 동호회 등등을 거쳐 9개월 전에 나는 골프에 입문하였다. 자전거 처음 탈 때처럼, 바둑돌 처음 놓을 때처럼 그렇게 몰입했다. 골프는 이제 마지막으로 찾은 내 생활에 있어 최고의 활력소라는 생각에 자신을 밀어 넣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최근, 편두통에 이어 이명에까지 시달리면서 그동안 필드에도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약물로도 치유가 잘 되지 않았다.
3층 어느 교실에선가 우와! 눈이다, 하는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함성은 옆 반으로 파도타기처럼 번져 갔다. 눈알갱이 구경하기가 여간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더욱이나 첫눈이었다. 한참 시끌벅적하겠다, 싶다. 애들은 무슨 건수라도 찾아서 수업 방향을 틀어놓고자 안달이곤 하였다. 교감 샘 책상 앞으로 기다랗게 놓인 회의용 탁상에 둘러서서 주전부리하던 몇몇 샘들 또한 눈이네, 하면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금요일 오후 6교시째였다. 일주일 중 가장 느긋한 시간이었다. 수업이 빈 샘이 유독 많아 교무실에선 간식거리를 나눠먹곤 했다. 오피스 룸처럼 꾸민 교무실에서 첫눈을 보고 내뱉는 샘들의 짧은 탄성치곤 메말라 있다는 생각이 퍼뜩 엄습했다.
이중 창문을 후려패고 내닫는 바람의 기세가 갈수록 억세졌다. 산중턱을 깎아 지은 건물로 바람받이였다. 남녘이라고는 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추위가 계속되었다. 학교 건물에서 내려다보이는 깊숙한 저기 저 만(灣) 쪽에서 내처 달려온 한겨울의 바닷바람은 드센 기세로 휘몰아쳤다 어딘가로 휘몰려가곤 하였다. 겨울 초입부터 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바닷바람에서 매운 겨자맛이 났다.
첫눈을 보고 내뱉은 샘들의 어투가 밭아 있듯 교무실 풍경 또한 마르고 칙칙했다. 바뀐 풍속도였다. 오래전, 그러니까 내가 초임 시절만 해도 학교 분위기는 겉으로는 무솔아 보였으나, 한편으론 들뜨고 용솟는 갈망이 내재해 있었다. 젊은 샘들은 둔탁하지 않은 몸짓을 내보이곤 했다. 엄혹한 군정이었고 전교조 결성이 폭력으로 진압된 이후, 학교 담벼락 안에도 분노와 절망이 덮씌워져 있었다. 하지만 젊은 샘들 사이엔 교육다운 교육 행위를 하고픈 바람이 절절했다. 끈끈한 동지애가 더불어 전류하고 있었다.
그때는 갈탄이나 화목 또는 석유난로로 난방을 했는데, 난로 연통에 댄 손끝을 살짝 건드리며 연정 품은 어느 샘에게 넌지시 눈길 건네던 시절, 첫눈 오는 오늘 같은 날이면, 퇴근 후 총각 샘들은 술집 탐방을 1차로 시작해서 처녀 샘(들)이 사는 자취방을 훑고 다니는 걸 결코 빠뜨리지 않았다. 다음날이면 난롯가에서 훈훈한 후일담이 오가곤 했다. 그 시절에는 미시적 담론을 나누면서도 교사로서의 아름다운 위의를 찾는 눈빛이 형형했다. 그러나 그런 풍광은 학교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학교 내에서조차 샘들끼리도 만나기 어려운 게 요즈음이었다. 학년실이나 연구실로 쪼개져 옮겨간 교과 샘들은 그곳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교무실 출입마저 뜸했다. 가끔 학부모로부터 간식이 들어오거나 교직원 가운데 새 차를 뽑았다 해서 혹은 새 옷을 입었다 해서 과일과 떡 등속을 내놓게 되면, 나처럼 학급 담임을 맡고 있으면서 업무부장을 꿰차고 있는 경우 외엔 대부분 업무담당 샘들만 상주하는 편인 교무실에서 교감 샘 책상 앞에 놓인 회의용 긴 탁상에 둘러서서 음식 먹으며, 구입한 새 차에 대해 또는 백화점 어느 코너의 옷값이 그런대로 적정하더라는 시시콜콜한 몇 마디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거시적 담론 아닌 학교 내의 민주적 절차성을 꼬집는 미시적 담소마저 이제는 화제에 오르지 않는 분위기였다. mb 정부 들어 더 확연해진 모습이었다.
물론 주전부리 챙겨와 저잣거리에 회자되는 풍문이나 인기사극의 주인공과 얽힌, 결코 무겁지 않은 토막 소식 등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샘들을 끌어 모으려 안절부절못하는, 부전공이 친목과인 동료 또한 없진 않았다. 쉬는 시간이면 아예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두통 일으키지 않을 만큼 가벼운 읽을거리로 가벼이 빈 시간을 때우던 샘들 역시 당최 내키지 않는 듯한 자세로 슬그머니 탁상 주위에 몰려들곤 하는 목하, 금요일 오후 6교시째였다. 나는 일주일에 두 차례만 학년실에서 교무실로 내려오는 탓이기도 했지만, 소식 한다는 핑계로 그 주위에 접근하지 않는 축에 속했다.
―동거한다던데.
―나이 많은 놈팽이래.
―서른도 넘었다더라.
―뭐야, 미쳤다.
―나리, 그앤 작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고 했지 않나?
빠르고 거침없이 넘나드는 이야기 흐름을 나 또한 추월해 듣고 흘리려다가 터억, 숨이 막혀 오는 것이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젖을 따끔따끔 건드리는 푸석한 실내 공기가 싫어 인터넷에서 빠져나와 눈발이라도 맞을까 해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그만 털썩 주저앉게 만든 이름, 나리였다.
―낮엔 알바도 한대. 놈팽이에게 딱 걸렸나 봐.
―시내 ‘압구정김밥집’에서 일한다던대.
―학교 개망신 아냐?
―다른 애들 물들기 전에 짤라야지 않나?
―안 보이던대.
―3학년 5반 애던가?
편두통이 밀려왔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까지 귓바퀴에서 윙윙거려 나는 그만 아주 빠르고, 그러나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으으.
누군가 그러는 나를 발견하고는 움찔하는 듯했으나 대수랴 싶은 듯 이내 덧붙였다.
―술집에서 알바 하는 애들, 벌써 여럿이라네.
―단속은 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잡아.
―지들끼리는 다 알아. 잡으려고 하면 못 잡을 것도 없지.
−수능 보고 나면 고 3 생활지도는 끝이지, 뭐.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합시다. 나린, 우리 학교 학생 아니잖아요, 이젠.
교감 샘의 어투가 그나마 삭막하지 않게 닿았다.
현관으로 나섰다. 혹한의 바람이 훅 밀려왔다. 옷깃을 한껏 추켜올린 두툼한 겉옷 속으로 칼바람이 파고들었다. 추위의 기세가 더욱 드세졌다. 나리는 교감, 교장 샘과 학생과 샘들만 아는 가운데 소리소문 없이 담임인 내가 자퇴 처리한 애였다. 한 달 전이었다. 동거 소식을 뒤늦게 접한 비담임이면서 업무 기획을 맡고 있는 1, 2학년 교과담당 샘 몇몇이 주전부리하며 빈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낼 요량으로 끄집어낸 주전부리용 메뉴였다.
북풍한설이 연방 몰아쳤다. 부르르 몸이 떨려 왔다. 나는 지근지근 아파 오는 뒷덜미를 쓰윽 문질렀다. 이명을 떨치려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귓바퀴를 연신 문질렀다. 이명은 가시지 않고 계속 윙윙거렸다.
편두통에 내내 시달렸다. 정나리를 자퇴 처리한 이후부터였다. 자퇴 처리는 통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부모 동의도 본인 사인도 받지 못했다. 결석일수가 3분의 1을 넘었고, 해서는 아니 되는 행위를 현재 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이혼한 양부모 중 누구와도 연락되지 않아 임의 처리한 것이었다. 나리 역시, 한 친구와만 통화가 이뤄질 뿐 담임인 내 전화도 받지 않았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어느 사내와 동거 중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통화 가능한 유일한 친구에게서 전해 들었다. 사실이라는 것 또한 나리의 유일한 친구에게서 확인한 사항이었다. 11월 말이었다. 수능 이후 교실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때였다. 곧 방학이었고, 딴은 졸업을 시켜도 무방한 시점이긴 했다.
동거하고 있다면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내가 먼저 알게 되었다. 다음으로 촉수를 켜놓고 문제성 지닌 아이들 일거수일투족을 투망하고 있는 학생부장의 귀에 흘러들어간 뒤, 곧바로 교감, 교장 샘에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학생부장이 징계위원회에 회부한다는 걸, 담임인 내가 자퇴 처리하겠다고 먼저 나섰다.
퇴학 처분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형식상 자퇴 처리하는 게 혹여 다음에 복학하고자 한다면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나는 그게 낫겠다, 싶었다.
―애들이라는 게 열두 번도 더 변하잖아요.
―허허, 자네는 암튼 애들에게는 잘해.
―……커가는 여자앤데, 그런 사유로 징계해서 기록으로 남겨둘 일도 아니잖아요.
다른 아이들에게 미칠 파장을 고려해 일벌백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교장 샘의 주장을 꺾는 데 애를 먹었다. 어쨌거나 그와는 동향이었다. 통사정해 처리한 자퇴였다. 나리는 그렇게 학교에서 쫓겨났다.
나리 같은 성향의 애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교직 생활 23여 년 동안 우여곡절이 참 많았지만, 고3을 맡기 이전엔 아이들과는 그나마 싱그럽고 훈훈했다. 내 손으로 학교를 포기하도록 만든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물론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리 같은 경우의 애는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아무튼 3학년 말이었던 까닭에 씁쓸함이 밀려왔고, 여지껏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딴은 동거하고 있다는 소식, 아니 거처하고 있는 곳을 알게 된 뒤, 또래 상담 업무를 자청해 맡고 있는 샘과 상의하여 나리를 만나 보도록 요망했었다. 나리가 품고 있을 어떤 분노나 갈증 또는 내면의 벽을 혹은 그로부터 기인했을 그애의 몸의 부림을 남성인 내가 듣고 함께 고민하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상담 과목을 애써 공부하여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대학에도 강의를 나가는 여성인 어느 샘께 상담을 부탁했던 것이었다. 고3 막바지에 이른 터에 자른다는 부담 또한 적지 않았으나, 유별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샘 또한 만나보고 싶다며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어렵게, 두 번 만났다고 했다.
―그애, 상처가 아주 깊더라구요.
―그럴 거라 봅니다.
―작년에 교실에서 자다가 세콤에 감지되어 출동 나오고 그랬다고, 자기 입으로 그러더라구요.
2학년 때부터 잠자리마저 유동적인 아이였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고3 담임 샘들에게 야․자 끝나고도 퇴근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기거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 확보해 두었던 기숙사에서 자게 된 9월 어느 날이었다. 새벽 4시쯤이었을까, 바깥이 시끄러워서 깼다. 비가 오고 있었다. 세콤에 뭔가가 감지되어 작동되는 바람에 경비직원이 출동해 본관 건물을 뒤지고 다니다 원인 제공의 물체를 찾아낸 것이었다. 나리였다. 얇은 모포 한 장 뒤집어쓰고 나온 그애를 숙직 담당과 경비 직원이 다그치고 있고, 그애는 떨고 있었다. 나는 기숙사 3층에서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느냐니깐 얼버무리더라구요.
―학교 다닐 적엔 그나마 학교에서 밥은 먹었었는데…….
굶기야 할 것이겠건만, 끼니는 학교에서 두 끼 정도 때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생뚱맞게 떠올랐다. 세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교내 식당에서 기숙사생이 아니었으므로 아침은 먹지 못했겠지만, 두 끼의 밥은 먹었겠지, 하는 생각에 닿은 것이었다.
급식비 때문이었다. 학교는 급식비 미납생을 가려 밥을 못 먹게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나리가 먹는 그 밥이 달면서도 한편으론 두렵고 창피하고 소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울분의 밥 덩어리였으리라는 상념에 젖도록 했다.
나리가 장기 결석에 들어가기 전인 1학기 중반이었다. 아침 조회를 하고 있는데, 행정실 직원이 급식비 미납자 명단을 들고 와선 나리를 비롯한 몇몇 아이를 행정실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버럭 화를 냈다. 그 따위 이유로 학생들 불러 가지 말아라, 누가 시키더냐? 가만있지 않겠다, 하면서 좀 어처구니없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불끈 역정을 냈던 것이다. 평소답지 않은 나의 태도에 놀란 건, 정작 미납 아이들이었다. 자신들에게 별반 신경을 써주지도 않던 담임이 저렇게 역성을 드는 게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하는 의심을 품기에 충분할 만큼 휘둥그레진 눈빛을 나리 또한 내게 보였다. 끼니 때우기에 급급했던 어린 날이 퍼뜩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보충수업비, 마지막 수업료, 졸업앨범대 등등 각종 납입금을 합해 이십여만 원 정도의 액수마저 낼 수 없는 처지에 대학은 언감생심 꿈꿀 수 없는 가정형편상, 고등학교 졸업장이 내게 무슨 소용이냐며 졸업마저 포기하러 학교에 보름 넘게 나가지 않았던 나의 고3 시절이 그 순간 오버랩되면서 그만, 울컥 하고 치밀어 올랐던 것이었다.
고3의 나이였으니, 더할 나위 없는 자존감의 문제였다. 해서, 나리 또한 급식비 문제로 호출하려는 행정실 직원에게 느닷없고 터무니없을 만큼 화를 내던 담임의 또 다른 일면을 보고 색다른 관점을 지니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나 역시 나리가 그때, 그 순간 휘둥그레진 눈빛을 드러내며 품었을 아주 조금의 공통된 감성만을 기억하고 있는 게 거의 전부일 만큼 담임인 나 또한 나리에 대해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았다.
2학년 말에 어느 사내아이와 모텔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소문은 이미 학교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작년엔 그 일로 징계 운운한 적은 없었다. 쉬쉬 하고 넘어갔던 사안이었다. 그 일로 해서 아버지로부터 더 내몰렸고, 여동생은 현재 전문계고 1학년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는 3년 전에 이혼했는데 부모 다 재혼을 했고, 재혼한 부모 둘 다 자식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했다. 자취방을 겨우 얻어주고 자매끼리 살도록 해줬는데, 그마저도 3학년 올라오자마자 아버지라는 자가 전세금을 빼가 버렸다고 했다. 동생은 학교 기숙사에 들어갔고, 나리는 친구 집을 배회하거나 교실에 숨어들어 몰래 잠자리를 해결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3학년 1학기 상황이었다. 그렇게 몇 가지 아는 바를 되새김해 보니, 나리가 처해 있던 상황은 그게 다였다. 작년 담임 샘에게서도 들었지만 거의 풍문으로 듣고 알게 된 내용들이었다. 내 손으로 자퇴 처리하기까지 좀 더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려는 의지마저 기실 내보이지 않았고, 사실 그럴 필요성마저 느끼지 못했다. 보충수업과 야‧자 감독, 수시생을 위한 정보 수집과 분석, 정시생을 위한 멘토 수업 등 대학 입시에 매몰되어 아이들 낱낱의 근태 문제에 대해서는 시간을 쪼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엄연한 핑계가 내재해 있었다. 퇴학 대신에 자퇴 처리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라고 학생부장이 말했었다. 나는 그애를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했으나, 사실 내가 맡고 있는 반의 다른 어느 아이에 대해서도 그 이상 알 수 있는 정보 혹은 소통의 장 또한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밀학급이고 고3이었다. 고3이면 소통의 부재를 탓할 단계가 아니라고 나는 단정하고 있었다. 대학 입시에 한정해 대화해도 늘 부족했다. 방학을 앞두고 20일 정도 출석을 잡아 주면 졸업이 가능했지만, 동거하고 있다는 사유는 애당초 그럴 엄두를 갖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자퇴 처리한 것만으로도 담임인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배려라고 여겼다. 나는 그렇게 나리와 관련한 문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편두통에 시달리게 된 것이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아이 스스로 생존하기 위한 극단적 수단으로 몸을 그렇듯 부리고 있는 거라고는 여겨졌지만…… 이런 경우, 무기력한 제 자신이 너무 아프네요. 그애가 ‘학교가 나한테 무슨 의미여야 하냐?’고 반문하는데 정말이지 난감했어요.
―그랬겠습니다, 흠흠.
나 또한 헛기침을 해댔다.
―‘학교가 내게 해준 게 뭐냐’며 ‘학교에 미련 없다’는 그애에게 아무런 말도 더 덧붙일 수가 없더라구요. ‘한 달만 다니면 졸업’이라는 말은 아예 삼키고 말았어요.
―그러게요.
무슨 말인들 덧붙일 수 있었겠는가.
‘……샘에게 만나봐 달라고 부탁을 하고, 어떻게 건져 볼까 하는 고민, 그 자체만으로도 제가 아직까지는 그냥저냥, 어쨌거나 교사인 것만은 분명해서 한편으론 부끄럽고 한편으론 생소하고⋯… 그렇습니다, 젠장.’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랬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아침 8시 이전에 집을 나와 밤 10시 혹은 11시 이후에야 집에 드는 게 하루하루의 일과였다. 이렇듯 빈틈없이 연속되는 일과에 대해 언제부턴가 달콤해하고 있었다. 그에 따른 보상에 익숙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누군들 이런 보상 체제와 보상금에 대해 불편한 이견을 내세우면 슬그머니 자리를 떠버리곤 했다. 다음부턴 그를 대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달포 전인가, 몇몇이 모여 술추렴하게 된 자리에 우연히 합석하게 된 이웃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지회의 참실부장, 임 샘이 방과후수업의 수당과 관련한 화제가 안줏거리로 오가는 말미에 일장 내뱉은 언사.
“이른바 신자유주의 교육체제가 학교 내에 정책적으로 강요되던 10여 년 전부터 최근에 이르러 더욱더 학력경쟁의 무한체제로 돌입하게 되면서, 가자, 학력신장의 기치로, 하는 광풍에 고등학교에 있는 선배님들 누구랄 것도 없이 거기에 자신을 편승시키는 데에 별 주저함이 없었다고 봅니다. 방전되어 버린 교사적 양심이여, 그대로 발기하지 말아라, 라고 뇌까리면서 스스럼없이 동승해 갔다…… 안 그렇습니까? 금전적 보상에 의해 지배되어 가는 교육과정 운영체제 안으로 자신을 더욱 견고히 편입시킨 채 안주해 버렸다, 저는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같은 교과 후배이기도 한 그에게,
“술맛 떨어지는 소리 그만, 작작해라, 짜샤.”
‘졸라 피곤한데, 골 때리는 소리까지 퍼질러 놓고 있네, 으이그,’ 하는 소리는 입 안에 담아 둔 채 빈 술잔 만지작거리고 있는 내게 술을 따르며 그가 덧붙였다.
“자치단체에서 지원하는 액수가 딴은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지요. 대도시는 대도시 자체가 지니는 흡인력으로 정주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자치단체의 지원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잖아요. 중소도시나 군 단위 지자체에서는 인구 감소를 내세워 인구유인책 혹은 지역인재의 타지로의 유출을 막는다는 이유를 들어 지역의 고등학교 샘들을 자극하여 신입생의 입학 전 선수학습과 소수정예의 수월성교육 그리고 유수한 대학 합격생에 대한 학비 지원 등을 통해 무한경쟁 체제로의 돌입을 기획하고 있는 것이고, 학교 교육은 이에 합류하여 예산 따내기에 혈안이 되어 가고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거기에 덩달아 교육청에서는 학교 간 경쟁을 부추기면서 일제고사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그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샘들에겐 교직을 박탈하는 직업적 살인까지도 거침없이 자행하고 있어요. 서울대를 비롯한 유수한 학과 입학을 위한 무한경쟁이 학교 교육의 중심 가치로 자리잡은 건 어제오늘의 현실이 아님은 주지하는 바지만, 문제는 mb 정부 들어 이런 정책적 공고성을 더욱 가파르게 진행해 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형님을 포함해서 선배님들 대부분이 그 전선에 아는지 모르는지 합류해 있지요.”
기실, 나만이 아니었다. 내 주위의 여타 동료들, 특히 수능 과목을 담당하는 교과담임 샘들은 그렇게 학력경쟁의 광풍으로 거머쥐게 된 떡고물에 목줄을 달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처지로 변모해 가는 자신을 눈 딱 감고 용인하며 넘어갔다. 생활에 적잖이 보탬이 되는 수당은 교사 직분의 본질이 훼손되고 있음을 감각하지 못하게 했다. 계기교육, 체험학습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수행하려는 의지는 싹부터 꺾도록 스스로 종용하곤 했다. 나락 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인식하게끔 자극하는 교사적 양심마저 갉아먹히고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나는 교사적 위의로부터 무장해제되어 갔다. 아이들에 대한 애틋한 고민마저 거세해 버린 것이었다. 제거되었다는 아픔도 느끼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풍조가 학교 울타리 안에 팽배했다. 인문계 고교로 옮긴 지 오륙 년여 만이었다. 조합비만 내는 비활동 그룹으로, 자유인 선언을 한 이후 한동안 자괴감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오늘에 와서 그런 속내마저 떨궈버린 채 즐기는 인생으로 가치를 전이시키고 어물쩡 넘어가는 중이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학교 분회에서도, 지역의 지회 단위나 광역의 지부 혹은 여느 분과 모임이나 조직의 상층 어디에서도 학교 교육의 변화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을 해내지 못했다. 또한 조합원의 변모에 대한 반성을 요망하지도 않았다. 어떤 문건적 질타도 내게 전달된 적이 없었다. 그렇게 탈바꿈해 가는 동안 바른 질타를 듣지도, 바른 견인을 보지도 못했다, 나는.
술집 문을 나서는 내게 그가 취한 어투로 등 뒤에다 비수를 꽂는 것이었다.
“구빨치 한00! 껍데기여, 이젠. 껍데기뿐이라고, 씨팔.”
―샘 부탁 받고 만나긴 했는데, 상담역이 갖는 한계를 느꼈어요. 나리의 경우처럼 쉽게 만날 수 없는 아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렴, 그애와 유사한 유형의 아이들 또한 그동안 적잖이 만나 왔는데도 그애의 마음의 벽을 통과해서 그애를 다시 학교로 데려올 수 없었다는 게 아쉽고, 안타깝고, 그랬습니다.
―샘은 아직도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계시네요.
‘데리고 온들…… 그애를 위해 학교가 무얼 해줄 수 있을까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기실 나 또한 젊은 교사 시절의 옹골찼던 회억에 젖으며, 한편으로 옆구리를 쿡 찌르는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모텔 지하방이었어요, 그애가 기거하는 곳이.
―그래요?
나는 새삼 놀라는 눈빛을 내보였다. 모텔 지하방이라는 게 어떤 방이고 무얼 하는 방인지 알 수 없었다. 임의 처리하고자 하는 사안에 대한 확인과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나오려는데 그애가 그러더라구요.
잠시 바깥을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상담 샘이 애써 덧붙였다.
―저, 동거하지 않아요. 살아야 하니까, 여기 있을 뿐이에요.
상담 샘이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그애 말이, 되씹혀요, 자꾸.
내가 그애를 찾아갔을 때, 그애는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엔 ‘압구정김밥’이라 적힌 조리용 모자를 쓴 채 김 위에 얹은 밥을 평평히 누르고 있었다. 얇은 비닐장갑을 끼고 김밥을 말고 있는 손놀림이 제법 빠르다고 느끼는 순간, 그애가 김밥을 말고 있는 손놀림은 계속하며 고개를 내 쪽으로 약간 돌려 말을 걸어 왔다.
―손님, 몇 줄 드릴…….
그애가 나를 보자, 내뱉던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휘익 돌렸다. 순간, 나는 그애가 어디로 후다닥 내뺄 거라는 생각에,
―어, 아냐, 아냐, 김밥 사러 왔다.
나 또한 터무니없이 너를 보았네, 하는 놀라움을 드러냈다. 나는 그애를 안심시키려 재빨리 주문했다. 우연히 들르게 되었는데 너를 만나게 된 거라는 표정으로,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나의 주문에 짐짓 그렇겠지, 하는 체념의 눈빛 혹은 흥, 그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싶은 무시의 낯빛을 이내 머금는 게 역력했다.
―싸갈렵니까?
때때로 아이들은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여겨지는데도, 너무 빠르게 냉정을 되찾는 경우가 있다. 나리가 그랬다. 그애는 나를 보자마자, 짧은 순간 경계심의 끝에 가 있는 노여움의 눈빛을 띠었다. 그러다, 곧바로 평상심을 찾은 듯했다. 나를 여느 손님처럼 대했다.
―고생하는구나.
―이쪽으로 좀 비켜서 줄랍니까?
나는 얼른 출입문 안쪽으로 두어 걸음 옮겼다. 등산복 차림의 남녀 중 여자가 값을 치르려는 듯 지폐를 들고 서 있었다. 그애는 막 만 김밥을 썰어, 내 뒤에 서 있는 등산복 차림의 여자에게 건넸다.
―전화 주문, 받아 뒀었거든요.
그애는 옆으로 비켜서 있는 나에게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냉기가 깊게 서린, 매우 떨떠름한 어투였다.
나는 그애의 말투에 개의치 않았다. 그럴 법하다고 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있는 심사 탓이었다. 내가 이 아이에게 저지른 행위로 해서, 내가 지금 품고 있는 무겁고 안타까운 마음만큼이나, 그렇게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기간만큼이나, 이 아이는 자신이 겪은, 겪고 있는 상처에 대해 언제고 되갚아 주리라, 벼르고 있을 것이라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김밥을 말고 있는 그애에게 다시 말을 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걸 나는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여기서 오랫동안 일한 것 같구나.
듣기에 따라선 몹시 언짢을 수 있는 말이었으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허둥대고 있는 자신이 훤히 보였다.
―…….
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검은 비닐봉지에 담은 김밥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이천 원을 건넸다. 나는 그애에게 지폐를 건네며 눈길을 마주치려 했으나, 그애는 돈을 받아 슬라이딩 금고에 넣고는 다시 김밥을 말기 위해 채반 위에 네모진 김밥용 김을 꺼내 올렸다. 그 위에 밥을 퍼 쫘악 편 다음 계란부침, 게맛살, 당근, 우엉줄기 등속을 채곡채곡 얹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먹고 갈란다. 두 줄 더 말아 줘라.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애는 자신의 등 뒤에서 벌어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담임이었던 자의 어색한 몸놀림을 훤히 그려보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잠시 휘청하는 몸짓을 내보였지만 짐짓 태연하게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휘적휘적 빈자리를 찾아갔다. 젊은 애들 둘이 다 먹은 그릇들을 쟁반에 챙겨 개수대가 있는 주방에다 내려놓고는 나갔다. 셀프점이었다.
손님은 제법 많은 편이었다. 젊은 애들이 방금 일어난 빈자리로 갔다. 그애가 바라다 보이는 쪽으로 앉았다. 김밥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밥알이 입 안에서 푸슬푸슬 놀았다. 혼자 먹는 밥이어서 더욱 서걱거리는 듯했다. 그렇게 서걱거리는 밥알을 오물거리는 동안, 그애는 부지런히 김밥을 말았다. 네 번째 손님에게서 돈을 건네받고 있는 중이었다. 바쁘게 일 하다 보면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상념들도 그만큼 상쇄되겠지, 하며 나는 그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실내가 후텁지근했다. 그애가 반바지차림을 하고 있는데 장딴지가 통통해 보였다. 저애가 학교에 다닐 때도 저렇게 통통했었나, 하며 나는 잠시, 저애가 교복을 입고 학교에 나오던 여름방학 직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 학교에 알려지기 전이었다. 거의 모든 애들이 그러하듯, 허리가 꽉 끼고 등허리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짧게 맞춘 흰색 교복 상의에다 체육복 하의를 입은 채, 학교에서 유일하게 단짝이던 애와 함께 점심 먹은 뒤 쓰레기 컨테이너 박스 옆을 지나 매점으로 향하던 때의 모습이 얼핏 떠올랐다. 작년 9월, 세콤에 감지되어 비 맞은 생쥐처럼 웅크리고 있던 모습은 기억 속에서마저 지워져 버린 듯, 내 반 아이였음에도 다른 어떤 모습도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김밥을 우겨넣으면서, 나리를 다시 쳐다보았다. 나리는 전혀 흐트러짐 없이 일을 계속했다. 능숙했고,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학교가 내게 해준 게 뭐냐”고 반문했다는 저애의 울부짖음, 그래 울부짖음이 퍼뜩 떠올랐다.
뒷덜미가 묵직했다. 편두통이 몰려왔다.
나리의 자연스럽고 능숙한 몸짓을 보면서 ‘지금 나는 왜, 여기에 있지?’ 하는 사념에 빠져들었다. 주방 가운 속에 걸쳐 입은 나리의 검정색 바람막이 재킷 등판에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가지 않고. 당신에게 할 말이야 많지만 말해 봤자야. 그러니, 어서 가’ 하는 문구가 하얀 분필로 또박또박 적혀 있는 것처럼 읽혀졌다. 그랬다. 저애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건넬 수 있는 말이란 정작 뭐지? 저애를 보자마자 내뱉은, ‘고생하는구나’ 하는 안부 말고 더 덧붙일 수 있는 말이 있기나 한가? ‘미안하다, 지금 어떻게 사느냐?’ 하는 따위의 말이 저애에게 무슨 위안이 되겠는가? 저애에게 어떤 말을 건넬 자격 혹은 위치에 있는지도 지금 이 순간, 나는 잘 모르겠다.
김밥을 다 먹어치운 뒤에도 나는 섣불리 좌석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뭉기적거렸다. 주문한 김밥 두 개는 벌써 말아져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있을 것이었다. 저 아이 또한 어서 가져가라고 할 수 있을 테지만 더 이상 나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두어 명의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들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에 닿았다. 손님이 없으면 내게로 와 저 아이가 어떤 폭언도 할 수 있을 것이란 불안함 또한 밀려왔다. 저 아이를 만나러 올 때의 심경이 무엇이었나? 하고 되물었다. 그만 가야지, 하면서도 나는 일어서지 못했다. 자문과 자책에 골몰했다.
저 아이에게 어떤 다짐, 이를테면 내년에 꼭 복학하길 바란다는, 저 아이의 처지로 봐서 정말 어처구니없는 복학의 다짐이라도 받아 가야 한다는 강박증이 편두통과 함께 나를 결박하는 것이었다. 한 달 전 학교에서 내쫓고서 이제 와서 내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라고 하는, 병을 준 뒤 독약까지 주는 듯한 이 처사가 교사적 양심인가? 하고 물으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럴수록 저 아이 앞에서 스스로 머쓱해지고 작아지는 걸 나는 느껍게 감지해야 했다.
저 아이는, 수능 끝나고 해이해진 풍경이 펼쳐져 있는 11월 말의 대한민국 인문계 고교 3학년이었다. 저 아이의 행위에 대한 자퇴 처리가 온당한 조처였는가, 하는 물음에 나는 줄곧 시달렸다. 그렇게 엄습해 온 물음과 함께 편두통은 시작되었고 한 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편두통이 몰려올 때마다 짜증이 났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저 아이가 생존을 위해 몸을 던지고 있는 것 또한 저 아이의 입장에서는 달리 어찌 해볼 경우의 수마저 허용되지 않는 현실이지 않은가? 저 아이를 만나 사죄하고, 내년에 꼭 복학시키겠으니 복학하겠다는 다짐을 받아 두라며 독려하던 편두통이 나를 더욱 압박해 왔다. 나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 사이, 김밥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그애가 내게로 왔다. 손님이 뜸하기도 했다.
―김밥, 잘 싸세요?
그애가, 내게 건네는 김밥 봉지를 엉겁결에 받아 쥔 채 그애를 엉거주춤 맞는 내 앞에 와서 뜬금없이 툭 내뱉었다.
―……잘 못해. 언제 해봤어야지.
흠칫 놀랐으나,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당연하지요. 그런데, 나는 잘해요.
그애가 된바람 몰아치는 바깥으로 시선을 잠시 돌렸다가 거두며, 말을 이었다.
―살아야 하니까 손, 발, 온몸을 써요.
―…….
그애가 의도하는 바가 뭔지 몰라서 대꾸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애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건네는 그 말의 속내가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김밥 싸는 거, 파리 목숨 빼앗듯이, 쉽습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못하지요. 이제, 가세요. 김밥 싸는 거 보러 온 것 아니면 그만 가세요. 배울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왜 왔는지 내가 말해 볼까요?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절규하듯 빠르게 내뱉는 그애의 말을 들으며, 그만 김밥봉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작지만 단호한 어조로 그애가 내게 덧붙였다.
―김밥 가지고 가세요.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일어서는 내 귀에 대고, 그애가 또박또박 건넸다.
―돈 주고 가세요.
돈도 주지 않고 김밥 봉지만 든 채 김밥집에서 내쫓기듯 나는 서둘러 빠져나왔다.
―죽을 수는 없잖아요?
현관에 두텁게 쌓인 푸르디푸른 냉기에 나는 얼어붙었다. 시린 손끝으로 귓바퀴를 연방 문질렀다. 그애가 던진 외마디, 그 절규가 귓구멍을 연신 후벼댔다. 꼼짝 못하고 이명에 시달렸다. 그애는 계속해서 내게 절규했다.
“죽을 수는 없잖아요?”
나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애의 절규는, 내젓는 내 고갯짓만큼의 강도로 나를 질곡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애가 일하는 곳에 왜 갔는지조차 막급의 후회가 밀려왔다. 정작 내가 찾아간 이유마저 불분명했다. 차라리 퇴학 처분했다면 편두통과 이명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을까, 하는 회한이 칩떠올랐다.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정당했어. 출석일수 미달이면 학칙에 의해 유급이니, 고3은 당연히 졸업 보류에 해당하잖아.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학생 신분으로는 어떠한 이유로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행위가 아니지 않은가?’
한기가 더욱 파고들었다. 그런데 나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편두통이 지근지근 밀려왔다. 그애의 절규가 귓바퀴를 맴돌았다. 속에서 후욱 열기가 솟구쳤다. 편두통이 더욱 심하게 뒷덜미를 물어뜯었다. 나는 웃옷의 지퍼를 열었다. 매서운 바람이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얹혀 있는 속앓이가 잠시 식는 듯했다.
이명은 여전했다. 내가 그애를 처리한 건, 그애의 행실과 규정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애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 그애의 ‘가정조사’에 드러난 상황을 혐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러,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었다.
‘무엇 때문에 날 찾아왔나요. 복학을 권유하려고 왔다고요. 웃기지 말아요. 정말, 순진하시네. 당신은, 당신네들은 학교 울타리 안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잖아. 내가 어떻게 산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보고 그냥 죽으라고. 그럴 권리 당신들에게 없어. 진실을 말해 볼까. 당신들이 나를 짜른 건 내가 결석이 많아서가 아니잖아. 작년에 당신이 담임이었던 미숙 언니는 출석 미달인데도 졸업시켰잖아. 핑계일 뿐이야. 부모 이혼과 가난, 그리고 그로 인한 나의 막다른 처지를 문제 삼아 짜른 거잖아. 내가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어쩌는 수가 없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건데, 그걸 이유로 들어 나를 짤랐잖아, 진짜로는.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그게 문제라면, 당신들은 누군데? 당신들은 무엇인데?’
어린 날, 학기 초의 숙제였던 ‘가정조사서’에 연필로 적어 넣으며 손끝마저 저려오던 항목들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혹독한 한풍이 거세게 밀려왔다. 온몸이 떨렸다. 다시 웃옷의 지퍼를 닫았다.
그때, 문자메시지가 떴다.
‘이번 주엔 내가 부킹 잡았네. 시간 비워 둬.’
교장 샘이었다. 그동안 몇 차례 내가 주선한 골프모임에 동행한 적이 있는 교장 샘이 어느 유력한 학부모에게 선을 대 잡았을 것이다. 교장 샘은 나보다 더 늦게 시작해 두어 달 전에야 필드에 처음 나갔었다. 교장 샘 또한 매주 라운딩 하는 듯했다. 잘 챙겨 주는 동향 후배에게 건네는 선심이었다. 혹은 내심 쌓여 있을지 모르는 부채감을 갚고자 하는 심중일 것이다.
나는 얼른 핸드폰 뚜껑을 닫았다.
피식, 아주 엷은 냉소를 머금었다. 부킹 소식에 내내 지근거리던 편두통이 가시는 듯한 느낌을 순간 느꼈기 때문이었다. 비웃음 같은 것이기도 했다. 골프는 그런 위력으로 내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명은 여전히 귓바퀴를 맴돌았다.
옷깃을 여미고, 교무실로 향했다.
‘뭘 먹고 있었지?’
잠시, 허기를 느꼈다. 교무실 문을 열었다.
바깥 날씨에 덩달아 달아오른 교무실의 냉난방기에서 내뿜는 더운 바람이 메스껍게 후욱 밀려왔다. 안경에 훈김이 허옇게 서렸다. 나는 교무실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만, 꽈당.
첫댓글 쓸쓸해요.. 내가 늙어선지 시대의 뒷맛인지 어디서 온건지 어디로 갈건지 모를 묘한 날들이에요. 과거에 애틋하던 것들이 오늘에 무심해지고 지난 날 가치로웠던 것들이 오늘날 또 퀴퀴하니, 무슨 조환지. 허기... 쓸쓸한 허기...
어제는 귀한 글 인쇄해서 집에게 읽었습니다. 요즘 세상사 돌아가는 것을 보면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탑(생각의 힘)도 어느 순간에는 건설 경기처럼 후퇴할 수도 있는 건가?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힘들고 외롭겠지만 이젠 아무도 살지않는 집을 골라 수리해서 살던지. 살던 집을 뒤로하고 또 다른 곳에서 뜻에 맞는 사람들 몇 몇이서 함께 새 집을 지어 살아가야할 때^^.. 그저 열심히 일하는 개미처럼만.. ( 작가님앞에서..ㅋ 죄송^^해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