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문제
<고통의 문제> c.s.루이스 -이덕재-
이 책은 내가 처음 접했던 c.s.루이스의 책 이다. 중학교 2학년 당시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나는 생전 처음 나의 모국어인 한글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신기한 현상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얼마 전 <고통의 문제>를 다시 읽었을 때도 신기한 점을 발견했는데, 바로, 2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 이 책이 지금까지 읽어본 책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흥미로운 책이라는 것이다.
<고통의 문제>는 정확히 말하자면 ‘기독교의 고통의 문제’이다. 사실 기독교의 관점이 아니라면 고통이라는 사건 자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전혀 모순이 되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문제’는 우리에게 왜 고통이 일어나는가,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고통이라는 사건 자체가 일종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해 하기 위해서는 일단 종교적 관점의 기독교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고,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 가있다.
모든 고등종교에는 3가지 요소 내지는 성분이 있는데, 첫번째는 누미노제의 경험이다. 누미노제의 경험은 일종의 두려움이 라고 할수있는데 위험에 의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 사실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지금 옆방에 호랑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 호랑이가 끼칠 물리적 위협에 의해 두려워 하는 반면 지금 옆방에 유령이 있다고 들었을 떄는 유령이 유령이라는 것 자체로 두려워하는 것과 비슷하게 누미노제의 경험은 단순히 위협에 의해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르게 (방금 예시에서 나왔던 감정을 넘어서서 )어떤 강력한 영에게 느끼는 일종의 경외감과 위축감이라고 할수있는 감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대상을 누미노제라고 한다. 이 누미노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상당히 오랜전 까지 거슬러 올라갈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위험을 인식하는 경우와는 달리 물리적인 사실에서 제공받는 것도 아니고 그 사실에 근거한 논리적인 추론에서 제공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두번째의 개념은 도덕법 이라 불리우는 것인데 역사상 존재해온 모든 인간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지간에 도덕을 인정하고 있으며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수용될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기 떄문에 인간 본성에는 도덕에 대한 일정한 판단 기준이 있다고 볼수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도덕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가지의 개념을 동일시할 때, 즉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령한 영과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는 도덕을 동일시할 때 종교의 세 번째 받달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도덕법을 누미노제의 엄청난 요구들로 무장시키기 때문에 욕구 충족의 심리로도 설명할수 없으며 종교사상 인간이 감행 되한 가장 놀라운 도약이다.
기독교는 여기서 한 가지 요소가 추가 되는데, 역사적인 사건에 관련된 것이다. 한 유대인이 태어나 자신이 바로 그 두려운 존재이자 도덕법을 부여한 존재의 아들이라고, 또는 하나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 할 수 밖에 없는데 하나는 그가 헛소리를 늘어놓는 미치광이 거나 아니면 그가 주장하는 바와 일치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두번째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그밖에 내용 또한 믿을만한 내용이 된다. 이러한 근거에서 또는 이보다 더 나은 근거를 바탕으로 인류가 인도되어 온 과정을 쫓아 그리스도인이 될 때 고통의 문제에 부딪이게 된다.
고통의 문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자신의 피조물이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고 또 그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 소원대로 하실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은 현재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다.”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선하다”, “행복하다”,”전능하다” 라는 말이 여러 의미로 이해될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먼저 하나님이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다는 것은 사심없이 그저 우리의 복지에 힘쓰신다는 뜻이 아니다. “아들이 인생을 즐겁게 즐기기만 한다면 불량배가되든 무슨 상관입니까?” 라고 말하는 바라는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든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하나님의 계획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며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이 아무 꺼리낌 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럴 때 비로서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해 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이 사랑스러운 존재로 바뀌기 위해서는 고통을 줄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하나님이 전능 하다면 고통을 주지 않고도 아무 꺼리낌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할 수 있지 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전능의 의미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아무꺼리낌없이 사랑하실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올바른 길로 가야하며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자신을 양도 해야하고 그것이 올바른 길이다.그러나 무조건 적으로 아무 꺼리낌 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만든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을 양도한다는 것으로 상당히 모순적인 일이다. 강제적으로 자기양도를 하게 한다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는 로봇과 같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아무 꺼리낌없이 사랑할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아예 사랑의 대상이 될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해서 고통을 주지 않고도 아무 꺼리낌 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할 수 있지는 않다. 즉, 내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하나님도 하실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지 말도 않되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우리나라에 큰 아픔이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벌어지고 있었던 많은 정치적, 사업적,구조적 문제들을 침묵한 결과로 억울한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세월호 참사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로는 이 말이 맞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가 ‘하나님은 그 아이들이 억울하게 죽기를 원했다.‘ 라는 뜻이라면 나는 그런 신을 믿는 종교는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사실 이런 사건과 같은 고통의 원인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고통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도 복합적인 선을 이루어 내시며 이제 제발 좀 정신좀 차리라고 사회에 강력하게 외치는 분이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악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C.S.루이스는 고통을 귀먹은 세상을 불러 일으키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삶'이 즐겁게 느껴질 동안에는 그 삶을 올바른 길로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쳐해 있는지 깨닫게 하는 용도로도 고통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실상 행복할 때 보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성경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이러한 고통을 지나 하나님이 아무 꺼리낌 없이 사랑하실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고통의 문제는 왜 겸손하고 경건한 신앙인이, 일상속에서 소소한 행복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이 고난을 겪느냐가 아니라 왜 어떤 이들은 고난을 겪지 않는 냐가 될수도 있겠다.
첫댓글 부라보~ 와우~ 다시 이 책을 읽게 만드는군요. ^^
ㅠㅠ 대체 고1 맞습니까? 최근에 이 책을 읽다가 그냥 접힌 채 놔 둔 일인으로서 박수를 보냅니다. 내일이라도 다시 읽어야 겠습니다. ^^
책읽게 만드는 책읽기와 글쓰기. 훌륭합니다. 자랑스런 로고스서원의 다음세대에게 박수를!!!!
예수는 마땅히 존경받을만한 역사속 인물이 아니라 미치광이이거나, 그가 주장한대로 신의 아들이거나... 둘중 하나여야 한다는 말, 책읽으면서 100만번 공감했죠!! 잘읽었어요~^^
대단합니다. 그리고 더욱 겸손하셔야겠습니다. ^^ 이렇게 귀한 안목과 해석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