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 / 고우 스님
“중도(中道) 알면 불교 다 아는 것”
無我는 대승에서 空이라 표현
"일체는 있다고 한다. 이것이 첫 번째 극단
일체는 없다고 한다. 이것이 두 번째 극단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中道)로 법을 설한다."
원시불교사상
부처님께서도 출가 전 많은 번민과 갈등에 괴로워했다.
모든 것은 자신이 하는 것이고
자신이 한 일로 인해 갈등하고 괴로웠던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부처님이 나중에 깨달은 것은 내가 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중도(中道)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때문에 불교는 중도(中道)로 행위 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중도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 인식하더라도 내가 달라 보인다.
탐욕에 빠진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내가 아니라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귀한 존재로서의 나를 알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개개인이 귀한 존재이고 자존 의식을 갖도록 인도한다.
자존의식을 갖게 되면 절대로 자신을 낮춰보지 않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의 내용이다.
가전연경에서의 중도(中道)
사람은 태어나서 괴롭게 살다가 늙어 죽는다.
아무데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부처이고 법이다.
십이연기가 바로 중도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매우 적합한 것으로
<가전연경>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양극단을 여윈 중도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설하기 때문이다.
남전 가전연경에서 가전연은 세존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정견이라고 하시는데
정견이란 어떤 것입니까?”
“가전연아, 이 세간은 다분히 유와 무의 둘에 의지되어 있느니라.”
여기서 바른 견해라는 것은 세간의 모든 편견인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를 모두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집멸도 사성제가 그러하고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그러하다.
사성제의 집은 바로 연기의 순관을 말하고 멸은 연기의 역관을 말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무엇이 있다거나,
무엇이 없다하는 변견에 집착하느냐 하면
이리저리 헤아리고 이것저것 구별하는 사량분별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는 사량분별에 의한 집착심을 버려서
모든 분별심, 생멸심을 떠난다.
즉 세간에서 보는 것은 분별심으로 보는 것이고,
부처님의 제자는 분별심을 떠나서 바로 보는 것이다.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면 마음이 청정한 것이고 진공이며,
마음이 청정한 상태로 생멸을 바로 보면 마음이 밝게 빛나는 것이고 묘유이다.
그러므로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곧 대승에서 말하는 진공묘유의 뜻과 상통하는 것이다.
“가전연아, 일체는 있다고 한다. 이것이 첫 번째의 극단이니라.
일체는 없다고 한다. 이것이 두 번째의 극단이니라.
가전연아,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의해서 법을 설하느니라.”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있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없으면서(非有非無)
있고 또한 없다(亦有亦無)는 것이니 이것이 중도의 참된 내용이다.
가전연경의 교학적 위치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오래되지 않은 때에 법에 대해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던 천타비구는 멀리 아난을 찾아가 법을 묻는데
아난의 답은 부처님이 옛적에 가전연에게 설한 법문이었다.
즉 <가전연경>의 있다거나 없다는 두 극단을 멀리 여의고,
생하거나 멸하는 것을 연기의 도리에 입각하여 올바로 관찰하는 것이
바른 견해라는 것이다.
공사상과 중도
불교를 말할 때 우리는 근본교리로 삼법인을 말한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 그것이다.
무상이란 변한다는 의미이며, 변한다는 것은 고정성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모든 존재에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아서
그로부터 일체의 집착과 번뇌를 여의게 되면 열반의 법열이 넘치는 열반적정으로 나가게 된다.
원시불교에서 중요시 되는 무아는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표현했다.
대승불교나 근본불교의 공통된 주요사상 가운데 하나가 이 무아사상, 공사상이다.
모든 공사상을 밑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색 이대로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색의 자성이 본래 공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을 공을 바람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바람은 모양을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통하게 된다.
이것이 중도이다.
공을 설할 때도 연기를 설할 때와 마찬가지로
십이연기의 순관설과 역관설 등 연기의 원형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 밖에 따로 공이 없고 공 밖에 따로 연기가 없으며,
공 이외에 따로 중도가 없고 중도 이외에 따로 연기가 없다.
부처님께서 근본적으로 깨치신 것이 중도이면서 팔정도이고
사성제이며 공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최초 설법인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이 할 말을 다 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중관사상
중관파는 인도대승불교의 한 학파인데 이것을 일으킨 시조는 용수보살이다.
그의 생존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150~250년으로 추정한다.
그가 주장한 공은 단순히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도 아니고,
도피와 체념에 사로잡힌 회의주의도 아니며,
결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무도 아니다.
그의 공 사상은 연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곧 연기하여 생겨나는 일체의 법은 고유한 본성 즉 자성이 없으며,
고정적인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고 설한 것이다.
중론에서 설하는 제일의제와 세속제의 내용은 이 뜻을 잘 설명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일체가 공하며 이러한 견지에서
제법을 관하는 것이 제일의제이다.
그러나 제법이 비록 공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연기하여 상대적인
세계가 성립하기도 하니 이같은 세간의 입장이 곧 세속제이다.
중론에서는 제일의제는 세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또 이 이제의 도리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깊은 불법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설하여,
공이 결코 단순한 무가 아님을 역설하였다.
곧 여러 인연으로 생한 법이 곧 공이며 또한 가명이며 또한
중도라고 설하여 중도의 뜻을 간명히 정의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진리인 공 가 중의 삼제는
후대 불교사상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론의 팔불중도를 보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 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용수보살이 중론을 지을 때 제일 첫머리에
이 게송을 갖다 놓은 것은 변견을 부수고 중도 정견을 펴기 위한 것이다.
대지도론
용수보살은 대품반야경 주석서인 <대지도론>에서 제법실상인 중도는
바로 두 견해를 멀리 떠나는 것임을 재차 강조하였다.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가 남음없이 멸한 제법실상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며,
항상 머물러 무너지지 않으며 번뇌를 청정하게 한다.”
그리고 대지도론에서 중점적으로 중도와 관련하여 논의되는 것으로 반야바라밀이 있다.
반야바라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반야바라밀이 중도임을 부연하고 있다.
반야바라밀은 실로 깨뜨릴 수도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으며
부처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모습이며 법의 자리요,
일체제법의 실상으로서 진여법계라는 것이다.
있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병이라면 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도 병이다.
유위와 무위를 잊어버린 데서 참다운 반야바라밀을 알 수 있고
중도를 바로 알 수 있다.
반야바라밀이란 이름조차도 무어라 표현할 수 없어서 부득이 이름 붙이기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참으로 양변을 여의고 양변을 완전히 융화하는 쌍차쌍조한 중도를
행하는 것이 실지의 반야바라밀이고 불교의 정법인 것이다.
정리=한기선 기자
출처 : 주간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