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 열기를 한풀 꺾으려는 하늘의 심술일까. 태풍이 한차례 지나간 지난 8일에도 포항에는 빗줄기가 그치지 않아 서울발 포항행 작은 항공기의 기체를 사뭇 흔들어놓았다. 어느새 어둠이 자욱한 포항 시내를 지나 도착한 영일대·힐튼. 약속한 레스토랑에 앉자마자 저 멀리서 유명인사를 맞는 듯한 종업원들의 환영인사가 이어진다. ‘반갑습니다’ ‘고생 많으셨죠?’ ‘너 아빠랑 똑같이 생겼구나!’ 정말 아빠랑 똑닮은 아들과 손을 잡고 나타난 조수미씨(29).
그녀의 이름은 낯설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축구대표팀의 주장 홍명보가 집에 있을 때 ‘한국 수비의 핵’도 잠재우는 그림자 수비를 하며 남편의 일거수 일투족을 챙겨주는 홈그라운드의 제1참모.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궈낸 주역 가운데 한 명인 홍명보의 오늘을 있게 한 숨은 내조자이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남편의 자서전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은행나무) 집필의 숨은 기록자이기도 하다. 그 숨은 주역 조수미씨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월드컵 기간 중 다른 선수들 가족과 달리 매스컴에서 전혀 볼 수가 없었는데요?
▲ 6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훌쩍 지나간 것 같지만,단 하루가,단 몇 초가 천년만년처럼 길게 느껴진 때도 있었어요. 포항 집에서 한국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을 오가느라 정신없었죠. 방송 출연 제의가 많았지만,그건 남편의 뜻이 아니에요. ‘운동선수는 운동으로만 말한다’고 강조하는 남편은 신세대 선수들과는 달리 보수적인 편입니다. 그래서 TV에 출연하지 말라고 당부했거든요.
―남편은 말이 없기로 유명한데,이번 월드컵 때는 승리의 기쁨을 표현하던가요?
▲ 말없는 사람이 어디 가겠어요. 캠프 이동하면서 짧게 전화통화만 했는데,첫승을 올렸을 때,가장 기뻐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어요. 지금도 남편은 첫승 순간이 가장 감격적이었다고 해요.
―그럼,아내의 입장에서는 어느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나요?
▲아무래도 스페인전 승부차기를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이운재 선수가 상대팀의 볼을 막아냈을 때,전 순간적으로 경기가 끝난 줄 알았어요. 그런데 멀티비전을 보니까 남편이 걸어나오고 있었어요. 저절로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협회에서 마련해준 가족석에 따로 앉지 않고 붉은악마 응원단 속에 있었는데,그때 갑자기 붉은악마 함성소리가 두려워 제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두손으로 눈을 가렸어요.
그 순간을 떠올리면 다시는 축구경기 보고 싶지 않아요. 얼마 후 옆에서 일으켜줬는데 이번엔 환하게 웃는 남편이 보였어요. 첫 아이 임신했다고 했을 때보다 더 환하게 웃더군요. 그렇게 웃는 모습,저도 처음 봤어요.
지금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스페인전을 떠올리는 그녀의 얼굴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특히 월드컵 전,대표팀 훈련에서 탈락한 후 더욱 말이 없어진 남편을 대했던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는 그녀는 좋고싫음을 그대로 다 드러내면 축수선수 아내로 살아갈 수 없다며 말없이 마음 편하게 해주는 것을 내조의 제1원칙으로 삼는다고 했다.
월드컵은 끝났지만 남편의 얼굴 보기는 여전히 어렵다. K리그도 시작됐고 ‘홍명보 장학회’ 관련 일로 더욱 바빠진데다 자서전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사인회 요청 등이 줄을 잇고 있는 것.
자서전은 사실 베스트셀러는 꿈도 꾸지 않았던 책. 다만 마지막 월드컵 무대를 앞두고 자신의 축구인생은 물론 한국축구의 중간 점검 차원에서 용기를 내어 책을 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또 94년 미국 월드컵 때 남편을 처음 만난 뒤,97년 결혼식을 올린 그녀에게 책은 축구선수 남편과 함께 한 결혼생활의 기록이기도 했다. 책 출간을 위해 그간 꼼꼼히 챙겨온 신문 스크랩도 정리하고 가족얘기 부분은 직접 집필도 한 그녀는 “기대 이상의 반응에 놀랍고 부끄럽다”는 말로 베스트셀러가 된 또하나의 감격을 전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녀는 앞으로도 남편의 일을 묵묵히 따라간다는 각오. 축구행정가로의 변신을 위해 유학도 계획 중인데 그 전까지는 그라운드에 설 남편을 위해 내조를 잘 하겠다고. 그 내조는 다름아닌,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두 아들 성민(5) 정민(3)을 잘 키우고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는 것. 그리고 미국에서 유아교육학을 전공(UCLA 졸업)한 후 마음먹은 자신만의 일은 남편이 축구선수 유니폼을 반납하는 순간 펼칠 계획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그 전까지는 ‘조수미’란 이름 대신 ‘홍명보 선수 부인’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아빠를 닮아 말없이 무표정한데다 한고집한다는 아들 성민이가 어른들의 긴 대화를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 아이스크림을 뜨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엄마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나 쉬.”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에게서 축구신화의 밑거름이 됐을 작은 내조들이 다시 한번 눈으로 감지되는 일상의 순간이었다.
■ 조수미씨가 본 월드컵
△ 폴란드전=드디어 첫승!남편의 한도 풀리는 순간.
△ 미국전=미국은 남편과 LA에 살던 나를 이어준 곳. 각별한 만큼 미국전 승리를 기원. 동점골을 터뜨린 안정환 선수에게 생큐!
△ 포르투갈전=남편의 등번호 20번이 찍힌 빨간 유니폼에 청바지를 입고 간 미국전 때 무승부. 다시 폴란드전 때 입었던 검정바지를 꺼내입었다. 역시 승리.
△ 이탈리아전=거친 파울을 한 토티에게 경고하는 남편의 모습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왠지 우리팀의 하나된 분위기가 승리를 예감케 했기 때문.
△ 스페인전=90분도 긴데,연장전에 승부차기라니. 정적…,아니 남편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줄도 아는 남자였던가.
△ 독일전=아쉬운 1패.
△ 터키전=실수한 남편. 내 마음이 이렇게 무거운데 남편은…. 벤치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남편의 모습이 멀티비전에 비칠 때마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하지만 6월은 붉은악마의 카드섹션 문구 ‘꿈★은 이루어진다’가 정말 절실하게 다가왔던,잊지못할 순간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