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를 우리는 간증이라 한다. 본문은 바울의 간증이다. 복음도 이야기 형태로 증거될 때 잘 증거될 수 있다. 특히 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을 잘 증거할 수 있다. 나의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가 될 때 힘 있게 증거될 수 있다.
간증은 세 가지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하며, 변화된 내용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오직 예수만 드러내야 한다. 그럼 잘 전달된다. 자기 간증이 정리된 것은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벧전3:15). 과거 이야기, 예수님 만난 이야기, 변화된 이야기, 이게 간증의 삼 요소다.
바울은 자기소개하는데 자기 자랑이 없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으며 얼마나 율법에 열심히 했는지 간단하게 묘사한다(빌3:3-6). 자기의 허물을 더 많이 이야기한다. 성도들을 핍박하고 결박하여 가뒀던 것은 제사장들이 알고, 얼마나 악질이었는지 다메섹까지 가서 성도들을 잡아 가두려 했다는 것은 너희들이 증인이다. 그리스도 이전에 얼마나 헛된 인생, 망가진 인생이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4, 5).
‘변명’(1)은 ‘변론’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변명은 자기중심, 자기를 드러내는 말이고, 변론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맨날 변명한다. 그래서 나를 공격하면 변명한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밖에 없다. 공격받아도 예수님 중심이다. 지금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데도 자기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그 와중에 기회를 얻어 예수님을 전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엎드려졌다는 것은 거의 기절이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을 때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밧모섬에서 요한은 교회 사이로 다니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보았다(사6:1-3). 다 같은 모습을 보고 다르게 묘사한 것이다. 우리가 예배 기도 전도 중에 예수님을 만나면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된다.
공부나 연구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체험적인 만남이다. 지금 예수를 믿어도 흐릿하게 믿는 것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간절함이 있으면 만나 주신다. 지금 교인들은 세상에 대해 간절함은 많은데 예수님에 대해 간절함이 적다. 바울이 변화되었던 이유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간증해야 한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한다. 이는 예수님을 만난 자의 고백이다. 예수님을 만나야 전할 수 있다.
마지막은 자기 변화다. 예수님을 만났는데 빛이 얼마나 강했는지 앞을 못 보게 되었다. 볼 수 없어서 남의 손에 의지하여 다메섹으로 끌려갔다. 지금까지 그는 자기 뜻대로 살던 존재였는데 이제는 끌려다닌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끌려다니는 인생이 된다.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에 대한 눈이 가려질 때가 있다. 돼지는 목뼈에 관절이 없어서 땅만 보는 구조다. 그런데 뒤집힌 돼지는 하늘을 볼 수 있다. 우리도 맨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만 생각한다. 너무 안타까워서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이나 어려움, 감당 못 할 시험으로 뒤집어 버리실 때가 있다. 그래서 하늘의 것을 구하면 살게 된다(골3:1, 2).
세상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산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맹목적으로 사는 것이 신앙이다.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게 중요한가. 하나님만 보이는 것이 복이다. 사라질 헛된 것에 인생을 거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아무것도 안 보일 때 바울은 기도했다(9:11). 본다고 할 때는 핍박자로 살다가 안 보이니 기도한다. 이제까지는 자기 인생을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끌려다니는 인생을 산다.
내가 결정하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상식이라 하는데 사명은 이해 납득 공감이 안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엔 상식이 없다. 차원이 달라서 그 사명에 순종하고 나가면 하나님 수준의 인생을 살 수 있다. 바울이 지금 그것을 경험한 것이다.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 것이 복이 아니다. 베드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때 예수님과 부딪히고 사탄 짓을 한다. 남이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때 사명자의 삶을 살고 순교자의 삶을 살게 된 것(요21:18). 이것 때문에 베드로가 위대해진 것이다. 스스로 원하는 대로 다녔으면 망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 밝힘증이 다 사라지고 주만 보면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원래 다메색에 가는 목적은 크리스천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장소에 갔지만 목적과 의미가 달라졌다. 순종은 항상 스텝 바이 스텝이다. 하나님께 구할 때도 월용할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이다. 한 달 치를 구하면 한 달 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하루분을 주신다. 그걸 순종하면 그다음이 나온다.
이렇게 살면 간증이 넘쳐난다. 당시는 유대인들로부터 쫓겨가는 변방으로 보였지만, 이방인의 사도로 순종하니 온 인류를 위해 복음의 문을 연 사람이 되었다(21). 어려움과 막힌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훨씬 더 넓은 곳으로 인도하신다. 바울은 이 땅에 살면서 보좌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우리의 삶 속에도 준비된 간증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