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인문학데이트 코너를 즐겨 읽는데...마침 젊은 건축가 임석재(이화여대 교수)씨와의 대담이 실렸길레 퍼왔습니다. 인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께서는 한번 읽어 보시길. <퍼온자>
----------------------------------------------------------
`인문학 데이트'는 이번에 건축학자를 초대했다. 건축학 자체는 인문학의 본령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인문학적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처럼 우리 건축문화가 황량해진 데는 이 인문학적 정신이 빠진 채 물량과 속도에만 의존한 탓이 크다. 인문학 데이트 열다섯 번째 초청자인 이화여대 임석재 교수는 한국의 이런 건축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건축사와 건축이론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의 건축론은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을 돌보는 건축”, 한마디로 줄여 “정성의 건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건축에 흥미를 느껴 뒤늦게 건축을 공부하고 있는 배지운(25·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씨가 임 교수와 만났다. <편집자>
----------------------------------------------------------
[인문학데이트] ⑮ 임석재
"건축은 사람을 생각하고 돌보는 정성 "
배지운=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자리가 `인문학 데이트'이니 인문학과 건축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우리사회에서는 아직까지는 건축이 기술공학적 측면에 치중돼 있는 것 같은데, 최근 저서 <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에서는 건축을 역사나 문화, 삶의 관점에서 설명해주는 게 좋았습니다.
임=건축의 인문학적 특징을 저는 건축이 생활과 밀접한 분야라는 사실에서 찾고 싶군요. 인문학이란 게 인간 현상에 대한 기본 원리를 찾아내는 학문이어서 사변적으로 흐르기 쉬운데, 건축은 사변을 바탕으로 하되 항상 현실 체험을 통해 검증돼야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 자체와는 다릅니다. 건축은 건물이라는 물리적 대상을 갖고 있는 것이죠. 건축에 대한 이런저런 정의가 많은데, 저라면 건축은 정성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엄마가 어린 아이에게 정성을 들이듯이 건축도 제대로 하려면, 그런 생활 차원의 끊임없는 관찰과 체험이 바탕에 깔려야 한다는 것이죠.
배=건축의 인문학적 연구가 요즘 들어 많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임=국내에서 건축인문학이 시작된 건 출판계 쪽 성화에 힘입은 바 큽니다. 출판이란 게 우선은 대중의 취향을 따라가는 것인데, 건축학자들의 노력보다는 대중의 요구가 먼저 있었다는 뜻이죠. 그러니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학자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들어 좋은 시도들도 보이는데, 서현씨가 쓴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같은 경우를 높이 사고 싶습니다. 서울의 거리를 일일이 답사해 왜 문제가 있고 어떻게 망가졌으며, 앞으로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데, 본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문제의식이 있죠.
배=건축은 대중의 삶 안에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건축 하면 멀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학문으로는 공학이라고만 생각하고, 생활로는 부동산이라고만 보는 것이죠. 건축 대중화의 방안을 찾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임=저는 우리나라에서 건축 대중화 가능성을 `전통'에서 찾고 싶습니다. 전통을 현대로 풀어낼 수 있다면, 대중에서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배=전통이라고만 말해버리면 상당히 막막하게 느껴지는데요.
임=전통이라면 우선은 서구화나 산업화가 일어나기 전의 생활문화 전반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봐야겠죠. 그 안에 건축도 포함되고요. 저는 건축에서 전통의 요소를 현대로 되살려낼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옛날의 집은 사람들이 몸동작을 여러 형태로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한 공간이었습니다. 반면, 요즘의 아파트는 몸동작을 단순화시킵니다.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밖에 못하는 건데, 몸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더 다양한 동작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양한 몸동작을 돌려주는 것도 전통을 되살리는 일인 것이죠. 또 색이나 곡선도 전통의 특징 중 하나인데, 그걸 오늘의 건축에 재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배=<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에서 20세기 물질문명의 폐해를 지적하셨는데 그 대안이라고 할 건축적 개념을 들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임=제가 생각하는 대안 개념은 자연·고전·원시입니다. 자연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문화활동의 바탕이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생활공간을 만들어낸 것이 건축의 출발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데, 물질문명이 발흥하면서 자연이 정복 대상이 되고, 그 정도가 한계를 넘어버림으로써 인류의 삶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른 거죠. 자연과 기술의 공존이야말로 21세기적 과제라 할 텐데, 건축도 예외가 아니죠. 저는 그 방안으로 고전과 원시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고전을 바로미터로 삼아 현재를 조회하는 것은 인류의 문명이 추구하는 진보성에 적절한 제어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원시는 계몽에 대한 쌍개념입니다. 계몽이라는 말은 오늘날 식민주의·물질주의·합리주의·엘리트주의 등 현대 문명병을 낳은 개념들과 동의어가 돼버렸습니다. 원시를 살리자는 것은 석기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자연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화제를 좀더 구체적인 곳으로 돌려보죠. 몇년 전 강남의 대형 백화점이 무너져 수많은 사람들이 깔려죽은 참사가 있었습니다. 이 건물 붕괴를 건축학자의 눈으로는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임=한국 사회의 전근대적인 부패구조가 청산 안 된 상태에서 근대문명의 물질주의를 극단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봐야겠죠. 근대성의 여러 요소들이 상호 보완·견제·조화를 통해 균등하게 나아가야 하는데, 한쪽만 극단적으로 나아간 결과인 거죠.
배=건물이 무너졌다는 건 시공이 잘못됐다는 건데, 건축계의 책임도 있지 않습니까.
임=시공현장의 관리감독도, 설계도 건축학과를 나온 사람이 관련돼 있을테니까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대의 한계를 개인이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 전반의 건축문화가 그 수준이라는 것이죠.
배=그렇더라도 시공현장에서 불량 건축을 고발하는 양심선언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문제 아닙니까. 최근 한 건축잡지에서 건축인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을 묻는 설문에서 도덕성이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임=건축이 명색이 조형예술인데, 그것을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질 1위가 도덕성이라는 건 참담한 일이죠. 건축인들이 비겁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배=우리 근현대사는 외세의 폭력적 지배로 얼룩져 왔을 뿐만 아니라 폭력적 근대화를 겪기도 했는데요. 건축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임=서울의 역사가 600년이라는데, 그 역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다 사라져 버렸어요. 문제는 그게 폐해인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죠. 가령,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이 세계적 명소인 것은 박물관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거리와 풍경 등 도시 전체가 분위기를 조성해주기 때문이거든요. 서울은 강과 능선 등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도, 폭력적인 개발로 다 없애버렸어요.
배=건축은 정치권력이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분야이기도 한데요. 가령, 독일의 나치즘이 남긴 건축물들이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임=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에서부터 현대의 히틀러까지 절대권력자들은 대체로 권위적인 건축물을 좋아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절대권력자들이 고전주의 양식을 선호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대중이 고전주의적 건축물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위압적으로 권위를 표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죠.
배=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곳곳에서 권위적인 건축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임=대검찰청, 헌법재판소, 전쟁기념관, 독립기념관 등이 대표적인 경우죠. 고전주의적인 아름다움은 없는 채로 권위적이기만 한 건데, 구청을 비롯한 관공서 건물들도 획일적이어서 시민의 편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짧은 기간 동안 많은 책을 쓰셨는데, 그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까?
임=예, 그렇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는 관심이 많은 반면에,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는 편인데요, 건축은 그런 점에서 사람과 부딪치지 않고도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직접 부대끼면서 느끼는 주관적 느낌을 넘어서는 어떤 보편성을 건축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지점을 통해 사람들과 대화하려다 보니까 책을 여러 권 쓰게 됐습니다. 20~30년쯤 계속 공부해서 나만의 건축사상을 쓰고 싶습니다. <정리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1961년 서울 출생
△1980~1987년:서울대 건축학과 및 같은 대학원
△1989:미국 미시간대 건축학 석사.
△1992: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건축학 박사
△1993년:원도시 근무
△1994년~현재: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저서:<추상과 감흥:비엔나 아르누보 건축>1·2(문예마당, 1995), <장식과 구조미학:불어권 아르누보 건축>1·2(발언, 1997), <형태주의 건축 운동:형태와 조형의지>(시공사, 1999), <생산성과 시지각:뉴 브루털리즘과 대중사회>(시공사, 2000), <한국 현대 건축 비평>(예경, 1998),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대원사, 1999), <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임석재 교수의 현대 건축 이야기>(북하우스, 2000), <한국적 추상 논의>(북하우스, 2000)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