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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의 보급은 우리 사회의 온라인 네트워크를 ‘언제나 접속 가능한 상태’로 만들었다. 이것이 빚어낸 다양한 현상들이 있지만 비하하고자 하는 대상을 향한 혐오 발언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을 수 있겠다. 상호 간의 욕설과 협박이 난무하고, 논란이 되는 인물의 SNS를 찾아가 댓글이나 개인 메시지로 테러하는 풍경이 익숙해진 사회. 이 현상에 대해 나는 SNS의 작동방식에 익숙해진 우리가 사람에 대한 부정적 피드백을 가볍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짚어보고, 나아가 악성 댓글/메시지에 무뎌진 우리 사회가 그로 인한 (사회적) 죽음에 얼마나 무심한지에 대해서도 영화 <소셜포비아>(2014)를 통해 읽어보고자 한다.
SNS의 탄생 비화, 스크린 너머의 인정욕구
6년 만에 5억 명의 친구를 맺은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소셜 네트워크>(The Social Network, 2010)는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를 다뤄 큰 화제가 됐다. 더욱이 천재 소년의 성공 신화와 같은 뻔한 접근이 아니라, 온라인 네트워크 서비스 분야의 아이디어 도용과 같은 윤리적 문제와 오랜 친구이자 공동창업자를 기만한 인간관계를 조명했다는 점은 현실적이면서도 신선한 접근이었다.
영화는 주인공 마크(제시 아이젠버그)를 기본적으로 오만하고 무례한 성격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주인공의 인정욕구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마크는 하버드에 입학한 뒤, 소위 ‘너드’(nerd, 괴짜)가 아니라 ‘인싸’(insider)가 되는 방법을 고민했다. 사회성이 부족했던 그는 보통 사람들에게 부러움 혹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었고, 자신의 오랜 인정욕구를 채울 플랫폼을 설계했다. 페이스북은 자신의 배경과 지위, 관심, 상태 등을 설정하고 자신이 어떤 그룹에 속해 있는지, 자기 글을 누가 공유하고 댓글을 다는지, 그리고 ‘좋아요’를 몇 명이 눌렀는지를 모두가 볼 수 있게 개방함으로써 그런 욕구가 채워지도록 만들어졌다.
페이스북을 개발하기 전 마크가 일으켰던 다른 에피소드를 영화는 보여준다. 어느 날 마크는 여자친구 에리카와 대화를 하던 중 그녀의 학벌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다.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이별을 통보하고 마크는 기숙사로 들어가 홧김에 자신의 블로그에 에리카를 폄하하는 글을 올린다. 그걸로 분이 풀리지 않자 마크는 그날 밤 하버드 여학우들의 외모를 평가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선보인다. 반응을 확인한 그는 가십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단 몇 명에게 사이트 주소를 보낸다. 전달에 전달을 거쳐 삽시간에 하버드 서버가 다운되었다. 이 사건으로 마크는 교내 재판을 받았지만, 사이트를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렸던 다른 학생들은 고발 대상에 올라가지 않았다.
마크는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면서 온라인 속 피상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의 기분을 위로받고 오프라인 인물과는 완전히 차단된 양 마음 편히 험담했다. 훗날 우연히 만난 에리카 앞에서 더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탄생 비화는 과시욕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어떻게 악성댓글과 결합하게 되는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SNS로 구현되는 ‘정의’란 무엇인가
2014년에 개봉한 <소셜포비아>(Socialphobia)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선정된 홍석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평단과 대중 모두의 호평을 받았다. 각종 인터뷰에서 감독은 영화를 기획하게 된 계기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라고 밝혔다. 유도 결승전에서 안타깝게 패했던 선수의 미니홈피에 비난하는 글을 쓴 누리꾼이 있었는데, 그 글을 본 많은 사람들이 댓글 공격을 했단다. 그 누리꾼이 자신을 공격하는 댓글에 하나하나 답하면서 대처하자 몇몇이 그녀의 신상을 털고 거주지 근처까지 찾아갔고, 이를 영상으로 찍었다. 감독은 그 사건이 인상에 남아 이를 시나리오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이미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점과 함께, ‘신상 털기’나 ‘댓글 테러’ 등으로 심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며 유명 연예인들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의 설정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본격적으로 줄거리를 살피면 이렇다. 노량진에서 경찰공무원을 준비 중인 지웅(변요한)은 어느 날 고시생 친구 용민(이주승)의 권유로 현피원정대에 참가하게 된다. 현피의 대상은 탈영병의 자살 소식에 악플을 쏟아놓은 레나(하윤경)였다. 군대에 민감한 남성들에게 탈영병의 자살처럼 가슴 아픈 이슈가 있을까. 매일 긴장 속에 이를 악물고 훈련받던 기억과 사회에 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내가 잊혔으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 고된 훈련 뒤에 생긴 동지애와 같은 경험을 겪었거나 할 예정인 남성들은 탈영병 사건을 나의 일처럼 가슴 아파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 여성으로 추측되는 레나가 탈영병을 희롱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하다. 분노한 남자들은 도대체 면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나 좀 보자며 그녀의 신상을 털고 현피원정대를 모집해 출동한다. 나는 궁금했다. 그렇게 집을 찾아가서 얼굴을 보면 그 뒤에는 뭘 하는 거지? 현피원정대의 주도자는 출발 전 방송을 진행하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군바리 불쌍해서라도 우리는 오늘 무조건 사과받아 낸다, 공식적으로다가 무조건 (사과를) 받아낸다. 왜? 정의를 위해서!”
누군가로부터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은 살면서 종종 느끼는 감정이다. 상대가 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 보상과는 별개로 피해자의 마음이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사과를 요구한다. 사과를 받았다고 마음이 풀린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사과를 받으면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는 것에 화가 일부 누그러들기 때문이다. 또 이런 사과의 경험은 타인의 입장에 서보게 하면서 다른 사람의 실수에 너그러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레나의 잘못은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없이 그의 비극적인 선택을 조롱했다는 것이다. 충분히 욕을 먹을 행동이긴 하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과를 받기 위해 집을 찾아가는 일은 상식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누군가에 대해 막말을 한 인물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다른 사람들이 듣는데 저속한 단어를 섞어가며 함부로 누군가를 욕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설사 그랬더라도 주변인들은 무언의 눈길을 보내거나 혹은 한두 마디 점잖게 나무라는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설령 욕을 들은 사람이 당사자라고 하더라도, 몇 마디 오가는 싸움은 있을지언정 집까지 쫓아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결론이다.
그런데 욕의 당사자도 아닌 현피원정대가 레나를 만나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자 했다. 상한 마음을 풀고자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사과를 받아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정의’였다.(심지어 지웅의 트위터 아이디도 ‘justice’다.) 하지만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레나를 심판하겠다고 주장하는 그들 역시 그녀 못지않은 수준의 욕설과 비아냥, 그리고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개방된 공간에서 다수에게 욕을 먹고 있어 마음껏 욕해도 되는 상대를 찾았고, 욕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현피를 뜨러 간 것이다. 다시 말해, 인터넷 기사나 이슈가 되는 인물이 생기면 ‘허물 많은 나의 육신’은 잊고 그 대상의 SNS에 몰려가 욕부터 하고 보는 누리꾼의 모습을 현실에서도 적용했던 것이다.
감독은 영리하게도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스마트폰도 꺼놓고 생활하는 지웅을 주인공으로 두었다. 인터넷 문화에 친숙하지 않은 그가 친구의 권유로 처음으로 악플을 달고, 친구의 간절한 부탁에 처음으로 현피를 참여했다는 설정은 레나의 자살에 지웅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는지를 관객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한다. 그러나 SNS 세계의 ‘익명’과 ‘나뿐 아닌 다수’라는 두 가지 조건은 악플을 처음 달았거나, 스마트폰 사용 빈도가 현저히 낮다거나 하는 식의 치졸한 변명이 통하지 않게 만든다. 물론 이 두 조건은 현피에 참여하고 악플을 달았던 모두에게 책임 회피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현피원정대는 레나의 집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목을 맨 그녀의 시신. 대중의 분노는 아프리카TV로 실시간 방송된 현피원정대에게 쏠린다. 이들은 레나의 집을 찾아간 것일 뿐 잘못한 게 없다고 억울해하며 레나의 죽음이 타살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품고 진범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레나가 유명한 키보드 워리어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용의자는 그녀에게 원한 복수를 할 만한 몇 명의 누리꾼으로 좁혀진다. 이후 ‘도더리’라는 누리꾼이 그녀의 계정을 해킹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새로운 제보로 그가 바로 용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 영화〈소셜 포비아〉 화면 갈무리
비뚤어진 자기 과시
영화 속에서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추적하는 가운데 밝혀지는 레나의 진면목은 아주 흥미롭다. 그녀는 온라인에서 한번 키보드 배틀이 시작되면 상대의 기록을 찾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반박하기로 유명했다.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고 중단을 요청하는데도 IP주소와 신상을 털어 온라인상에서 재기하기 힘들 정도까지 물고 늘어졌다. 레나의 실제 대학 생활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창작물을 발표하고 논평을 받는 합평회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창작물은 거침없이 난도질하면서도 정작 본인의 창작물은 한 번도 가져오는 법이 없었다. 참다못한 교수가 그녀의 노트를 보려고 하자 레나는 무기명 대자보를 통해 그 교수의 작품이 표절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대학을 중퇴했다.
감독은 이런 레나의 캐릭터에 대해 극 중 인물의 입을 빌려 에고(ego)는 강한데 알맹이가 없다고 일침을 가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 과시욕은 강하지만 내실은 없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과시할 만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신의 결과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피드백을 통해 능력을 갈고닦아야 한다. 창피하고 속상할 수는 있겠지만 이 기회를 통해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레나는 본인의 창작물에 대한 피드백을 거절했고 온라인 세계에서 인정 투쟁을 시작했다. 이 선택으로 레나는 자기를 성찰하고 능력을 키워나갈 기회를 잃었고, 타인으로부터 피드백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역지사지 없이 거칠고 강한 표현으로 상대방을 쉽게 비난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비난은 상대의 성장을 위한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상대방을 철저하게 제압함으로써 나의 능력을 과시하고 일종의 성취감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SNS 속 익명의 존재도 ‘사람’이다
SNS에서는 왜 이런 식의 자기 과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일까? 오프라인에서는 사회적인 제약 즉 나이, 성별, 인종, 지역, 직위, 소속 등 본인이 속한 물리적인 상황 때문에 자신의 견해나 가치관, 신념 등을 입 밖으로 내기에 한계가 있다. 반면, 온라인의 경우엔 신체를 통한 정보는 차단된 채 결과물만 접하게 된다. 익명이 보장되고 발언자의 신체가 삭제된 채 메시지로만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은 현대인에게 엄청난 자유를 선사했다. 온라인에서 맞이한 자유는 거리낄 것 없는 솔직한 자기표현은 가능하게 했지만, 그에 대한 책임감은 오프라인보다 가벼워졌다.
온라인의 이러한 특성은 용민이 23만 명이 가입한 스타크래프트 인터넷 카페를 어린 나이에 운영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본인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그는 신체적, 배경적 조건이 삭제된 공간에서 자신의 학력과 부모님의 직업을 꾸며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자기 과시욕을 채우려는 레나는 그의 거짓말을 낱낱이 공개했고, 그녀의 저격으로 용민은 사회적 죽음을 맞이했다. 용민은 학교를 중퇴하고 이름을 바꾸고 이사를 하는 등 현실과 가상세계 모두에서 과거와 단절함으로써 겨우 회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용민은 SNS의 특성을 이용해 복수했다. 레나의 아이디를 해킹해 레나인 척, 탈영병의 자살 사건에 고인을 비방하는 댓글을 단 것이다. 이미 SNS 작동 방식에 익숙해 있던 전 국민은 언제나 그랬듯이 쉽게 용민의 자작극에 동요했다. 실시간으로 연결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정보는 유저들에게 즉각적 반응을 요구하고 ‘스압(스크롤 압박)’ 없는 단편적인 메시지 또한 사실과 주관이 뒤섞여 입체적인 해석과 맥락적인 파악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미디어 전문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마셜 맥루한이 주장했듯이 매체는 메시지고 매체는 몸의 확장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지 몇 년 안 된 이 새로운 매체 역시 인간 개개인의 선택과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은 SNS의 가능성이 언제나 나에게 유리하게 작동할 거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유한한 신체를 벗어버릴 수 없는 현실과는 다른 가상공간에 대해, 우리는 오만하게도 내키면 언제든지 접속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눈을 보고 육성을 듣고 악수를 하는 대상도 사람이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SNS로 맺은 친구 역시 사람이다. ‘좋아요’를 누르는 상대도, 아이디를 태그하고 키보드를 눌러가며 욕을 쓰던 대상 역시 모두 사람이다. 사람은 내밀한 관계와도 영향을 받지만, 피상적인 관계와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온오프라인 구분 없이 상대방을 인격적인 존재로 인지하는 것은 너무나도 필요한 태도다.
〈소셜포비아〉를 보고 난 뒤, 뇌리에 남은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모니터로 보이는(정확히 말하면 레나의 노트북에 깔린 카메라 해킹프로그램으로 몰래 찍은) 레나의 자살 직전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도더리’가 용민이라는 게 밝혀지자 새로운 현피원정대가 그를 찾아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장면이다. 카메라 속 용민은 끈에 매달려 발버둥치고 있고, 이를 보는 무리는 이미 두 번의 현피를 통해 목맨 현장이 익숙한 듯 그를 손가락질하며 웃고 있었다.
모니터 속 레나의 얼굴을 스크린을 통해 응시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고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버둥거리는 용민과 그 모습을 보고 웃는 무리를 스크린으로 응시하는 사람은, 정말 영화 속 노트북 해커와 아프리카 TV의 시청자인 걸까? 감독은 스크린을 무기 삼아 관객에게 질문한다.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당신은 레나의 죽음에 조금의 죄책감이 없느냐고. 레나의 집을 찾아가긴 했지만 죽이진 않았다고 주장했던 현피원정대와 그들의 현피 중계를 시청했던 사람들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오늘도 수많은 선정적인 기사에 달린 악성 댓글을 보면서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긴 우리는 그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사진 업로드, 화면 캡처, 게시글 전체 공유, 댓글과 대댓글, 해시태그, 인물 소환, 좋아요 등 SNS의 다양한 기능은 오프라인보다 손쉽게 인정욕구와 과시욕을 채울 수도 있지만, 오프라인보다 관련 인물부터 전혀 모르는 인물에 대해서까지 더 빠르고 넓게, 파괴적으로 험담이 오가게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작동 방식에 취해 호기롭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놀림이 어느 순간 신속한 ‘복붙(복사해 붙여넣기)’과 공유를 통해 오프라인의 누군가를 발버둥치게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