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47 2018-03-17
# 쟘쟘 곤지 곤지 짝짝꿍 찔르레미 훯훨 하오리다.
1950년 6.25 전쟁 때 ,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하고 (6월28일) 8월15일까지는 부산을 점령해서 남침 전쟁을 신속하게 종결지으려 했던 인민군이, 9월15일의 미군의 인천상륙으로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나는 지난 번 "성인놀이하다"(1403)에서 인민군 포로수용소 생활을 언급헸는데, 시실 난 인민군 전사가 아니면서 억울하게 포로생활을 하였다. 나는 당시 해주, 황해도 도립 도서관에서 일헸는데, 모든 전선에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이곳도 곧 미군과 국군이 쳐들어 올 것이니 당의 지령에 따라 도서관이 소장한 보물급 고도서들과 함께 후퇴명령이 내려지고, 나도 같이 북쪽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그러나 가족에게 알리고 가야겠기에 집으로 왔다. 그 날이 1950년 10월15일이었고, 시간은 저녁무렵이었다.
집에 오니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들이 다 있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큰 솥에, 곧 빨갱이 세상이 망할 것이니 그러면 이북 돈도 못 쓰게 될 것이니 집에 있는 이북 돈으로 몽땅 돼지고기를 사서 삶고 있다며, 다 삶아졌으니 어서 방에 들어가 먹자는 것이었다. 나는 방에 들어와서 아버지께 "아버지 나 지금 다시 가야해요 , 당원들 따라 북으로 가야해요. 나 작별인사 드리려 왔어요." 하니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실 뿐 말씀이 없으시고, 누나가 "안돼! 도만가!. 며칠만 도망쳐 있으면 좋은 세상 와!. 하는 것이었다. 아 그때 누나 말 처럼 도망쳤으면 지금처럼 이산 가족이 되어 북의 가족 그리움에 눈물 흘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 그렇지만 그 때 도망치지 않았기에 이산 가족은 되었지만 지금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 손자들과의 행복한 생활도 있다고 생각하면 좀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 내가 그 놈들 안 따라가면 혹시 무슨 보복이 있을지도 모르니 지금은 따라가고, 꼭 따라가다가 도망쳐서 올 테니 그 때까지 기다리세요" 하고 난 집을 나왔다. 그리고 몇 거름을 떼었을까. 아버지가 "노렌조야"하고 부르신다. 나는 돌아서 아버지께로 다시 오니 아버지께서 "노렌조야 그래 네 말대로 네가 꼭 돌아올 걸 믿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일 알 수 있니, 혹시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언제 어디서나 천주님 잘 공경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선 못 만나도 천당에선 꼭 다시 만날 것이니 명심할여라."
아 어쩌랴 그때 아버지의 말씀은 사실이 되었고, 나는 당원들을 따라가다가 도망을 쳐서 헤메다가 (, "내 생명을 구해준 십자성호"에서 언급) 집까지 몇시간을 남겨두고, 미군 흑인군인에게 잡혀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가족은 내가 북쪽 어딘가에 있는 줄 알고 날 기다리느라 1.4후퇘 때 피난도 안 나오고 북에 남아 결국 한많은 이산 가족이 되었다. 가족이 북에 남게 된 이런 사연은 돌아가신 김철규 신부님께서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해주본당에 갔다가 내 가족을 만났고 나를 기다려야 하니까 피난 못 나간다고 하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알려주어 알게되었다.김철규 신부님은 신부님이 차부제품을 받았을 때부터 귀염을 받았고, 사제품을 받고 해주본당 신부님일 때, 신학생이었던 최석호 신부님과 일주일을 같이 머믈었고,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영등포 본당 신부님이었던 신부님 집에 한 달간을 유숙하기도 했으니 참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서기 325년 콘스탄틴 로마황제의 명으로 320명의 주교들이 니케아에 모여서 제1차 공의회를 열고, 성자 그리스도가 성부보다 하위에 있다는 아리우스의 이단을 물리치고 삼위일체 교리를 선포한 공의회로서, 여기서 부활주일도 오늘처럼 지켜지도록 정했다는데, 나는 부활대축일이면 항상 공산 치하의 고난을 각오하고 북에 남은 가족을 생각한다. 가족과 헤어진지도 63년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천주님 잘 공경하고 착하게 살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되었고, 어쩌다가 이 나라가 남북관계도 억망이 되어 이산가족 상봉도 물 건너갔으니, 그래서 이제는 천국에서나 만난 날만 기다리게 되었고, 그 날은 우리가 세상 끝날에 육신이 부활할 때라야 이루어질 것이며, 그런데 육신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서 온 것이기 때문에 부활대축일이면 나는 유별나게 북의 가족을 생각하게 되는가 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죽으신후 묻히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성부 하느님과 함께 계시며 지상의 우리에게 성령을 나려 주시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갈 때, 성령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영원한 생명도 주신다고 나는 어려서부터 배워서 알고 있다.
또한 여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환영으로 본 것도 아니고, 간절한 회망사항에서 나온 이야기도 아니고, 어떤 상징도 아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후 제자들과 식사도 같이 하셨고 도마 사도는 예수님의 가슴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기도 하였으니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붙잡히시어 사형 당하시는 것을 보고 한 때 도망을 쳤으나, 주님의 부활후 예수부활의 증인이 되어 온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다가 모두 순교하지 않았는가. 특히 나는 사도 베드로가 박해가 두려워 로마를 떠나려고 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앞에 나타나시고 놀란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궈 바디스 도미네) 하니 예수께서 "네가 순교가 두려워 도망을 치니 내가 대신 또 한 번 죽으려 로마로 간다"하시니 베드로가 크게 후회하고 로마로 다시 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는 영화 "궈 바디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게 감동 자체다. 또한 사도 바오로께서도 자기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밖에 5배명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언하며(1코린토15장) 사도 중에 으뜸인 게파 베드로가 제일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막달레나가 제일 먼저 보았지만 그가 여자이기 때문에 복음사가들이 당시의 남존여비 사상때문에 복음서에 사실에 대한 언급을 안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우리 인간의 육신도 그리스도처럼 부활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즉 세상 끝날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그 때 모든 죽었던 육신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고대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은 믿었으나 육신 부활은 신화같은 이야기라고 안 믿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육신의 부활은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교리가 된다. 다만 부활한 우리 육신이 죽기 전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현성용 때나 부활하신 후의 모습같이 우리 몸이 "사기지은"(썩지않음, 빛남, 빠름, 사무침)을 가지고 부활하게 된다.(루가20-35) 구상 시인은 생전의 신자들을 위한 문학강연에서 이를 "영화된 육신"이라고 한 것을 기억한다.
나는 부활대축일이 되면 언제나 북에 있는 부모형제들을 생각하고 그리움에 미칠것 같을 때가 있지만 예수부활과 육신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이나 이별이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긴 하지만 장차 천국에서 꼭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그리움을 달래며 지금까지 살아올 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금년 부활대축일에도 아름다운 꽃으로 꾸민 제단에서 눈부시게 하얀 제의를 입고 본당신부님이 바치는 거룩하고도 장엄한 미사에 참예하면서 나는 아버지 어머니께 마음 속으로 속삭였다. "아버지 어머니! 이 세상에서는 못 만나도 이 못난 자식도 이제는 늙었으니 곧 천국에서 당신을 뵙게 될 것이고 그 때에는 나는 당신 앞에 벌거벗고 , "쟘쟘 곤지곤지 짝짝꿍 찔르레미 훨훨" 하며 아기 때로 돌아가서 재롱도 부려 보겠습니다." "아멘"
둔촌동본당 김형보 노렌조 (지벨라도 .강요한 신부님때 장위동 본당에서 일한 신자임)
첫댓글 건강히 잘 계시는 거죠?
근황이 궁금했었습니다.
흔적과 함께 노렌조 아버님의 좋은 글 추억을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저희 본당이 올해 10월 50 주년을 맞이 합니다.
놀러 오세요
한 체칠리아 자매님 고맙습니다. 혹시 자위동성당 50년사 만들면 저를 위해 한권만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자매님과 자매님 가정에 하느님의 사랑과 펑화가 충만하고 꼭 행복하시길 기도할게요. 김형보노렌조 할아버지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