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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조창나루터 원문보기 글쓴이: 김영아
가곡의 역사는
고려 말기에서 비롯되는데,
양금신보(梁琴新譜)에 의하면
가곡의 원형인 「만대엽(慢大葉)」·「중대엽(中大葉)」·「삭대엽(數大葉)」이
모두 고려시대 음악인 「정과정(鄭瓜亭)」 삼기(三機),
즉 만기(慢機)·중기(中機)·급기(急機)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만대엽이 처음 보이는 악보로는
1572년에 판본으로 간행된 안상(安瑺)의 금합자보(琴合字譜)』인데,
그 뒤 1610년의 『양금신보』,
그리고 『양금신보』를 모사한 『대악후보(大樂後譜)』,
1620년경의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 등에도 「만대엽」이 실려 있다.
영조 때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의하면,
당시에는 「만대엽」이 너무 느려서,
사람들이 싫어하여 없어진 지 오래라고 한다.
「만대엽」의 쇠퇴와 더불어 「중대엽」이 대두하게 된다.
「중대엽」(일명 心方曲)이 최초로 보이는 악보는 『양금신보』이고,
그 이래로 수많은 악보에 수록되어
조선 말기 고종 때의 『삼죽금보(三竹琴譜)』에까지 보인다.
「만대엽」이 평조(平調)의 곡이었던 것에 비하여
『양금신보』에서 「중대엽」은
평조, 우조, 평조계면조, 우조계면조의 네 가지로 나타난다.
이러한 「중대엽」은
뒤에 1680년경의 『신증금보(新證琴譜)』와
1724년의 『한금신보(韓琴新譜)』 등에서는
「평조중대엽」 제1·제2·제3,
「우조중대엽」 제1·제2·제3 등과 같이
각각 1·2·3으로 곡수가 증가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중대엽」이 「만대엽」과 「삭대엽」보다도
중요한 성악곡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것은 『양금신보』의 기록, 즉 “「삭대엽」·「영산회상」 등은
무용곡으로 사용되므로 수록하지 않았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그 뒤 「중대엽」은 「만대엽」처럼 점차로 폐절되는데,
『삼죽금보』에서는 이미 「중대엽」의 장단 모습을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삭대엽」은 1620년의 『현금동문유기』에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악보에서는
「우조삭대엽」과 우조계면조인 「사조삭대엽(斜調數大葉)」이
한 곡씩 기록되어 있으나,
약간 후대에 속하는 『증보고금보(增補古琴譜)』에는
우조와 평조 「삭대엽」이 각각 두 곡,
그리고 계면조와 평조계면조의 「삭대엽」이 각각 한 곡씩 있어서,
발전된 모습을 처음 보여준다.
그 뒤 1680년경의 『신증금보』에 이르면
네 가지로 조성된 「삭대엽」이 모두 1·2·3으로 증가되고,
다시 1728년에 간행된 가곡의 사설본, 『청구영언』에는
새로 「농(弄)」·「낙시조(樂時調)」·「편수대엽(編數大葉)」과 같은
변화형 삭대엽이 등장한다.
그리고 네 가지 조도 서서히 단순화되어
우조와 우조계면조 두 가지가 주로 쓰이게 된다.
「삭대엽」은 조선 후기에 더욱 발전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1876년의 『가곡원류』에는
전에 없던 「중거(中擧)」·「평거(平擧)」·「두거(頭擧)」가 보이고,
「얼락(乻樂)」·「얼편(乻編)」이 추가되었다.
한편, 「만대엽」과 「중대엽」에서는 구분하지 않던
남창 가곡과 여창 가곡의 구별도 생겼고,
여러 곡들이 차츰 한 바탕을 이루어 연창(連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삭대엽」은 조선 후기부터
선율적으로 관계가 있는 여러 곡이 하나의 노래모음곡을 이루었고,
가곡으로 불리게 되어 오늘에 전한다.
※ 만·중·삭의 삼조(三調)
만대엽 (慢大葉)
국악 가곡의 원형 가운데 아주 느린 곡.
현행 가곡의 모체로 알려진 조선 성악곡의 하나로,
고려 향악곡인 <정과정>의 삼기곡(三機曲)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점차 빠른 노래와 악곡을 좋아하게 되면서 17~18세기에 없어졌다.
중대엽 (中大葉)
조선 중기를 대표하던 성악곡.
사설은 현재 전창되고 있는 가곡과 마찬가지로
시조시(時調詩)를 쓰고 있다.
많은 고악보에 <중대엽>이 전해지고 있지만,
연주전통은 이미 150년 전에 끊어졌다.
<중대엽>의 구성은 가곡처럼
5개의 장(章)과 여음(餘音)으로 짜여져 있는데,
흔히 <심방곡 心方曲>이라고 불리던
평조중대엽의 사설과 장별(章別) 구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장) 오ᄂᆞ리 오ᄂᆞ리쇼셔
(2장) ᄆᆡ일에 오ᄂᆞ리쇼셔
(3장) 졈그디도 새디도 ᄆᆞ라시고
(4장) 새라난
(5장) ᄆᆡ양양식에 오ᄂᆞ리쇼셔
(여음) 사설 없음
<중대엽>의 사설배치는 위와 같이 오늘날의 가곡과 같다.
뿐만 아니라, 그 장단·길이도 가곡과 같아서,
≪양금신보 梁琴新譜≫에 의하면
1장(章:㫖라고도 함.)이 32박,
2장이 27박,
3장(중여음 포함)이 53박,
4장이 27박,
5장이 48박이다.
그러나 유독 여음만은 가곡보다 1각이 많은 69박을 보여준다.
<중대엽>은 그보다 시대적으로 먼저 유행되었던
<만대엽 慢大葉>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곡,
즉 <삭대엽 數大葉>과 더불어 본래 세틀[三機]을 갖추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세 곡은 서로 그 형식과 사설이 대동소이한데
<만대엽>은 평조 1곡밖에 없었지만
<중대엽>은 평조 외에도 평조계면조·우조·우조계면조 등
네 개의 조로 다양하게 불렸다.
그 뒤 이 네 가지 <중대엽>은 다시 발달하여
평조중대엽 제1·제2·제3 등과 같이 많은 새로운 곡조를 파생시켰다.
그러나 이 때 평조중대엽 제2나 제3 등은
제1과는 1·2장만 다르고 나머지 부분은 동일한 선율을 쓰고 있다.
한편 본래 성악곡이었던 <중대엽>이
거문고를 즐겨 타던 옛 선비의 기호 때문에
흔히 거문고 독주용으로 노래 없이 연주되었다.
그에 따라서 차차 가사도 탈락되었으며,
장단과 박자도 허물어져서,
후대의 ≪삼죽금보 三竹琴譜≫에는
다스름[調音]과 같은 기악곡으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성악곡이 언제부터
기악독주곡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고,
다만 <삭대엽>이 대두하고
사람들이 <삭대엽>을 <중대엽>보다 즐겨 부르게 되면서
차차 <중대엽>이 불리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는 대엽조(大葉調)가 있다.
그 가운데 만·중·삭의 삼조(三調)가 있고,
본래 심방곡(心方曲)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慢)은 너무 느려서 사람들이 싫어하여 오래 전에 없어졌고,
중(中)은 조금 빠르지만 역시 좋아하는 사람이 드물고,
지금 쓰이는 것은 삭대엽이다.”
<중대엽>의 악보가 최초로 보이는 고악보는
1610년의 ≪양금신보≫이다.
그러나 가장 고형(古形)의 <중대엽>으로 보이는 악보는
1620년의 ≪현금동문유기 玄琴東文類記≫에 보인다.
그 밖에 <중대엽>을 수록하고 있는 고악보는
≪증보고금보 增補古琴譜≫·
≪신증금보 新證琴譜≫·
≪백운암금보 白雲庵琴譜≫·
≪신작금보 新作琴譜≫·
≪한금신보 韓琴新譜≫·
≪어은보 漁隱譜≫·
≪낭옹신보 浪翁新譜≫·
≪유예지 遊藝志≫·
≪삼죽금보≫와 연세대학교 소장의
≪금보 琴譜≫ 등이 있다.
한편 <중대엽>의 사설은
≪양금신보≫·
≪낭옹신보≫와 더불어
≪고금가곡≫·
≪청구영언≫·
≪가곡원류≫와 연세대학교 소장
≪금보≫ 등 사설본에 별도로 전한다.
삭대엽 數大葉
국악 가곡의 원형 가운데에 가장 빠른 곡.
우조(羽調), 계면조의 두 음계가 있고,
초삭대엽,
이삭대엽,
삼삭대엽,
편삭대엽의 네 가지 종류가 있다.
※ 옛 악보 해설
금보(琴譜. 1572) : 금합자보(琴合字譜)
조선선조 5년 안상이 편찬한 1책의 악보로
일명 안상금보(安瑺琴譜), 금합자보(琴合字譜)라고도 한다.
편장 안상이 명종 16년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 되어
악사 홍선종(洪善終)·악공 허억봉(許億鳳)·이무금(李無金)과 함께
이 악보를 편찬하고 선조 5년에 책을 낸 것이다.
선조 5년(1572)에 안상이 편찬한 거문고 악보로,
목판본으로 출판된 악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책의 머리글에는 안상이 1561년 장악원의 첨정으로 근무하면서
악공을 시험하는 책에 가락 쓰는 법과 술대 쓰는 법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악사 홍선종에게 합자보를 개수하게 하고
악공 허억봉에게 적보를,
악공 이두금에게 장구보를 만들게 하여
이 악보를 편찬하였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은 저자의 머리글에 이어 금도와
낙시조평조, 우조평조, 평조계면조의 산형 및 집시도,
박보, 장구보, 안공법 등의 그림과 설명으로 구성되었다.
둘째 부분은 정석가, 한림별곡, 감군은, 여민락 등 9곡으로 구성되었다.
셋째 부분은 당비파도, 비파탄법, 조현법의 도설 및
비파만대역의 악보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이전의 여러 가지 악보를 포함하고 있어
『시용향악보』와 더불어 가장 기본적인 악보로 취급되고 있으며,
당비파 음악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로 평가된다.
거문고의 오음약보·합자보 및 육보(肉譜)와 노래와 사설을 적고
피리의 오음약보 및 육보·장고악보를 곁들여서 총보(總譜)를 만들었다.
이 악보에는 <만대엽(慢大葉)>, <정석가(鄭石歌)>, <북전(北殿)>,
<사모곡(思母曲)> 같은 고가요(古歌謠)가 실렸는데,
조선후기에 크게 성했던 가곡의 실마리가 되는
<만대엽>, <북전>의 최고 악보로서
조선 전기음악과 후기음악을 비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전형필 소장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8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양금신보 (梁琴新譜.1610)
1610년 양덕수의 금아부, 현금아부, 만대엽 등을 수록한 악보.
거문고악보.1책 26장(52면). 목판본.
이 금보의 끝에 적힌 발문에 의하면,
임진왜란 와중에서 전라도 남원에 피란왔던 양덕수가
그 당시 임실현감으로 있었던 김두남(金斗南)의 도움으로
악보를 만들어 출간하게 되었는데,
편찬자의 성을 따라 ‘양금신보’라는 이름으로
임실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금아부(琴雅部)·현금향부(玄琴鄕部)·
현금평조산형(玄琴平調散形)·우조산형(羽調散形)·집시법(執是法)·
조현법·안현법(按絃法)·타량법(打量法)·합자법으로 구성되었으며,
둘째 부분은 만대엽(慢大葉)·북전(北殿)·중대엽(中大葉, 속칭 心方曲 :
羽調 羽調界面調 平調 平調界面調)·조음(調音, 속칭 다ᄉᆞ림)·감군은(感君恩)
이상 8곡과 발문으로 구성되었다.
거문고의 악곡들은
합자보(合字譜)와 육보(肉譜)의 두 가지 기보법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합자보의 우측에 노래의 가사 또는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의
5성(五聲)이 기록되었다.
이 악보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임진왜란 전후의 한국음악사 연구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음악자료의 하나이다.
첫째, 이 금보는
≪금합자보 琴合字譜≫에 없는 <만대엽>과 <중대엽>의
악곡을 골고루 갖추었으므로
17세기 전후의 가곡사연구에 매우 중요한 다리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고악보에 전하는
<중대엽>의 평조·우조·평조계면조·우조계면조 이상 네 가지 악조는
조선 전기 이후 악조의 역사적 변천연구에
결정적인 음악자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셋째, 목판본으로 인쇄되었으므로
필사본으로 전하는 다른 악보보다 세상에 널리 퍼졌고
따라서 후세의 거문고 연주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1959년 통문관(通文館)에서
이병기(李秉岐)의 서문과 이혜구(李惠求)의 해제를 실은
영인본이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보다 널리 소개되었다.
이겸로(李謙魯)가 소장하고 있다.
대악후보(大樂後譜. 1759)
조선 영조 35년, 1759년에 서응명(徐命膺)이
세조 때의 음악을 모아 편집한 악보.
총 7권 7책으로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보물 제12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조 대의 문신인 서명응은 역학 등에 통달했으며
실학 연구에 전력한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서명응 자신은 고사신서, 본사, 소사십이집, 보만재총서 등을 저술했으며,
서명응의 동생인 서명선이 식목실총을,
훗날 아들인 서호수가 해동농서를,
손자인 서유규는 임원경제제지를,
손자 며느리인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를 짓는다.
이런 서명응이 그동안 내려져오던
우리나라의 기보법과 악보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
우리나라의 풍류와 음악이 가장 발전했던 시기를
세종대와 세조대 2대 왕 시기로 꼽게 되었다.
이에 두 시기의 음악에 대한 모든 자료와 내용을
전국에서 모으고 분석하여
세종대의 음악을 세종조악(世宗朝樂)이라 하여
대악전보(大樂前譜) 9권으로 편찬하였고,
세조대의 음악인 세조조악(世祖朝樂)을
대악후보라 하여 7권으로 편찬한 것이다.
하지만 세종조의 대악전보는 청일전쟁이 일어나던
1894년에서 1895년 사이에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세조대의 음악인 대악후보 7권만이 남아 전하고 있다.
현금동문유기 (玄琴東文類記. 1620)
1620년 이득윤이 당시까지 전해진
거문고 관련 기록을 집대성한 책.(. 거문고악보) 1책. 필사본.
이 악보의 내용은 크게 세가지로 구분된다.
즉, 첫째부분은 역대명현의 거문고에 관한
명(銘)·부(賦)·기(記)·시·서를 모아 엮은 것이고,
둘째부분은 ‘고금금보문견록(古今琴譜聞見錄)’의 제명 아래
안상(安瑺)·조성(趙晟)·박근(朴謹)·박수로(朴壽老)·허사종(許嗣宗)·
이세준(李世俊)·무안수(武安守)·김종손(金從孫)·이세정(李世鼎)의
악보를 수록하였다.
그리고 셋째부분은
‘고금금선수지문견록(古今琴善手指聞見錄)’이라 하여,
무안수와『악학궤범』을 비롯하여
「대엽」·「어아음(於兒音)」·「북전(北典)」·「평조대엽」·「대엽」·
「평조북전」·「평조중엽」·「북전(北殿)」·
「삭대엽」·「우조삭대엽」·「사조삭대엽(斜調數大葉)」·
「조현음」,「낙시조 만대엽」·「평조북전」·
「평조소엽(平調小葉)」·「평조 장대엽」·「조현곡(調絃曲)」등의
악곡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 실린 악곡들은 모두 정간 없는 합자보로 기보되어 있다.
조선 중기 거문고 관련 기록을 집대성한 이 책은
『양금신보』·『금보신증가령』·『백운암금보』 등과 함께
17세기 한국음악연구에 귀중한 음악사료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삼죽금보 (三竹琴譜)
고종 연간(추정) 작자 미상의
「보허사」 · 「평조영산회상」 · 「장진주」 등을 수록한 악보.
『삼죽금보』는 사본 1책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간행 연대는 악보의 서문 끝에 적혀 있는 몇 가지의 단서로
대개 고종 때로 추정하고 있다.
즉, 서문의 끝부분에는
“성상즉조 원년 신축 중동 완산인 이승무 서
(聖上卽祚元年辛丑仲冬完山人李昇懋序)”라고 적혀 있으며,
이 밖에 명금(名琴) 홍기후(洪基厚)의 제자 이승무가
거문고 가락 및 연주법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이 악보를 편집한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후대인이
이 악보 서문의 한쪽에 ‘경종 원년 신축(1721)’이라는 기록을 적어 넣어,
일부에서는 이 악보의 설립 연대를 경종 원년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삼죽금보』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정조대의 악보인 『유예지』에 비해 오늘날 음악에 가깝기 때문에
간행 연대를 위로 소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성상 즉조원년’을 대개 고종 원년으로 해석하는 것이 통설이다.
한편, 이 악보의 이름을 『삼죽금보』라 한 것은
악보 내용 중에 ‘삼죽선생찬(三竹先生撰)’이라는 문구에서 비롯된 것인데,
삼죽선생이 누구인지는 미상이다.
그리고 이 책의 첫장 및 아홉째 장에는 조병희(趙炳喜)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원 소장자가 곧 조병희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다가 1963년 국문학자 이병기(李秉岐)가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했고,
현재는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있다.
『삼죽금보』의 기보법은 16정간보에 육보(肉譜)로 되어 있으며,
수록 내용은 서(序)·범례·조현(調絃)·「보허사」·「여민락」·「본환입」·
「소환입」·「영산회상(靈山會上) 계면조-중영산·소영산·가락들이
·환입·염불·타령·군악(우조)」·「평조영산회상(平調靈山會上)」·
「우조타령(羽調打令)」·「계면가락제이(界面加樂除耳)」·「군중취타(軍中吹打)」·
「노군악(路軍樂)」·「가군악(家軍樂)」·「소보허사-굿 보허사(우조)」가 있다.
『삼죽금보』는 다량의 거문고곡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
정조 때에 출판된 악보인 『유예지』의 음악과
오늘날 음악 사이의 다리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음악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 악보에는 음악 연주에 따르는 상세한 주서(註書) 및
장단과 박자에 따른 규칙적인 구점(句點) 표시,
원곡(原曲) 이외에 변주되는 여러 가지의
‘별(別)가락’ 표기 등이 상세하게 첨부되어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수록 내용 중에 「무녀시조」·
「월곡」 등의 악보가 포함되어 있어
시조·잡가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신증금보 (新證琴譜. 1680)
1680년 신성의 「평조 중대엽 1·2·3」 ·
「평조 삭대엽 1·2·3」 등을 수록한 악보. 거문고악보. 1책.
원명은 ≪신증가령 新證假令≫이다.
이 악보는 원소장자인 이혜구(李惠求)에 의하여
≪현금신증가령 玄琴新證假令≫으로 학계에 소개된 적이 있어
일명 ≪현금신증가령≫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금보신증가령≫이라고도 불린다.
원본은 6·25전쟁 때 없어지고
현재는 사본이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있다.
≪신증금보≫의 내용은
거문고 연주법과 거문고에 대한 총설(總說) 및
육보(肉譜)와 합자보(合字譜)의 기보법을 이용한 거문고 악보,
그리고 신성이 직접 쓴 지문(識文)을 싣고 있다.
총설 부분은 수지명(手指名)·지법(指法)·현법(絃法)·탄법(彈法)·
합자법(合字法)·안법(按法)·현사대소법(絃絲大小法)·현금도(玄琴圖)·
오음(五音)·십이율칠성도(十二律七聲圖)의 순으로 수록하는 한편
≪악학궤범≫의
‘율려격팔상생응기도(律呂隔八相生應氣圖)’의 내용을 옮겨 실었다.
한금신보 (韓琴新譜)
조선후기 한립의 「만대엽」 · 「평조중대엽」 ·
「평조북전」 등을 수록한 악보. 거문고악보.
세로 29㎝, 가로 22.5㎝. 1책 54면. 한장본(韓裝本).
악보의 내용에 따른 편찬연대는
조선시대 영조·정조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 금보는 합자보(合子譜)에 구음(口音)을 병기한
기보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6행 종서로 되어 있다.
둘째면에서 여섯째면까지
거문고 및 거문고 조현법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 수록되어 있고,
일곱째면 이하에는
만대엽(평조:속칭 느ᄌᆞᆫ한닙)·
평조중대엽(平調中大葉 제1·2·3)·
평조북전(平調北殿:속칭 뒤뎐, 혹칭 後庭花 제1·2)·
평조삭대엽(平調數大葉 제1·2·3)·
우조중대엽(羽調中大葉 제1·2·3)·
우조북전(羽調北殿 제1·2)·
우조삭대엽(제1·2·3·4)·
평조계면조중대엽(제1·2·3)·
평조계면조북전(제1·2)··
평조계면조삭대엽(제1·2·3)·
우조계면조북전(제1·2)·우
조계면조삭대엽(제1·2·3·4)·
평조계면조역괘전·
평조삭대엽(李好善譜)·
보허자(步虛子:羽調八編)·보허자본환입(步虛子本還入:속칭 밋도드리)·
보허자삭환입(속칭 ᄌᆞᆫ도드리)·보허자제지(步虛子除指:속칭 가락더리)·
영산회상우조계면조·영산회상환입(再三還入可也:도드리)·
영산회상제지(가락더리)·
여민락우조(제1장)·
여민락우조(제2장)·
조음(調音:속칭 다ᄉᆞ림)·
조음우조·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이 악보의 편저자 및 연대에 대한 연구는
한명희(韓明熙)의 「한금신보해제」가 대표적인데,
한명희는 『한금신보』의 서문에 적힌 갑진년(甲辰年)을
『현금신증가령(玄琴新證假令)』과 『유예지(遊藝志)』의 사이에 드는
1724년(경종 4)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발문에 의하면
원저자는 한립(韓笠)이고
밀양에 사는 후손에 의하여 중수된 것이라고 한다.
『현금신증가령』과 『유예지』 시대의
거문고음악의 연주사를 연결시켜주는 데
귀중한 참고자료를 제공하는 이 악보는,
1966년 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이 진흥선(晉興善)으로부터
입수하여 현재까지 소장하고 있다.
증보고금보 (增補古琴譜)
조선후기 작자 미상의 「만대엽」 · 「북전」 · 「보허자」 등을
수록한 악보. 거문고악보. 필사본. 1책, 48장(98면).
이 악보의 본래 표지이름은 ‘금보’인데,
1977년 이혜구가 그의 「한금신보(韓琴新譜)의
우조삭대엽(羽調數大葉)」이란 논문에서
다른 금보와 구별하기 위하여 ‘증보고금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일제강점기에 수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악보의 편찬연대는 미상이지만,
이혜구에 의해서 『한금신보』 이전,
즉 17세기말경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거문고 악곡들은 합자보(合字譜)와 육보(肉譜)
이상 두 가지 기보법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며,
노래가사는 합자보 오른쪽에 적혀 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겠는데,
첫째 부분은 『양금신보(梁琴新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서 베낀 것이고,
둘째 부분은 이 금보만의 거문고악곡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부분의 내용은
집시법(執匙法)·조현법·안현법(按絃法)·타량법(打量法)·합자에 이어서
「만대엽(慢大葉)」·「북전(北殿)」·「중대엽」(속칭 심방곡(心方曲),
우조(羽調)·우조계면조(羽調界面調)·평조계면조(平調界面調))·「조음(調音)」·
「감군은(感君恩)」으로 구성되었고,
둘째 부분은 「삭대엽(羽調)」·「계면조」·「평조」·「계면조평조」·
「보허자(步虛子)」·「영산회상(靈山會相)」을 포함하였다.
《청구영언》(靑丘永言. 1728)
1728년(조선 영조4년) 김천택이 엮은 가곡집이다.
현존하는 시조집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고려 말 이래 시조 998수를 싣고,
끝에 가사 17편을 붙여 곡조별로 엮었으며,
이름을 알 수 있는 작가만도 140여 명에 이른다.
그런데 1948년 조선 진서 간행회에서 발행한 《청구영언》에는
시조 580수를 연대순으로 싣고 있으며,
유명씨(有名氏)의 작(作)은 앞에,
무명씨의 것은 뒤쪽에 실었다.
이를 진본이라 하며, 앞의 것은 흔히 대학본이라 한다.
진본이 원본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