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이 2023년 2월8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 도착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가운데),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서방국가 정상들에게 러시아와의 전쟁에 필요한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AP/연합뉴스© 제공: 한겨레
“내가 러시아의 행동을 예측할 수는 없다. 이는 아주 신비롭고 은밀한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아마 열쇠가 있다. 그 열쇠는 러시아의 국익이다.” 1939년 나치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자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한 말이다. 처칠의 이 말은 국제관계에서 ‘러시아 수수께끼’라는 말을 만들어낸 계기가 됐다. 기존 국제질서를 흔들기도 하고 혹은 위기에 빠진 국제질서를 복원하는 러시아의 역할을 지칭한다. 처칠의 지적처럼 러시아 행동의 근원은 국익이고 그 국익에서 세력권 확보는 핵심이었다. 독일과 불가침조약으로 동유럽을 분할 점령하고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침략한 나치 독일을 패망시켜 동유럽 전체를 장악한 것이 대표적이다.
러시아가 세력권에 집착하는 것은 넓은 영토를 전제로 하는 특유의 지정학 때문이다. 지리적 장벽이 없는 유라시아 내륙에 자리잡은 러시아는 고대부터 외부세력의 침략에 시달렸다. 고대와 중세 때는 스키타이·훈·투르크, 몽골 등 초원유목 세력, 근대 이후에는 리투아니아-폴란드, 스웨덴,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서유럽 세력의 침략을 받았다. 넓은 개활지에 있는 러시아는 주변의 적을 제압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는 팽창주의가 숙명적인 안보 대책이었다. 주변의 적들을 제거하는 한편 산맥, 사막, 강 등 자연적 방벽을 확보하는 데까지 팽창을 추구했다. 적의 침략을 막는 자연적 방벽 확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러시아 안보의 제일 원칙인 ‘전략적 종심’의 확보에 필수적이었다.
러시아에 ‘영토 확장’은 숙명적인 안보 대책
전략적 종심이란 모스크바 등 중심에서 국경까지의 거리이다. 깊은 전략적 종심은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침략을 막아냈다. 침략군들은 러시아 중심에 도착하는 과정에 보급선이 길어지고 지쳐서 러시아의 반격 앞에 맥을 못 쓰고 퇴패했다. 이런 러시아에 우크라이나는 자신의 기원과 성립, 팽창에서 핵심적인 지역이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국익에 따른 세력권 회복 전쟁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성격과 동인이 있다. 첫째는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자결을 짓밟는 제국주의적 침략이면서, 소련 붕괴 이후 동쪽으로 밀려오는 서방 세력권과의 대결이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의 팽창 과정에 빚어진 오랜 역사적 알력과 민족분쟁 성격이다.러시아의 기원은 서기 900년대에 우크라이나 드레프르 강변에 동슬라브족이 세운 키예프공국이다. 988년 키예프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은 크림(크름)반도 남서단 헤르소네스의 세인트블라디미르 성당에서 동방정교회 세례를 받았다. 이는 슬라브 문명의 정체성을 확보한 기원이었다. 모스크바 북쪽을 넘어 발트해까지 확장했던 키예프공국은 13세기 말 몽골의 침략으로 망했다. 슬라브족의 중심은 키이우(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1271년 모스크바에 세워진 모스크바대공국은 1480년 몽골의 지배를 종식하고 독립한 뒤 러시아라는 나라로 새롭게 태어났다. 몽골의 킵차크한국이 물러난 뒤 우크라이나는 가톨릭 세력인 리투아니아대공국,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왕국에 의해 17세기 후반까지 지배받았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다른 서방 지향 정체성을 갖게 된 계기이다. 러시아는 1667년 폴란드와 전쟁해 키이우 등 드네프르강 동쪽 지역을 차지했다.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대제 때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합병했다. 우크라이나는 풍부한 곡물, 석탄 등 광물자원, 편리한 수운 등으로 19세기 러시아 산업혁명을 거치며 산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러시아가 새로 확장했던 돈바스 등 동부 지역의 석탄 등 광물자원, 크름반도 등 남부 지역의 해운과 교역이 연계되면서 경제권도 확장됐다. 크름반도와 동부 돈바스에 러시아인이 주로 살게 된 배경이고, 우크라이나는 수많은 이민족이 모여 사는 민족과 인종의 도가니가 됐다.
‘친러’에서 ‘반러’까지 정체성 혼재된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내 민족 알력 잠재성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커졌다. 우크라이나는 제1차 대전 뒤 잠깐 국제적으로 완전히 공인되지 않은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다가, 러시아혁명 뒤 소련에 다시 합병됐다. 현재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시아 지역의 전부 혹은 일부는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과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등에 속해, 우크라이나 내에서 가장 반러시아·친서구 지향이 강하다. 갈리시아 지역은 제2차 대전 때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나치 부역 파시스트 정권의 주축이었다. 나치의 게슈타포 무장 친위대에는 갈리시아 출신 자원병으로 정식 사단이 조직돼, 유대인·폴란드인·러시아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갈리시아의 파시즘은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의 한 원인으로 러시아가 지목하는 네오나치 운동의 근원이기도 하다. 제2차 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서남부의 자연적 방벽이 되는 카르파티아산맥 서쪽 자락까지 점령했다. 이로써 갈리시아 지역을 대부분 합병해, 현재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을 넓혀줬다. 또 1954년 소련에 최고의 전략적 요충인 크름반도도 넘겨줬다. 소련이 만들어준 이 영역은 소련 해체 뒤 우크라이나의 국경선이 됐다. 문제는 이 영역 안에 극단적인 반러시아 세력부터 인종적, 언어적으로도 러시아 정체성을 가진 세력까지 혼재했다는 것이다.2012년 7월 조사에 따르면, 18살 이상 성인 인구에서 모국어는 50%에게 우크라이나어, 29%는 러시아어, 20%는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두 개 모두였다. 서쪽으로 갈수록 우크라이나어 사용자가 많고 동쪽과 남쪽으로 갈수록 러시아어 사용자가 많다.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 다수가 러시아를 형제 나라로 생각했다. 우크라이나 주민의 절반 이상이 국내외 러시아인과 친인척 관계이다.
독립 초기 우크라이나는 주민 집단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다민족 다언어 연방국가를 지향했다. 1991년 12월 독립 국민투표에서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인 동부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 83.9%의 찬성률이 나온 데서 드러난다. 하지만 갈리시아를 중심으로 서부 지역에 뿌리 깊은 반러시아·친서방 정서는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경제공황 앞에서 증폭됐다. 우크라이나 경제는 사실상 통합됐던 러시아와 분리되고, 소련 시절에 시장 가격 이하로 제공하던 값싼 석유와 가스가 사라지자 붕괴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서방 쪽을 지향하는 세력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2004년 대선에서 승리한 친러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을 무너뜨린 오렌지혁명은 그 갈등을 증폭했다.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는 야누코비치 지지 대회를 여는 등 오렌지혁명을 쿠데타라고 비난했다. 독일 통일 때 미국 등 서방이 당시 소련에 약속했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진 금지가 깨지면서, 우크라이나 문제는 2014년 들어 결국 변곡점을 넘고 말았다.
트럼프 미 대통령, 우크라이나에 적극 군사지원
대통령에 다시 당선된 야누코비치 정부가 2013년 나토 가입의 문턱인 유럽연합 가입을 시도하다가 철회하자 키이우 등에서 이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정권이 붕괴했다. 유로마이단혁명이라 부르는 이 사태 때 빅토리아 뉼런드 당시 미국 국무부 유럽·유라시아 담당 차관보가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에게 야누코비치의 이후 대안에 소극적인 독일 등 유럽을 거칠게 욕하는 대화가 공개돼, 미국이 개입한 의혹이 커졌다. 유로마이단혁명 이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어를 공영어에서 제외하는 등 노골적 반러시아·친서방으로 돌아섰다.
결국 러시아는 2014년 3월 특수부대 등을 동원해 크름반도를 점령했고, 90%인 러시아계 주민도 이에 호응해 주민투표에서 러시아로의 합병에 찬성했다.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도 러시아 지원을 받는 세력들이 각각 ‘도네츠크인민공화국’ ‘루한스크인민공화국’으로 분리독립을 선포해,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내전에 들어갔다. 우크라이나 쪽에서는 ‘반테러작전’이라 명명하고는 극우 민병대가 주도적으로 내전에 참가했다. 네오나치 민병대인 ‘아조우 대대’는 이 내전에서 연대, 여단, 부대로 규모가 커졌다.
독일과 프랑스가 나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함께 2014년 9월, 2015년 2월 각각 민스크협정 Ⅰ·Ⅱ를 체결하고 즉각적 정전과 돈바스 지위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 협정들의 핵심은 돈바스 지역 주민 의사에 따른 고도의 자치 부여였다. 양쪽 모두 정전을 지키지 않은데다 돈바스의 지위를 보장할 아무런 조처도 없어 협정은 무력화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부 등 유로마이단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는 정권 기반인 반러시아 주민층이 반대하는 민스크협정에 따른 돈바스의 고도 차지를 허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돈바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우크라이나와 미국 등 서방 사이의 경제·안보 협력도 강화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탄핵 사태까지 몰고 온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그 부산물이다. 2019년 7월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전화해, 차기 대선 경쟁자인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아들 헌터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가스회사의 로비스트로 근무한 경력을 수사하라고 촉구했다. 트럼프는 당시 미국이 진행하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으로 압박했다. 이 사건은 유로마이단 이후 긴밀하게 얽혀가던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관계를 말해준다. 미국은 2014년 이후 2021년까지 25억달러의 군사지원을 했다. 그중 10억달러가 2019~2021년 이뤄졌다. 이런 군사지원의 대부분은 돈바스 전쟁에 임하는 우크라이나 군전력 강화에 투입됐다. 러시아가 2021년 상반기부터 돈바스 등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 병력을 구축하다가 결국 2022년 2월24일 ‘돈바스 해방’ ‘탈나치화’ ‘비무장화’를 명분으로 하는 ‘특별군사작전’이라는 침공을 감행한 배경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2022년 4월 한국으로 피란 온 고려인 나탈리아 서(35)에게 이 전쟁의 시작은 2월24일이 아니라 자신이 살던 크라스니루치에 우크라이나군의 포격이 쏟아진 2월18일이다. 경기도 안산의 고려인 마을에서 일종의 난민으로 지내는 서씨는 앞서 몇 년 동안 진행된 돈바스 내전과 달리 그날의 포격은 피란을 가야만 하는 전면적 전쟁으로 다가왔다. 서씨를 비롯한 돈바스 지역의 적지 않은 주민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불분명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팽창주의, 서방과 러시아의 세력권 다툼, 우크라이나 내부의 민족 알력이라는 세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하나 확실해진 것은 이제 우크라이나 민족화와 국민국가화에 따른 독립이 돌이킬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완승해도 우크라이나가 별개 국가로 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됐다. 또 하나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계 주민 지역 역시 별도 지위 부여 없이 과거처럼 우크라이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확실해진 사안을 놓고 타협하는 협상으로만 이 전쟁을 종결지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안보 우려 모두를 해결하는 우크라이나 중립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계 지역의 지위 해결 등을 둔 종전안이 모색돼야 한다. 전쟁 1년이 다가오면서 이런 현실을 인정하는 목소리가 서방, 우크라이나, 러시아 모두에서 나오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