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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04주일설교 아름다운 기도(빌립보서1:9-11)
제목: 아름다운 기도
본문: 빌립보서 1:9-11
오늘은 빌립보서 1:9-11의 말씀을 가지고 “아름다운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지난 주간은 명절을 지났습니다. 명절에 잘 지내셨습니까? 저는 계획대로 하지는 못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실 분이 없었고, 딸들이 직장에 가는 관계로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 일찍 임실 오수에 있는 산소만 갔다가 밤중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누님 네 집에 들렀습니다. 이제 누님도 65세에 돌아가신 어머니보다 무려 열 살이 많습니다. 그래서 누님을 보면 어머니를 본 듯해서 좋습니다.
그 누님은 상추 농사를 사시사철 짓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늘 상추와 케일 등 여러 청정채소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좀 뜯어 주셔서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에 오신 분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누님 네 집에서 가져온 채소는 맛이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해 주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그것을 먹을 때마다 어머니가 해 주신 것 같아서 따듯함으로 먹으니 더 맛있습니다. 그래서 잘 간직해서 먹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비가 오고 적적해서 서울에 갔었습니다. 누구를 만날 계획이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만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 구경이나 할까 하고 서울에 갔었습니다. 한 친구와 연락이 되어서 같이 점심을 먹고 예술에 전당 쪽으로 갔습니다.
오후이기에 공연은 없었고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모딜리아니라는 프랑스 화가의 전시회가 있어서 친구와 함께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작가는 풍경화는 한 점 밖에 없었고, 초상화가 주로 있었습니다. 36세를 일기로 살다간 화가였습니다.
한 번도 풍성하게 살지 못했던 화가였습니다. 화가가 되기 전에도 가난했고 화가가 되고 나서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남의 초상화를 그려서 연명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초상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으로 36세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그림 그리는 일에 충실하셨습니다. 그에게 준 달란트인 그림 그리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다른 일을 했더라면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의 사진을 보았는데 건장한 체격에 멋진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은 힘들었지만 처가에서 반대도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남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일 재능, 그것을 살려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일까요? 먹고 사는 일에만 매진했던 사람들, 지금의 먹는 일과 건강을 위해서만 살았던 사람들 그들을 누가 기억하고 누가 좋아할까요? 우리가 기억하고 좋아했던 사람들을 보면 먹고 사는 일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재능에 따라 살았던 그것을 위해 힘썼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물론 먹고 사는 일도, 건강도, 취직도, 권력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좀 더 기도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좀 더 아름다운 기도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그런 말씀을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어떤 기도가 좀 더 아름다운 기도일까요? 어떤 기도가 우리의 삶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삶일까요? 먹고 사는 것을 넘어서 아름다운 삶 복된 삶이 되는 기도는 무엇일까요?
1.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시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 몇 번씩 짧게나마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매일처럼 반복되는 여러분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보통 성도들의 기도는 돈이 많아지길!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길! 자녀들이 공부 잘하길! 화목하길! 등등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평안해 지길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필요한 기도입니다.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바울은 그런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부유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평안한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이 많았고, 환란과 핍박이 있어서 많은 어려움으로 인해 기도해야 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도를 먼저 하지 않고 아니 그런 기도를 하지 않고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이 더욱 더욱 증가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사랑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먼저 바울에게 헌금을 보내서 바울의 선교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뭄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에도 너그럽게 헌금을 보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것을 나누어서 남에게 주면 그렇게 말합니다. 돈이 많아서 준다고 합니다. 넉넉해서 나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넉넉해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돈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없고 있으면 쓸 곳이 없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있는 사람은 그것을 활용하여 뭔가를 잘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는 것은 사랑이 있어서 주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기 때문에 돈을 주고 시간을 주고 힘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바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랬습니다. 부족하지만 사랑이 있기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제일먼저 기도한 것이 사랑이 더욱 더욱 증가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사랑이 많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왜 내분이 있는 것입니까? 왜 갈등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이 있지만 있는 사랑이 작아서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없기에 사랑이 증가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용납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해하지 못해 못견뎌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그냥 놓아 두고 살아야 합니까? 그냥 무시하고 살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족으로 살게 하고, 공동체로 살게 하고, 같은 성도로 살게 하고, 이웃으로 살게 한 것은 사랑하면서 살라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서로 용납하며 이해하며 사랑하며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먹고 살고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사랑이 더 증가되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동물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면서 살라고 했기에 우리는 사랑이 더 증가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마땅하며 필수적이고 중요한 기도입니다.
2.지식과 총명이 점점 더 풍성하게!
저는 우리 율리교회 예배당과 사택 건축을 쭉 지켜보았습니다. 참 훌륭하고 성실한 설계사와 목수를 만나 예배당과 사택이 잘 지어졌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중요하지만 또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연장이었습니다.
그 많은 나무를 톱으로 잘랐다면, 그 많은 못을 망치로 박았다면, 그 많은 것을 대패로 밀었다면 가능했을까요? 물론 가능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시간과 많은 사람의 수고가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작은 인원으로 집이 지어 지는 것은 신기하고 놀라왔습니다.
하지만 발달된 기계톱이 신기했습니다. 빨리 잘리고, 각도를 맞추면 어떤 방향으로든 어떤 경사 각도로든 자를 수 있었고 한방이면 못이 박히는 도구가 있어서 순식간에 많은 못을 박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지게차나 크레인만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굴착기로 땅을 파고 돌을 옮기는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기술이 없는 사랑은 무모할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을 하면 일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망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뭔가를 고치면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더 고장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기술이 있는 사람은 쉽게 그리고 효율성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술이라는 하는 것은 참 중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전문가를 씁니다. 기술자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랑하러 태어났습니다. 그 누구이건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잘 살고 아름답게 사는 것은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 입니다. 예술가들은 그림이나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도 효율적으로 지혜롭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연장이 있어도 사용할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잘 사용해야 연장이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해가 됩니다.
바울은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풍성하게 되는 길은 지식과 총명이 풍성하여 질 때 가능합니다. 지식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먼저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사랑이 우리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사랑이신 그분의 말씀 안에서 나와야 합니다.
또한 지식은 세상에 대한 올바른 평가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의 대상인 세상을 바르게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칼바르트는 한손에는 성경 한손에는 신문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알듯이 세상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지식은 윤리에 대한 지식입니다. 사람간의 도리가 무엇이며 부모와 자녀와 형제간의 도리가 무엇이며, 스승과 제자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른 체 사랑한다고 하면 무모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얻기 위해 학교에 가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살피고, 세상을 잘 살피고, 또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이 없이 사랑 하니 사랑으로 인하여 망하는 일을 봅니다. 무조건 돈만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보호해 주는 것만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편 들어 주는 것만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다가 망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지식뿐만 아니라 총명도 필요합니다. 총명은 실제적인 지혜 곧 통찰력을 말합니다. 어떻게 말하면 상대방이 더 잘 알아듣게 할 수 있을까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대화의 방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도움을 주되 어떻게 주어야 상대방에게 더 효과가 있을까에 대한 방법을 가져야 합니다. 종종 도와준다고 하다가 상대방을 더 어렵게 만들고 일을 그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총명 곧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살펴야 합니다.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사랑을 표현할 때조차 상대방의 기분과 수용 자세와 관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떤 형제나 자매에게 보다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라고 충고할 때도 그가 현재 여러 이유로 갖고 있을 수 있는 열등감, 상처감 등을 고려하지 않거나 표현을 지혜롭게 하지 않으면 그의 상처나 약점을 건드려 반발만 일으킵니다.
우리는 다 너를 위해서 말했다고 말하지만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게 됨으로 해서 갈등과 반발만 사게 되어 도리어 너를 위한 것이 그 사람의 맘을 상하게 해서 상처가 되고 고통을 주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면 그렇게는 안하는 것이 나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랑이 풍성하기를 그 사랑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지식과 총명이 풍성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노력한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이 내 삶 속에 이루어 주기를 위해서 받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3.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행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서 할 수 있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다 하고 살 수 없습니다. 다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분별하여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라고 합니다.
분별하라는 말은 시험해 보고 그 결과로 드러난 것을 인정하고 지키어 나가라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더욱 사랑하되, 지식과 통찰력을 동반한 사랑을 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연 어떤 것들이 진정으로 의미 있고 좋은 것들인지 분별하여 그것을 서로 갖추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서로를 사랑하되, 서로가 가져야 할 정말로 좋은 가치들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그것을 권할 수 있는 “지식과 통찰력”을 갖춘 사랑을 하기를 빌고 있습니다. 정말 의미 있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행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치 혼돈의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르는 것들 중에 정말로 의미 있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도 자식이 진실로 좋은 가치를 갖도록 돕기보다는 도리어 해가 되는 가치를 주입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직 성공하는 기술만 가르치고, 자기만 알도록 가르치고, 다른 사람 앞에 군림할 수 있는 기술만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식 사랑인지 살펴야 합니다.
긍정이 좋다고 하니까 무엇을 해도 긍정만 해주어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일입니다. 아니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까? 왜 사랑이 더해지고 왜 지식과 총명이 더해져야 하며 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그의 재판석에서 그들이 순결하고 허물없는 사람들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허물이 없다”는 말은 남에게 걸림돌이 되는 요소를 갖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극히 작은 자에게도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흠 없고 허물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야합니다. 의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힘입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그의 주권에 날마다 의지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게 되어 흠 없고 허물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가 맺은 의의 열매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여 서로 뜨겁게 그리고 지혜롭게 사랑할 때 결국 우리는 의의 열매를 드러내어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일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고 영영히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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