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상식사전
한지
[ 韓紙 ]
한지는 닥나무나 삼지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뜬다. 때문에 '닥종이'로 불리기도 한다.
닥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관목이다. 우선 현재 우리가 쓰는 '종이'라는 말도 닥나무(저.楮)의 껍질(피.皮)을 뜻하는 '저피'가 변해서 된 말이라고 한다.
한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닥나무를 일단 삶아서 껍질을 벗긴다. 벗긴 껍질에서도 갈색이 나는 표피는 다시 벗겨내고 안의 내피만을 쓰게 되는데, 내피는 다시 한 번 삶는다. 이때 잿물을 이용해서 삶아야 하는데 잿물을 쓰지 않으면 잘 삶아지지도 않을 뿐더러 닥나무의 섬유질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잿물로 삶아낸 닥나무 내피는 절구로 20~30분간 쪄서 죽처럼 만든다. 이렇게 찧은 닥을 지통(종이를 뜨기 위해 물질을 하는 큰 통)에 넣고 섬유질이 잘 풀어지도록 대나무로 휘젓는다. 그런 다음 1년초 식물인 황촉규 뿌리즙으로 만든 닥풀을 넣어 골고루 섞는다.
그런 다음 종이를 뜨게 되는데, 지통 위에 종이를 만들 크기의 발틀을 건 다음 종이물을 걸러서 뜬다. 틀 위에 올라온 섬유질을 켜켜이 쌓아 물을 빼고 다림질하며 건조시키면 비로소 한 장의 종이가 완성된다.
송광사의 이른바 비사리구시 안내문. 싸리나무는 관목이기에 이렇게 큰 나무가 될 수 없다.
식물학자 전영우에 의하면 재질은 느티나무이다.
용도는 밥통이 아니고, 지통이다.
보경사 안내문의 원조이다.
해리 작업(닥종이 펄프와 닥풀을 물에 풀어서 젓는 작업)에 쓰인 지통으로 안내문을 바로잡고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라고
송광사에 홈페이지, 페이스북으로 3번이나 건의하였다.
아직도 송광사 수정하고 있지 않다.
송광사의 3대명물(능견난사의 그릇, 쌍향수, 비사리 구시)이라고.
다른 절의 것은 지통이라도 송광사 것만은 밥통이라고!!!
보경사 안내판-위의 송광사 안내문 베낀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완벽한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있다. 최근에 방영된 텔레비젼에서 포항시 소속 어느 문화관광해설사는 이 안내문대로 용도를 말했다.
(보충:
어제 11월 22일 겸재 정선과 청하 내연산 소재의 뮤지컬을 보고 나오다가 티브이 출연한 문화관광해설사분을 만났다. 그 분은 방송에서 지통과 밥 퍼 담는 용도를 같이 말했다고 하였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방송을 시청했기에 지통이라고도 하였다는 말씀은 듣지 못하고 밥 퍼 담는 그릇으로 쓰였다는 말씀만 나는 들었다. 이 점은 해설사분에게 미안하다. 해설사분은 교육받고 알고 있는대로 말씀하셨기에 아무런 잘못도 없으시다. 해설사분들을 교육시킨 분에게도 잘못은 없다. 원천 정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어제 만난 해설사분은, 지통이지만, 밥통으로 쓰거나 물통(수조)으로는 전혀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밥통이나 물통은 아니고 지통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다.
어릴 적 어머니는, 소변이 급한데 요강은 곁에 없고 하여 밥그릇을 가지고 어린 조카들의 오줌을 받아내곤 하였다.
이처럼, 공양간에 두었다가 제지하지 않을 때 지통을 물통으로 사용하거나 정말로 수천명의 손님이 왔을 때
일시적으로 지통에다 밥을 퍼 담을 수는 있을 것이다. 제지작업을 하지 않으니 지통을 물통으로 재활용할 수는 있을 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밥그릇을 요강으로 부르지 않듯이, 지통을 밥통이나 물통으로 부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문화재의 경우 등록 명칭을 명실상부하게 붙여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있다.
포항 죽장 입암 28경을 명명한 여헌 선생이 입암정사기문을 남겼지만,
엄연히 입암정사를 가지고 일제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입암정사의 가운데 대청마루를 일제당, 좌우의 방이 각각 열송재, 우란재이다.
영천 임고서원 부근의 우항리에 있는 포은선생 효자비를 포은정몽주 유허비라고 문화재에 등록되어 있다.
류성룡의 포은선생연보고이에도 엄연히 포은선생효자비라고 하건만, 이 비는 엄연히 포은 선생 생전에 세운 비이건만...
이런 것도 있다.
포항 곡강 충비순량비문에 엄연히 이씨 낭자가 幽恨(유한-남모를 한)으로 죽었다고 하였건만
일월향지는 이씨 낭자의 죽음과 관련된 구전을 전하고 있다.
영일읍지에는 기생 초옥이라고 하였다.
이 구전과 구조가 같은 구전이 낙동강 의성에도 전해온다.
문제는 이 구전을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 낭자가 죽은 지 48년 뒤에 흥해군수 조성이 지은 비문에 남모를 한, 엄연히 이유를 모른다고 하였건만,
춘향전을 방불케하는 민중들의 소망을 담은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유명한 논개도 류몽인이 임진왜란 뒤에 진주 지역의 민심의 동태를 파악하러 갔다가
떠도는 이야기를 채록하여 어우야담에서 실었다. 그야말로 야담(비공식적인 항간의 떠도는 이야기)일뿐인데
논개의 생년월일, 족보, 누구의 부인, 무덤, 사당까지 만들어지고 일제시기, 한국전쟁 이후에
구국의 영웅으로 부각되고 만해스님은 강낭콩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푸른 강물에 흐른다는 내용의 시를 지었고
나는 중학시절 국어교과서에서 이 시를 배웠다. 만들어진 역사! )
안동의 국학연구원에서 발간된 소책자에도, 케이비에스 텔레비젼의 <역사스페셜>에 방영된 내용을 책으로 묶은 <<역사스페셜>>제7권(효형출판사)에도 제지도구로 모두 나온다.
밥통이라고 하는 잘못된 정보의 원천은 아무래도 송광사의 위의 안내판으로 보인다. 송광사도 밥통이냐 지통이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지만, 송광사에서 종이를 만든 기록을 찾지 못했고, 최남선이 1926년 5월에 지리산 주변을 기행하고 쓴 <<심춘순례>>의 <조선불교의 완성지인 송광사>에 나오는 대목까지 제시하며, 밥통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굳어져서 역사가 되었기에 고치지 않고 그대로 밥통이라고 한다고 하고 있다. 최근에, 안내문에서 재질을 느티나무라고 수정하였지만, 용도는 여전히 밥통이라고 하고 있다. 송광사 홈페이지에 3번째 고치시라고 글을 올렸다.)
송광사 문화유산 관광객, 신문들에서도 모두 밥통이라고 하고 있다. 심지어 두산대백과사전에서도 송광사 비사리구시가 밥통이라고 하고 있다. 한 번 잘못된 정보가 나가면 고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름은 구시든, 구시통이든, 구유든, 구유통이든, 비사리구시든, 지통이든 상관없다.
그러나 용도는 정확히 종이 제작에 쓰였다. 한자로 지통(紙桶)이라고 하는 것이 명실상부한 정확한 이름이다.
바닥에 물을 빼는 구멍이 보인다.
보경사의 소위 비사리구시???
사실은 종이 펄프를 물에 풀어두는 지통(紙桶)!!!
안내문:
<부처님의 공양을 마련하는 절간 주방의 '구시'로,
이 구시는 조선후기 보경사에서 나라 제사 때마다 많은 손님들의
밥을 퍼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쌀 7가마(약 4,000명분)의 밥을 담았던 통으로
보경사의 명물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왜 절간이라고 표현하였는지 모르겠다.
'중', '중놈', '절간', '이 화상아!,' '목탁같은 놈아! ' 등등
이런 표현은 성리학 유교를 국가와 사회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양반들이 불교를 비하하면서 썼던 말인데...
문맥을 잘못 읽으면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 공양밥을 퍼 담기도 했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절에서는 부엌, 주방이라 하지 않고
전통적으로 '후원'이라고 하고 주방장이라고 하지 않고 '원주'라고 하는데...
아래 사료들은 보경사에서 얼마나
종이를 많이 만들었던가를 잘 보여준다.
종이는 기본적으로 책 인쇄나 문서 작성에 쓰인다.
<절의 곁에 풀이라곤 등나무(-닥나무와 같이 종이의 원료)이고 나무라곤 닥나무인데 거주하는 승려들의 생업 밑천이었다.
......
노승이 짚신을 바치며 말하기를 ‘절에서 서쪽으로 구름문과 돌길이 험악하고 깎아지른듯하니 이 아니 어려운 걸음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동행할 사람들을 뽑았는데, 이야기를 나눌 승려(談僧)는 학연(學衍), 시문을 챙기는 시해(詩奚)는 덕룡(德龍), 벼루를 드는 사람(硯者)은 홍원(洪源), 술시중할 사람(酒者)은 매운(梅雲), 옷과 양식을 들고 갈 사람은 억동(億童)이었다. 또한 한 명의 백족(白足-淸淨僧)으로 하여금 날 저물 시간을 헤아리게 하여 아무 암자에 이르러 잠자리로 삼도록 하였다.
......
숙부가 바위 사이의 녹색 수풀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화살대가 아닌가?’하였다. 학연이 답하기를 ‘관아의 아전에게 공물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
내가 그 승려가 없음을 힐난하자. 학연이 말하기를 ‘불교가 쇠퇴한 것입니다. 관아의 부역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
스님들은 가마꾼이 되고 절은 밥을 지어 나르는 여관이 되었습니다. 이 산이 이름을 가지면 우리 스님들이 심하게 해를 입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여일, 유내영산록, 1587(임진왜란 발발 5년 전)
二十日小有雨徵。飮白粥酒一廵而發。余委見光胤于其家。親親之義厚矣。朝飯申光村。午過淸河縣。諧甫入見主倅。諸君幷歇馬于松羅驛溪邊。余入酌一盃而行。諧甫追到于寶鏡寺。寺乃鉅琳宮。幾至二百餘間。而但無所奇觀。此與村店相隣。左右楮田。瀰滿一洞。可知寺僧皆重利者也。法堂前有牧丹一叢。只爲野僧之賤看可惜
음력 (9월) 20일 조금 빗방울이 떨어졌다. 백죽주(-쌀로 누룩을 만들고 배꽃 필 무렵에 쌀가루로 술을 빚는데, 요구르트처럼 숟가락으로 떠먹기도 하고, 물에 희석시키면 쌀 막걸리 탁주가 되는 이화주를 말하는 것 같다. 이화주는 고려시대부터 마시던 최고급 탁주로 소화력이 약한 어린이나 병약자, 여행객이 휴대하여 마셨다. )를 한 잔 마시고 출발하였다. 내가 광윤을 그 집에서 보았는데 친척을 친하게 여기는 의리가 두터웠다. 아침밥을 신광촌(神光)에서 먹고 정오 무렵에 청하현을 지났는데 해보가 읍성으로 들어가 원님을 만났다. 제군이 송라역 냇가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고 나는 (주막으로) 들어가 술 한 잔을 마시고 갔다. 해보가 보경사로 뒤쫒아 왔다. 절은 거찰이라서 거의 200여 칸의 건물들이 있었다. 다만, 특별히 볼 만한 경관은 없었다. 이곳은 촌주막(송라역 아래쪽 '여인의 숲'이 있는 곳?)과 서로 이웃하였다. 절의 좌우에는 닥나무밭인데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절의 승려들이 모두 (제지 생산과 판매의) 이익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법당 앞에는 모란 한 떨기가 있었는데, 다만 야승의 천박을 보여주니 안타까웠다.
-서사원, 동유일록, 1603(임진왜란 종료 5년 뒤)
山水之佳 美則美矣 班豹之皮 反自爲禍 水明之害 困於紙役 山佳之患 苦於賓客 然 天生山水 人如之何
산수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것일 뿐이다. 표범 가죽의 아름다운 무늬가 오히려 목숨을 빼앗기는 화가 되고, 물이 밝은 것의 해로움은 (관아에 공물로 바치는) 종이를 만드는 잡역을 부담하는 곤란을 준다. 산이 아름다운 것의 근심은 빈객을 (대접하고 가마 태우고 산을 오르내려야 하는) 고통이 된다. 하늘(자연)이 산수를 낳았으니 사람이 어찌하겠는가.
-동봉회관 스님, 보경사사적기, 1792.
어릴 적 마굿간(외양간)에서 소에게 쇠죽을 퍼 담아주던 여물통(구유) 처럼 생겼다.
안내판에는 이름을 비사리구시라 하였고,
구시라고 한다고 하였다.
조선후기에 절에서 나라의 제사 때마다 많은 손님들의
밥을 퍼 담는 그릇으로 부엌에서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7가마의 쌀(약 4,000명 분)의 밥을 퍼 담았던 통으로
보경사의 명물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항상 의문은 남았다. 과연 밥을 저렇게 투박한 나무 그릇에 퍼 담았을까?
용도가 늘 궁금하였다.
그런데, 오늘에야 의문이 풀렸다.
방학이라 방 청소를 하다가 구석에 쌓여 있는 책자들을 정리하다가
안동의 국학연구원에서 발간한 책자의 고서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에서
통도사의 판석과 지통 사진을 보고서야 비사리구시가 아니라
지통임을 알게 된 것이다.
<<역사를 되살리는 힘-전통 기록문화유산의 세계>>(한국국학연구원, 2011). 위의 책 사진에서 지통(紙桶)의 한자가 잘못되었다.
딸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 삼월이면 서울로 올라가버리기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지난 일요일에 보경사와 내연산 등산을 같이 하였다.
보경사를 안내하며 이 지통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딸 아이와 아내에게 안내판대로 밥 퍼 담는 비사리구시라고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엔 고서를 소재로 하는 수필을 한 편 쓰면서
고서 제작 과정에 관한 상식 공부를 하였다.
이 유물은 닥나무 껍질을 삶아서 돌(판석)에 두들겨 그 닥죽(펄프)을 물에 풀어두던 지통이다.
이 지통에서 닥나무 펄프를 촘촘한 키로 퍼 올려서 말리면 곧 종이가 된다.
대찰인 통도사, 송광사에도 보경사의 지통과 같이 생긴 것이 두 점씩 있다.
이 지통은
보경사와 통도사 , 송광사 등의 전국의 사찰들이 사원경제 지탱을 위하여
얼마나 종이를 많이 생산하였으며
국가에 종이를 만들어 납부하였던가를 보여준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국가와 지방 관청들이 재정 악화로
사찰들에 종이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잡물들을 공납하게 하는
경제적 수탈을 하였던가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보경사 유물 전시관이 완공되면
바른 안내문과 함께 그곳으로 옮겨 전시해야 할 유물이다.
동학의 해월 선생은 청년시절 신광면 마북리 옴금당 조지소에서 종이를 만들고
또 흥해, 영덕 등지로 종이를 팔고 수금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지금도 영덕에는 한지 생산 마을이 남아 있다.
보경사의 이른바 비사리구시 예전 안내문
보경사의 지통
송광사의 소위 비사리구시들, 종이만들 때 썼던 지통들이건만!!!
비석 테두리의 연화당초무늬를 보라!
고려 불교 문명의 국제적이고 화려하고 섬세한 미감을 잘 보여준다.
비문 첫 머리의 '一心'이라는 말에 특히 유의할 것.
원효 스님이 화쟁론의 근간으로 삼기도 하였던
대승기신론에 등장한다. 원효 스님은 대승기신론 소 별기를 남겼다.
원진국사는 한국불교사에서 능엄경의 중요성을 천명하였다.
보경사의 보물은 원진국사 승탑, 탑비, 사인 스님이 주조한 서운암의 범종이다.
보경사 최고의 성보 미술품은 적광전 비로자나불 후불도이다.
이 후불도는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발간한
한국의 불화 40권에서 명품만을 따로 모아 낸
한국의 불화 명품 선집의 표지화이다.
그리고 금당탑과 승탑의 자물통과 문고리 부조를 보라!
아니면 천왕문에 걸려 있는 현판들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글씨인가?
또한 보경사에는 월포 오두촌에서 태어나서 보경사로 출가한
명승, 시승이었던 오암 스님이 머무셨다.
이 지통이 어찌 보경사의 명물 중에 하나가 될까?
어느 시인은 보경사에 이른바 비사리구시 안내문을 보고서는
아래와 같은 아름다운 시를 창작하였다.
그러나 상상력의 원천인 사실이 잘못되었기에
그 문학적인 가치는 반감할 수 밖에 없다.
차라리 사찰에서 종이를 만들어
관아에 납부하는 부역에 시달리고
억불숭유의 조선 사회에서 사찰들이 얼마나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였던가를
정확히 알고
그에 부합하는 시를 썼더라면 기록성, 사회 고발, 사회 참여, 삶의 재구성, 위안이라고 하는
진실을 담보하는 문학의 힘과 가치와 아름다움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 유산의 정확한 안내가 가지는 중요성과 가치를 재삼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비사리라는 말에서 사리를 연상하고 있기도 하다.
적광적 후불도의 아름다움을 시인이 인식하고 갔더라면
얼마나 더 아름다운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원진국사가 호랑이에게 몸을 던져 두타행을 하였다는
보경사에 전해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국사의 승탑에서 들려주었다면
한편의 아름다운 단편소설이 창작되었을 지도 모른다.
해방 이후
포항에서 살다가 작고하고 문학비가 보경사 경내에 있는
한흑구 선생은 보경사의 노거수 회나무를 보고,
또 보경사의 목련꽃을 보고 아름다운 수필을 썼다.
보경사와 내연산을 정확하고 아름답고 깊이있게 소개하는
책을 어서 집필하고 싶다.
지금 나름대로 준비 중이긴 하다.
비사리구시
김종제(국어교사, 시인)
배 타고 한참을 물 건너가
팔면의 거울을 비로소 얻었으니
내연산 땅속 깊이 묻어놓고
일조대사가 보경사를 세웠다
큰 바람 부는 날
싸리나무 하나 쓰러져
비사리 구시를 만들었는데
해태나 삼존불보다 명물이라고,
잔칫날 공양을 마련하려고
몇 천 명 먹을 수 있는
밥 퍼 담아놓는 그릇이다
쌀로 만든 저 두둑한 흰밥이
부처의 사리였으니
모락모락 김 오르는 밥 담아놓은
저 구시가 사리함 아니겠는가
다비로 방금 지어낸 밥이란
생의 숨구멍에서 얻어낸
한 톨의 정수精髓 아닌가
저것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서
산 아래 노숙의 곁으로 던져놓고
밥그릇마다 비로자나불의 말씀을
고봉으로 담아서 드리겠다
저 가난이 남김없이 드신 다음에는
좌우에 계신 문수와 보현의 미소로
세상 깨끗이 씻어놓겠다
내일 또, 저 비사리 구시에
사리 같은 밥 담아 놓으려고
(통도사의 지통-사람들은 비사리구시라고 부르며, 밥을 퍼 담는 용도로 쓰였다고 인식한다.
지통이다.
통도사에는 삶아낸 닥나무 껍질을 잘게 부수는 돌판, 곧 판석도 현전한다.)
경남 옥천사의 지통으로 종각에 보관하고 있다. 역시 사람들은 밥을 퍼 담는 비사리구시로 인식한다.
이 책에서는 절에서 전통적으로 불러온대로, 구시의 표준말인 구유라고 하였다.
생긴 모양이 영락없이 소, 말의 여물통인 구유를 닮았다. 그래서 이름도 구유(구시)라고 하였고
용도도 밥 퍼담는 밥통으로 오인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 말의 구유와 비교하면
물 빼내는 구멍이 바닥에 나 있다. 이 통을 사람이 서서 작업하기 편하도록 올려서 고정시키는
구멍이 양쪽에 있다.
케이비에스 역사스페셜, <<역사스페셜7>>(효형, 2004) 238-240쪽.
통도사와 가까운 울산 원적산 운흥사는 지금은 폐사가 되고 말았지만
종이를 만들고 경전을 인쇄한 사찰로 이름 높았다.
절터에는 수조 2개와 판석이 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료인 닥나무(등나무도 혼합한다)를 재배하여야 하고,
물이 좋아야 한다.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 고려시대부터
사찰은 많은 불경을 인쇄하였다.
현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백운화상초록직지심체요절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하였다.
사찰은 제지와 인쇄 기술의 집결처로
조선시대에도 기 기술과 능력이 고스란히 이어졌다.
조선국가는 유교를 국가와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제도권 밖으로 밀어내고
사회적으로 승려를 천인 신분으로 삼았으며
경제적으로 사찰의 노동력인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여
수 많은 사찰, 암자들이 쇠락하고 폐사가 되었다.
승려가 살지 않으니 절에는 빈대가 들끓을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빈대 때문에 스님들이 절을 비운 것이 아니라 국가의 온갖 공물과 잡역에
견디지 못하고 스님들이 절을 떠나고, 절은 빈절이 되고 만 것이다.
승려들을 놀고먹는 유휴인력으로 여기고 남한산성 축성 등의 잡역에 동원하였다.
사찰과 암자는 양반 유생들의 휴양처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또한 국가는 끊임없이 사찰에 화살대, 짚신, 종이 등등 온갖 공물을 납부하게 하였다.
사원 경제의 지탱을 위하여 승려들은 속가로부터 재산을 받기도 하고
상업 행위도 하였다. 안용복의 꾀임에 빠져
울릉도, 독도로 들어간 여수 흥국사의 뇌헌 등의
승려들은 배를 타고 울산에 까지 와서 해산물을
교역하기도 하였다.
또 조선후기에 승속이 참여하는 불량계, 등촉계 등의 사찰계가 널리 결성되어
식리로 사원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지업은 사찰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기도 하였다.
사찰에는 건축이나 제지, 인쇄, 제책, 조와 등의
기술을 가진 각종 장인 승려들도 많이 존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국가 관청이 재정의 악화로 사찰들이 더욱 더 심하게 수탈을 당하였다.
재산을 기부하면 승려들에게도 통정 등의 공명첩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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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통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재질은 관목인 싸리나무는 아니고 느티나무 같은 교목이다.
6. 지통은 문화사(제지 공예 기술과 과학, 인쇄와 제책, 기록), 사원경제사와 관계있는 유물이다.
첫댓글 현재의 '비사리구시'는 닥나무 껍질을 삶아서 돌에 두들긴 펄프를 물에 풀어 담아두던 지통이다. '수조'라고 표현을 하였었는데, 지통이라고 해야겠군요... 감사합니다.
그라마 왜 우리는 이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두려움인가.... 아마 그분 해설사님도 알지만... 예 선생님 말씀에 수긍이 갑니다. 공식적인 모범답안이 필요하군요..
잘못된 글자나 내용이 있으면 빨리 고처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 국민들과 외국인들이 관람시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있을것. 같습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문화재에 담겨있는 역사적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것도 우리 문길활동의 중요한 목적이라 생각하니 전달자의 역활에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낍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오늘에야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