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潟(니가타)의 여관방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1주일쯤 지나서였다. 드디어 그림을 사려는 첫 손님이 찾아왔다.
한장을 사갔는데 값은 50전에서 1원정도였다고 의재는 기억했다. 아직 무명의 화가이므로 꽤 싼값이었다. 뒤를 이어 그림을 구하려는 손님이 쏠쏠히 찾아왔다.
몇달이 지나는 동안 작품들이 꽤 모아졌다.
新潟 시내의 유지.동호인들 사이에서 그림에
몰두하는 의재를 위한 공론이 모아졌다. 전시회를 마련해 주자는 것이었다. 아마도
1916년 봄쯤이었을 것이다. 의재는 이국땅
新潟시에서 일본인 동호인들의 기획(?)으로
첫 개인전을 열게 된것이다. 25세때였다.
30여명의 新潟 유지들이 회원이 되어 1원50전씩의 회비를 내 그 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전시회에는 40여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림에는 그때 新潟에 살던 이름있는 전각가가 돌에 새겨 준 도장을 찍어 낙관을 했다. 귀한 돌은 아니었으나
'毅齋'과 "許百鍊印"과 '毅齋 許百鍊印' 을 각각 새겨주었다.
'그런데 나는 친일파야'라는 말을 언젠가 제자들 앞에서 했다고
했는데 이어서 그 말의 참뜻을 의재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내가 다행히 일본사람들이 그림 쓰겄다고 후원을 해주자 어쩌자
해서 내가 그덕을 참 많이 본 사람이야"
25세 무렵에 가진 新潟에서의 평생 처음 개인전에서 의재는 40여원의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때의 감동은 각별했다.
"나를 동정해준 사람들을 절대 안잊으려 했는데 지금은 한분의 함자도 생각나지 않으니 죄스러울 뿐이다"라고 나중 84세때 의재는
회상한다. 이미 그때의 목도장은 말할것도 없고 돌에 새긴 3개의
도장도 잃어버린지 오래고 또 그것을 새겨준 전각가의 이름도 잊었던 것이다.
지방 有志의 好意 그러나 의재는 新潟에서 사귄 사람중의 두 사람을 끝까지 잊지 않고 기억했다. 竹田(다케다,아호 霞村)이라는
사람과 小柳一藏(오야나기 가즈조오)였다. 竹田은 의재보다 6세
손위로 東京미술학교 출신인 화가였으나 집이 부유해서인지 별로
그림에 집착하지 않았다. 花鳥畵를 잘하면서도 文展같은데 출품할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官展 자체를 우습게
여겼다.
山水를 주로 그리는 의재와 화풍은 달랐지만 마음이 서로 통해 자주 만나 그림 이야기를 나누었다.
小柳는 의재보다 15세가 위였는데 新潟의 추억에서 특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고장에서 매우 유력한 유지였다. 특히
한국인들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의재가 그곳에 가기 전에도
그는 이미 여러사람의 한국인 망명객을 도와주었다.
그는 의재에게 여관생활이 불편할 테니 자신의 집에 와 있으라고
권했다. 1916년 가을께 의재는 드디어 그의 집으로 옮겨가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小柳는 한문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의재가 한시를 짓는 등 한문에 대한 소양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척 좋아했다.
의재는 그의 집에 묵으며 날마다 그림을 그렸다. 小柳의 덕망에
감복해 여러 폭의 그림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윽고 小柳 자신이 毅齋畵會를 주선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화회를 열어줄 테니 東京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그화회에도 40여점의 작품을 출품했는데,수입은 훨씬 많아 1백50원이나 되었다. 의재는 東京으로 돌아왔다. 1917년 봄이었다.
두번째 지방 巡業 神田區에 한 여관을 잡고 마음 편하게 그림을
그리며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여름 어느날 上野공원 근처에 있는 小室翠雲댁을 찾아갔다. 그러나 선생은 여름 별장에 가고 없었다. 그 무렵 일본의 동양화단은 川合玉堂(가와아이 교쿠도오).橫山大觀(요코야마 다이칸).竹內栖鳳(다케우치 사이호오) 등이 1인자였고 小室翠雲이 그 다음 급이었다.
그들은 유명한 만큼 만나기가 어려웠으며 실제로 수많은그림 요청으로 매우 바쁜 생활들을 했다. 小室선생을 만나지도 못한 채
몇달을 여관에서 지내는 동안에 의재는 가진 돈을 거의 다 썼다.
다시 시골로 나가서 순회화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小柳의 기대를 저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東京을 떠나면서
편지를 썼다.
"어쩔 수 없이 東京을 떠나지만 그림 공부만은 잊지 않았다 "은 내용이었다.
의재는 우선 山梨縣(야마나시현)의 현청소재지인 甲府(고오후)로
갔다. 東京에서 서쪽으로 1백여㎞ 되는 곳이었다. 한번 해본 지방순회여서 그만큼 이력이 난 듯도 했다.
여관 주인은 곧 저희 여관에 화가가 묵고 있다는 얘기를 퍼뜨렸다. 소문을 듣고 그림을 청하려는 사람이 심심치 않게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림값도 조금 많아져 한폭에 1원이 넘었다. 화가를 아끼던 그 당시 일본에서의 풍토에 의재는 적지않은 자극을 받았다.
좋은 대접을 받는만큼 그림도 좋아져야겠다는 생각을 거듭했다.
그만큼 열심히 그렸다. 그의 그림 실력은 자신도 모르게 향상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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