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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는 대설경보가 내렸는데 전주는 비가 내리는 2월8일...우리들은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속리산(俗離山)은 '세속을 떠난 산' 이라는 이름 뜻과는 달리 가장 세속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혁명을 꿈꾸며 백일 기도를 올린 곳이 바로 속리산이고,
이방원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을 도륙하고 참회를 한 곳도 이곳이다
또한 세조가 시를 지었다는 문장대, 세조가 지날 때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정이품송...
세속을 떠난 정결한 속리산에 세속의 상징인 권력의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 있어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화이팅을 외치다
전주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하여 약 2시간을 달린 끝에 속리산에 도착하였다
비가 내리는 전주와는 달리 간밤에 눈이 내려서 길은 미끄러웠고, 간간이 눈발도 흩날렸다
산행 채비를 마친 다음 간단히 준비운동을 하고, 화이팅을 외치고 나서 씩씩하게 출발하였다
오리숲을 걷다
주차장에서부터 법주사까지 대략 2km에 걸쳐있는 숲을 '오리숲' 이라 부른다
오리숲에는 족히 100년은 넘었을 소나무 외에 갈참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참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겨울숲은 삭막하고 쓸쓸하였지만 산사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고요함이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법주사 일주문을 넘다
입장료를 1인당 4천원이나 받는 법주사를 원망하면서 일주문을 넘었다
단청이 군데군데 벗겨진 일주문에는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호서는 충청북도 제천의 의림지 라고 하는 삼국시대 저수지의 서쪽으로 충청지방을 일컫는 말이고,
가람은 스님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곳이란 뜻이다
즉,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은 경기도 이남 충청도에서 제일가는 사찰이란 뜻이다
웃기는 세심정(洗心亭)
지루한 시멘트길을 40여분 걸어서 휴게소가 들어선 세심정에 도착하였다
세심정(洗心亭)이란 '마음을 씻는 정자' 라는 뜻인데.. 정자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휴게소에서 설치한 대형 파라솔이 경관을 해치고 파전, 막걸리 냄새가 오히려 마음을 더럽히고 있었다
할딱고개 휴게소
속리산은 다른 국립공원과는 달리 곳곳에 휴게소가 여러 개 들어와 있다
솔잎새순과 엄나무, 영지버섯을 발효시켜 빚었다는 솔잎동동주로 등산객들을 유혹하였다
할딱고개에서 오랜만에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니 유년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포근해졌다
할딱고개의 미소년
할딱고개휴게소에서는 머리를 길게 기른 미소년(?)이 붙임성 있는 말투로 다가왔다
그는 다큐멘터리 <산>과 KBS 뉴스에 여러번 나왔다고 자랑이 대단하였다
생김새가 핸섬하고 사교성이 좋아서 등산객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저앉기 일쑤였다
겨울산 1
겨울산은 눈 밟는 재미로 오른다.
‘싸르륵 사그락’ 방금 내린 싸락눈 밟는 소리,
‘보드득 보드득’ 행여 미끄러질까 봐 조심조심 밟는 소리,
마치 곰삭은 홍어 뼈를 잇몸으로 씹는 것 같다. ‘
여성은 나긋나긋 밟는다. 살몃살몃 지그시 밟는다. 살금살금 어르듯 밟는다.
남자는 퉁퉁 몸을 실어 밟는다. 다리를 쭉쭉 뻗어 퍽퍽 내디딘다.
문장대(해발 1,054m)
약 2시간 반 만에 오늘의 최고봉 문장대에 도착하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얼어붙어 있었다
문장대는 법주사에서 약 6km 지점,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위치한 석대다.
2007년에 문장대가 부동산 시장에 매물로 나와 충북 보은군이 매수 여부를 타진한 적이 있었다
이 땅은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훨씬 전인 1951년 대구 소재 경희교육재단이 취득, 50여 년간 보유해 왔다
문장대(文藏臺) 2
문장대는 원래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로 불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세조가 문무 시종과 더불어 날마다 이곳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로 불리워졌다.
문장대를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는데...나는 이제 한 번만 더 오르면 되네 ㅋㅋㅋ
쇠못별은 문장대의 거친 바람 속에 혼자 서있지만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는 기쁨으로 상기되어 있다
겨울산 2
겨울산은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마치 이중섭의 그림 ‘소’ 같다.
바람 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다. 굵은 어깨뼈는 추위에 얼어 뻣뻣하다.
가만히 지르밟기만 해도 우두둑 으스러질 것 같다.
겨울산은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뼈가 삭는다.
점심 식사
문장대 바로 아래에 있는 넓은 공터는 식사하는 산꾼들로 가득차 있었다
서리꽃을 하얗게 뒤집어쓴 나무 아래와 벤치에서 식사하는 산꾼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막걸리잔에 떨어지는 눈발은 그대로 술이 되고, 뜨거운 커피 한잔으로 우리의 몸은 후끈 달아올랐다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나희덕의 詩 <속리산에서> 부분
상고대(서리꽃)
상고대는 사전적인 의미로 대기 중의 수증기가 수목이나 지물(地物)에 부착·동결해 순간적으로 생긴 얼음을 말한다
호숫가나 고산지대의 나뭇가지 등에 밤새 내린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눈꽃처럼 피어있는 것이다
상고대는 영하 15℃ 이하의 기온에 습도가 70% 이상인 날씨에 피어난다.
상고대는 겨울산의 삭은 뼈에 피어난 하얀 꽃이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꽃이 우르르 돋았다
속리산의 상고대는 여태껏 보아온 어떤 산의 상고대보다도 투명하고 날이 선명해서 가슴이 맑아졌다
서리꽃 하얗게 들을 덮은 아침입니다
누군가의 무덤가에 나뭇짐 한 단 있습니다
삭정이 다발 묶어놓고 무덤가에 앉아
늦도록 무슨 생각을 하다 그냥 두고 갔는지
나뭇가지마다 생각처럼 하얗게 서리꽃이 앉았습니다
우리가 묻어둔 뼈가 하나씩 삭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들은 남아서 가시나무 가지를 치고
삭정이 다발 묶으며 삽니다 ......................................도종환의 詩 <서리꽃> 부분
신선대에 오르다
문장대에서 내려와 바위를 그대로 깎아 만든 계단을 차례대로 지나 눈길을 따라 걷다보면 신선대가 나타난다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없이 날아와 춤추고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놀았다는 곳이다
하지만 신선대에 들어서면 아무래도 백학이 깃들고 신선이 머물렀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기야 신선이 뭐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人)이 산(山)에 들어왔으니 우리가 바로 신선(仙)이 아닐까?
경업대의 임경업 장군
급경사길을 한참 내려가면 경업대를 거치게 되는데 여기에서 속리산의 산세가 한눈에 보인다.
경업대는 조선 인조 때의 임경업 장군이 청나라를 치기 위해 독보대사를 모시고 심신을 단련한 터라고 한다
속리산에 다시 나타난 입경업 장군의 옆에는 미인이 한 명 있는데...누군지 궁금해진다 ㅎㅎㅎ
헛수고 하는 스님
급경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등산로에 쌓인 눈을 쓸고 있는 스님 한 분을 만났다
스님은 우리들을 배려한다고 눈을 쓰는 것 같았지만 산꾼들에겐 오히려 불편할 뿐이었다
산꾼들은 등산화에 아이젠을 착용하였기 때문에 눈이 없으면 오히려 걷기가 더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하산하였다
금강골 휴게소에서
금강골휴게소에 먼저 도착하신 회장님께서 내려오는 일행들을 불러 세웠다
막걸리 세 투가리와 도토리묵 두 그릇을 시켜서 후룩후룩 마시니 앞에 있는 여인이 더욱 예뻐 보였다
산 속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은 수명을 1년 연장시켜 준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ㅋㅋㅋ
금강골휴게소의 안주인
휴게소의 안주인은 등산객들만 눈꼽아 기다렸다며 좋아서 어쩔줄 모른다
후덕한 안주인의 음식 솜씨는 일품이어서 도토리묵은 물론 고추장아치도 감칠 맛이 있었다
사진 찍으면 안 된다는 바깥 양반의 넋두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회장님과 다정한 포즈를 취해 주셨다
지구를 받치는 힘
거대한 바위 밑에 짓궂은 사람들이 막대기를 받쳐 놓은 모습이 참 재미있었다
우리가 사는 거대한 지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힘이 모여서 유지되는지도 모른다
종교와 이념의 차이로 인해 다툼과 싸움이 그치치 않는 지구촌의 현재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법주사 팔상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法)이 이곳에 머물렀다(住)'는 뜻에서 '법주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천년고찰 법주사에서 눈여겨 볼 것이 많지만 특히 대웅전 앞의 팔상전(八相殿)이 독특하다.
1605년(선조 38) 재건한 것으로서 현재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목탑이다(국보 제55호)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폭의 그림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八相圖)를 보관하는 건물이다
청동미륵대불
대웅전의 왼쪽 산기슭에는 동양 최대의 불상인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이 있다
원래 150m의 거대한 청동대불이 있었는데 1872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당백전 주조를 한다고 불상을 압수했다고 한다
1964년 6월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을 조성했다가 1986년 이를 다시 헐어내고 청동 160톤의 청동미륵대불을 점안했다.
일곱 여인들이 늦둥이라도 점지해 달라는듯 간절한 소망을 안고 청동대불 앞에 모였다
아, 옛날이여!
레이크 힐스 호텔은 우리가 33년 전 첫날밤을 지낸 소중한 추억이 어려있는 곳이다
22살의 철없는 여인을 데려다가 오늘까지도 고생만 시킨 나쁜 남자의 회한이 밀려와서 가슴이 아팠다
회갑을 바라보는 영감이 되어서야 철이 들어가는 이 남자는 어떻게 해야 아내에게 보답할까?
하산주를 마시다
산에서 내려오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하산주 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할수 없이 성당으로 연락해서 제1회합실을 빌려서 먹기로 조치를 취하였다
성당에 도착하여 신부님께 보고를 하고, 아가페표 김치찌게를 데워서 하산주를 마셨다
아가페는 김치 겉절이와 부침개까지 만들어 와서 우리를 두 번이나 감동시켰다
첫댓글 산행기로 깔끔한 마무리 잘 보고 잘 읽었습니다. 어때요.
궂은 날씨에 성당회합실에서 하산주를 마시니 더욱좋았습니다.
담에도
항상 포근한 미소로 반겨주시는 아가페님!!!
그 솜씨 좀 전수해주시지요. 감사했어요.
하얀 산자락들은 언제보아도 보는 이에게 평화와 희맘을 주네요.
쇠못별님!!! 글솜씨에 찰칵솜씨까지 더하니 그 감동 새록새록 살아나네요.
즐거운 겨울산행을 하셨네요 느낌 잘 갖고 갑니다...
감동은 그냥 느낌이 아니지요
눈자락 끝에서 이슬이 고이고 입벌어짐이 자연스러워야 감동이지요
시린 겨울산 우리들의 따뜻한 감성이 감동이었습니다
아~~ 어찌 그날의 감동과 여흥을 잊으리오까?
힘은 들었어도 비경에 빠져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장면 하나 하나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