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암 가는 길
만추의 계절에 길을 나섰다. 공직에 있다가 내년 1월 말 부로 퇴임을 앞두고 있는 작은 처남을 만나러 찾아간 것이다. 사실 그가 공직에 있는 동안 개인적인 부탁으로 사무실을 찾은 일은 없었으며, 오히려 주변의 청탁 요청을 거절하여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점심 식사 후 찾은 곳이 천진암(天眞菴)이다. 이 땅에 자생적인 천주교의 발상지에 대대적인 성당 건립을 위하여 그 터를 잡은 곳이다. 한옥 형태의 건물이 완성되면 세계적으로 큰 성당의 하나로 예상하고 있다. 한국 가톨릭 전래 300주년인 2079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이다.
천진암은 바로 한국 천주교회 신앙운동의 국내 최초 본거지(本據地)며, 우리나라 천주교회 발상지(發祥地)다. 성지 옛 터에는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복자 「정약종」 등 5위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의 묘를 모시고 있다.
특히, 「정약용」 선생은 이 젊은 시절에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를 총애하던 「정조」의 사후에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등의 영향으로 강진 땅에서 장기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세 번째 이 곳 성지를 찾게 되었다. 늦은 가을이 되니 계곡과 산 능선에 펼쳐진 단풍은 물론이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한가롭고 고즈넉한 풍광이 일품이었다. 일대를 돌아보고 햇살이 눈부신 묘소에 들려 참배 후에는 이들이 마시고 세수를 하던 빙천수(氷泉水)샘물을 시음하였다. 이 일대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던지며 사랑과 진리의 말씀을 실천한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천진암을 돌아보며 문득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 소설이 떠올랐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보일 뿐이고, 사실은 사랑으로만 살아가는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살고 있고,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이 살고 있는 것이다.” 평상시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매사에 불쌍한 이웃을 돕고 큰 욕심을 내지 않으며 경건하게 살 것을 강조한 단편소설이다.
다음 날에 다시 부근의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묘소를 찾았다. 아내와 함께 묵념과 큰 절을 올려 참배를 하고 묘역을 들러 보았다. 「허균」의 6살 위 누나로 본명은 초희(楚姬)이며,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이다. 조선시대 여성 가운데 자와 본명이 알려진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조선 시대 여류 천재 시인이다. 당시에는 여자가 글을 깨우쳐 시를 짓는다는 것은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허엽(許曄, 1517-1580)」은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교육을 시켰다. 그녀는 문장가문에서 성장해 어릴 때에 오빠 봉(許篈, 1551-1588)과 동생 균(許筠, 1569-1618) 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12살이 손위인 큰 오빠 「허봉」은 중국에 오가며 구한 책을 여동생에게 주었다. 그리고 서얼 출신으로 당시(唐詩)에 뛰어났던 「손곡(蓀谷) 이달(李達)」로 하여금 여동생을 가르치게 하였다.
15세에 안동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나, 번번히 과거시험에 낙방한 남편은 아내의 학문과 문장력에 열등감을 느껴 가정을 소홀히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마저 달가워하지 않으니 그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시를 쓰며 지친 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 그녀의 시는 불평등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이 있었다. 가난한 서민과 억압받는 여성의 노동 등에 대한 시를 다수 남겼다. 연이어 딸과 아들이 병으로 죽고, 26세에 정신적 지주였던 큰 오빠인 「허봉」마저 객사하자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시를 쓰고 27세에 사망하면서 모든 자신의 시를 태워달라고 유언하였다.
묘비에는 훈민정음 반포 이래 가장 위대한 국어학자 이신 「이숭녕(李崇寧)」박사가 지은 추도문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아들과 딸을 여의고서 쓴 곡자(哭子)라는 시가 새겨진 시비(詩碑)가 있다. 곁에는 조그만 두 자녀의 무덤이 있는데 자식 잃은 엄마의 고통이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 뒷면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다)이 새겨져 있다.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 선생이 번역하셨는데 과거 서울대 국문과에서 「우전」 선생에게서 시경(詩經)을 배운 일이 있어 무척 반가웠다.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푸른 바다가 요지에 잠겨들고
靑鸞倚彩鸞(청란의채란)
파란 난새는 아롱진 난새에 어울렸어요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스물이라 일곱송이 부용꽃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붉은 빛 다 가신 채 서리 찬 달 아래에...
「허균」은 "형님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시로 짓고 죽더니 누님도 자신의 꿈을 시로 짓고 죽었다."고 애통해했다. 홍길동을 통해 서얼의 차별이 없고 평등한 율도국(栗島國)을 꿈꾸던 개혁가이며 선각자인 「허균」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 역적으로 처형되었으니 허망한 일이다.
1590년 그녀의 사망 이듬해에 허균이 『난설헌집』 필사본을 만들어 「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에게 보여주니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후 중국의 사신인 「오명제(吳明濟)」라는 사람이 조선의 시집을 수집 중 허균을 만나 다른 시와 함께 「난설헌」의 시 등 300여점을 전했는데 중국에서 『조선시선(朝鮮詩選)』으로 발행된 것이다. 이후에도 그녀의 시는 중국에서 인기를 얻어 사신인 「주지번(朱之蕃)」 등이 오면 그녀의 시를 추가로 구해다가 발간하였다. 이래서 자칫 당시 우리 풍토에서는 여성을 비하하고 무시하여 영원히 묻힐 뻔 했던 그녀의 시가 오늘 날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처남이 오랜 공직 생활(만 38년)을 곧 퇴임을 한다. 일찍이 소년 급제하여 순탄하게 공직을 마치게 되니 매우 감사할 일이다.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도는 물론이고, 부부 간 애정과 자식 교육, 이웃 및 동료나 선, 후배 간에도 신뢰와 칭송을 받았다. 청백리로 봉직하신 장인을 닮아 올곧은 선비의 기질로 어떤 불의나 부정과도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공직자의 모범을 보인 친구다.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면서 항상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을 존경하며 그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오죽하면 얼마 전에 회갑을 맞은 집사람이 덕분에 잘 지내 감사하다는 상패를 만들어 주었다고 하니, 부부 간의 금슬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바쁜 중에도 주기적으로 가족 모임을 주관하고, 조카들을 교육하면서 멘토의 역할을 하여 모두 반듯한 생활을 하도록 모범을 보였다.
실제로 가정이나 사회에는 건전한 정신을 소유하여 올바른 길을 걷도록 솔선수범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하다. 능력과는 별도로 인품이나 성품은 두고두고 은은한 향기를 품으며 우리의 삶을 인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그런 까닭에 “수양산음 강동팔십리(首陽山陰 江東八十里)” 말이 생겨난 듯싶다. 수양산의 그늘이 진 곳에 강동의 아름다운 땅이 이루어졌다 함이니, 어떤 한 사람이 잘되어 기세가 좋으면 친척이나 친구들이 그 덕을 입음을 비유한 말로 쓰인다. 훌륭한 사람의 언행은 그 자체가 주변 사람에게 살아 있는 지침이 되고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위정자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바른 인성과 정직한 심성에 올바른 리더십을 발휘하여 화합하고 배려하는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 모든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생활모델이 되어 하느님을 경외하고, 적어도 공직자라면 다산(茶山)이 추구하던 위민봉사의 정신을 망각하지 않길 희망한다. 그의 목민사상은 관료의 이상(理想)으로 추앙을 받으며 그대로 계승, 유지되어야 한다. 어느 날 천진암과 난설헌의 묘,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의 생가 터를 오가며 느낀 단상이다.
(2022. 11. 19. 작성/ 11. 23. 발표)
첫댓글 최근 성공회와 천주교의 신부 두 분이 저주의 막말을 한 일로 호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늦가을 여행으로 여러 곳을 다녀오셨군요. 정약용 선현의 생가와 도서관에는 다녀온 적이 있지만 천진암 성지에는 가보질 못했네요. 그곳에 그런 기념비적인 위용의 건축물이 몇십년 앞을 내다보고 세워지고 있군요. 살아 생전에 한번 꼭 가보고 싶군요.
그리고 허난설헌의 묘소가 그 인근에 있군요. 혼불문학상을 받은 최문희의 소설《난설헌》을 아주 재밋게 읽어보기도, 강릉에 있는 난설헌의 고향 생가에도 가보았지만 그곳까지는 가보지 못했네요.
남당이 올 늦가을에 걸은 발걸음을 따라 남양주와 퇴촌 지역의 나들이 한번 해야겠어요~
역시 순우와같은 독서가는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많은 소설중에도 울림을 주는 글을 읽고 지내니 크게 놀랍니다! 과거 최소한의 신체유지와 강의외에는 읽고 글쓰기만을 평생의 업으로 했던 김윤식교수가 오버랲되는군요~ 기회가 되면 찾아가시길 응원합니다!
네ㅡ 감사합니다 ᆢ좋은 글ᆢ천주교 역사와 가족간의 애틋한 얘기 ᆢ잘 보았습니다 ᆢ수고하셨습니다.ᆢ
오랫만입니다! 성우회를 통해서도 성원해주시니 항상 감사합니다~
종교가 달라 경기도 광주에 있는 천진암은 말로만 들어봤는데, 36만 평 부지에 3만여 평의 대성당을 건립하는 백년 계획의 대역사라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경건해 지는군요. 천주교 발생 성지의 성역화와 더불어 올바른 사제와 신자의 마음을 갖는 천주교인이 나날이 늘어가기를 기도해 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지난 주부터 프랑스 라디오를 통해 듣고 있습니다. 기독교 국가다운 연말 분위기이지요. 크리스마스 트리를 비롯해 연말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는 것 같고요. 사람들의 모습은 들떠 보인다고 할까요. 온종일 캐롤만 보내줍니다, 천주교의 성지 천진암을 마음 속으로 그려봅니다. 30년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