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6호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신앙적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바른 모델을 신약보다는 구약에서 찾아 적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스칼의 ‘구약은 부호다(B-691)’라는 견해와 같이 구약은 표징과 모형으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율법과 선지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거나 이해할 때 십자가의 복음이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를 통하여 율법으로 존재했다면 신약시대에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된 것입니다. (눅 16:16, 롬 10:4) 따라서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규범으로는 당연히 십자가의 복음을 근간으로 하는 사도들과 제자들의 삶을 표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으로는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이며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신약의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있었다면 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막의 의식이나 안식일이나 모든 절기를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할례, 십일조 등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행 4:12)
요즘 교계에서 많은 물의를 빚고 있는 여러 문제들도 복음이 아닌 율법을 거론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십일조만 보더라도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깨닫는다면 아무런 시비나 논란거리가 될 수 없는, 복음으로 완성된 연보에 관한 신약의 상세한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막 12:41-44, 고전 16:1-2, 고후 8:1-5, 9:1-15)
연보를 상징하는 십일조가 재물 축복의 통로라고 함은 십자가의 복음에 반하는 율법주의의 주장입니다.(마 6:24) MBC ‘뉴스후’에 관련된 목사님이 십일조는 축복의 통로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거부였듯이 그리스도인이 십일조로 거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그리스도인이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사탄이 하는 거짓말로서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면 전도도 안 될 뿐 아니라 불행한 이웃을 물질적으로 도울 수 없으므로 덕이 되지 않는다는 설교로 많은 의혹을 사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분석해 보면 논리의 모순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십일조를 떼어 먹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도적놈이라고 말라기서를 내세워 강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십일조를 하지 않는 기독교인으로서 개신교인은 물론이고 십일조의 규례가 없는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은 모두 도적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설교는 그분이 국내외적으로 기독교 선교에 크게 공헌한 훌륭하신 목사님이기에 매우 안타까운 일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가난하게 살아야 하고 거지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거짓말이라고 했는데 이는 십일조를 강조하기 위하여 연보와 청빈의 참 뜻을 왜곡하는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가난해야 하고 거지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극단적인 말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사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말씀하는 ‘부자’나 ‘부요한 자’의 논리에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부와 믿는 거부로 구분하면서 전자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지만 후자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고 하는데 신약에서 말씀하는 부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부자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막 12:41, 마 19:22, 눅 6:24) 부자가 문제가 되는 것은 비록 많은 헌금을 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그 헌금에 상응한 십의 구라는 부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부자의 의미는, 돈은 많이 벌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예시한다면 율법의 십일조로는 소득이 100만 원인 사람은 십일조를 헌금하고 남은 90만 원으로 생계를 영위하고 소득이 1000만 원인 사람은 십일조를 헌금하고 900만 원으로 생계를 영위할 것입니다. 부자의 십일조는 가난한 자의 생활비 전액과 대등한 수준으로 많은 것이지만 부자의 생활비는 가난한 자보다 무려 10배가 되므로 그 헌금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풍족한 중에 넣은 것이 되지만 가난한 자의 헌금은 구차한 중에 넣은 것이 됩니다. (막 12:44)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과(막 12:42)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레 따라 나눠 준 사례와(행 2:45) 극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한 사례는(고후 8:1-5)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당당하게 기도하는 바리새인과(눅 18:12) 비교할 수 없는 연보의 의미를 깨닫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율법의 십일조와 복음의 연보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의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마 6:24, 19:24)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쉬우니라”는 말씀은 부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뜻하지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것은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는 말씀으로 율법의 십일조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복음의 연보로는 가능한 것임을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마 19:24-26, 고후 9:9)
셋째 십일조가 하나님의 창고인 에클레시아에 드려져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어지지 않고 인간이 세운 제도교회에 드려지므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용도로 쓰이지 않기 때문에 연보로 완성되지 못한 율법으로 문제가 되는 것임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MBC ‘뉴스후’가 밝히려는 의도의 초점도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교계는 수긍해야 할 것입니다. MBC의 의도는 친기독교적이라고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인정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복음인양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구약시대에 행한 할례나 희생제사 역시 십일조와 더불어 신성한 율법임에 틀림없는데 십일조는 그렇게 주장하면서 할례나 희생제사는 왜, 어떤 이유로 지켜 행치 않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할례나 희생제사는 복음으로 마침이 되었고 십일조만 특별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까? 율법이 복음으로 완성되었다 함은 할례가 세례로, 희생제사가 예배로 완성되었다면 십일조 역시 연보로 완성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의 교훈과 모범은 신약성경에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하나님의 종, 십일조, 진노하시는 하나님, 자녀에게 미치는 범죄 행위 등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구약성경의 의미는 율법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의 오심으로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사업이 이루어질 것을 예표하고 언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삶의 표본을 구약성경에서 찾는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자칫 복음을 왜곡하는 우를 범하게 될 염려가 큽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질적으로 본받아야 할 모델은 신약성경으로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구약성경에서 삶의 표본을 찾거나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말씀은 기막히게 잘 아는데 삶이 엉망인 것은 말씀은 복음에서 삶은 율법에서 본받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다수의 목회자는 설교를 통하여 신약의 사도들의 삶보다는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신앙생활의 모범을 찾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삶보다는 선지자들의 삶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출세의 삶을 선호하는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므로 제도교회의 물적, 양적 부흥성장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모델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구약의 선지자에게서, 말씀의 모델은 신약의 사도들에게서 찾아 설교하는 것이 목회자들의 일반적인 패턴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장수하면서 거부로 살았고 요셉, 다니엘, 다윗, 솔로몬은 일국의 제왕으로, 총리로 성공을 이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신앙의 모범을 찾아 가르치지만 베드로, 바울, 요한, 야고보, 빌립, 스데반 같은 사도들과 제자들은 사회적 출세나 성공이 없이 오로지 고난만 당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순교에 이르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삶의 모범을 애써 찾아 가르칠 그들 나름대로의 당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실례는 성례식이나 심방 예배 때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도권에서 성공한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은 인물이 되기를 축원하는 설교나 축도는 넘쳐나지만 신약의 사도들이나 제자들과 같은 인물이 되기를 축원하는 설교나 축도는 매우 희귀합니다. 이러한 의도적이고 선별적인 인용은 같은 구약임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호세아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12선지들도 그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만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유대교는 아직도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구약성경의 야훼 하나님을‘알라’신으로, 그리고 22명의 예언자를 도용하여 만든‘코란’을 경전으로 소유하고 있는 이슬람교는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라고 자부하면서 아직도 일부다처제라든가 호전성(好戰性)을 버리지 못하고 기독교를 적대시하며 세계 곳곳에서 인류의 평화와‘십자가의 복음’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구별하듯이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호칭으로 성도를 구분하는 것도‘십자가의 복음’을 배척하고 제도적 기득권을 지키려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성직자라는 이름으로 제사장의 명예와 권세를 누리려 하고 평신도는 출세와 성공과 평강을 위하여 구약의 율법에서 신앙생활의 규범을 찾는 것입니다. 특히 가톨릭의 성막의 규례를 본받는 의식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찢어진 성소의 휘장(마 27:51)을 인위적으로 재생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불신하고 왕과 방백을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되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유를 속박하는‘왕의 제도’를 엄하게 경계하여 알게 하라고 이르시고(삼상 8:5-18)“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을 세웠으나 나는 모르는 바며,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 8:4,13:1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는 인위적인 제도에 의한 삶이 어떠함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이 낡은 부대에 담긴 묵은 포도주라면 신약은 새 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입니다. 묵은 포도주가 있기에 새 포도주의 맛을 분별할 수 있고 낡은 부대가 있기에 새 부대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부대에 묵은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지거나 포도주의 맛이 변질되게 마련입니다(마 9:17).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귀중한 구약의 예언과 모형과 상징을 바로 보고 ‘십자가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율법은 나를 내세우고 시인하지만 복음은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구약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잊어버리고 반역하는 백성들의 실상과 그러한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족장, 사사, 선지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말씀하시면서 긍휼을 베푸시는 야훼 하나님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비롯한 제사법과 같은 율법을 주신 것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칭의 받아 구원받을 수 있는‘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실 것을 언약한 예언의 기록입니다.
구약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들의 다양한 삶을 리얼하고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선택하신 제사장이나 선지자라 할지라도 죄인으로서의 모습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낱낱이 기록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예표하여‘복음’이라는 새 언약의 의미를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경전입니다.
신약은‘믿음’으로 칭의 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공의의 ‘심판주’이심과 동시에 사랑이 무한하신‘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심을 알게 하여 가시적인 의식과 외식이 아닌, 신앙의 본질인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의 온전한 규범을 일러주신 책으로 그리스도인이 필히 본받아야 하고 적용해야 할 유일무이한 기독교의 삶의 경전입니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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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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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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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면서 특별한 은혜를 느낍니다
많은 깨닫음 감사합니다
십일조가 복음은 아닙니다.그러나지금성도들의 혼란이 야기되고있습니다..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적이고 신약의 연보로 이해가 된다는글입니다..그렇다면 신앙생활 처음하며 열심히 주님을 향하는 믿음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리고 최선의 모습을 가지려는 성도들은 잘못된 신앙관이란 이해가 됩니다..마23:23절에"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말아야 할찌니라)이 표현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십일조를 하라는 뜻인데 구약에만 십일조가 있는것이 아니고 신약에도 이것도 저것도 버리지말라고 경고하십니
지금 이단들은 십일조를 가지고 성도들의 신앙을 현란시키고 있습니다..십일조 문제까닭에 이단에 빠진 성도들 제가 아는 성도들 바른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은것을 봅니다..진정한 십일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바른신앙으로 성도들은 몸과 마음 그리고 물질로 섬기길 원합니다..그래서 십일조도 그런 믿음으로 해석해야 될 줄 압니다..신앙생활에 타격을 입은 성도들의 메일을 받고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