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시편 119(118),36.29)
2월 11일인 오늘은 교회 안에서 세계 병자의 날로 기려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2월 11일인 오늘이 세계 병자의 날로 기려지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 바로 오늘인 1858년 2월 11일에 자신을 드러내신 성모님의 기적과 관련됩니다. 1858년 2월 11일 프랑스 루르드라고 하는 작은 시골 마을에 성모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의 그 같은 발현은 교회의 저명한 추기경이나 주교, 사제 수도자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가난한 시골의 14살의 어린 소녀 베르나데뜨 수비루에게 일어납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집안을 따뜻하게 할 땔감을 구하기 위해 개울을 건너려 하는 베르나데뜨 앞에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나타나고 그로부터 18차례에 걸쳐 그 여인은 소녀에게 나타나 여러 가지 메시지와 샘물을 통한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성모님이 발현한 미사비엘 동굴 바닥에서 솟은 샘물을 통해 그 물을 마신 이들이 병으로부터 낫게 되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자 많은 이들이 그곳으로 찾아와 기적을 갈구하게 되고 교회는 공식적으로 그 기적을 심사한 후, 1862년 성모님이 발현하신지 4년 후 이 모든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곳을 성모성지로 선포합니다. 1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년 60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로서 셀 수 없이 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루르드 성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곳 성지를 재임 중 세 번이나 방문하고 1992년 5월 13일, 루르드에서 성모님이 발현한 사건을 기억하는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2월 11일을 모든 병자들을 기억하는 세계 병자의 날로 거행하도록 제정하였습니다. 이 같은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은 채 식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인 율법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며 비판을 넘어 비난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7)
율법의 규정을 들어 예수님을 비판하는 바리사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성경의 구절, 그 가운데에서도 이사야 예언서 29장 13절을 인용하여 그들에게 반박하십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상대하시는 예수님, 그러면서도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명쾌하게 꿰찌르는 냉철하고도 분명한 판단력으로 상대방의 비판 논리를 순식간에 혁파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이 주장하는 율법의 규정들은 하느님의 계명이 아닌 사람의 전통에 불과하다는 사실, 곧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 그대로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위선자들의 모습을 들어 설명하시면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모습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들의 이 같은 모습은 오늘 복음의 말미에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말씀을 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이 모순 같은 상황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겉꾸밈의 허상 속에서 본질을 잃어버린/놓쳐버린 삶.’ ‘허상 위에 뿌리를 내린 거짓의 삶.’
흔히들 내면의 본모습을 잊은 채, 겉으로 드러나는 외면적 모습만을 중요시하며 그 모습을 통해 자신을 꾸미고 감추는 이들의 삶을 들어 화려하게 꾸며진 전광판과 같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찬란한 네온사인의 빛으로 꾸며져 있어 그것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움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것은 실상 그 이면, 곧 본래의 그 모습은 실상이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입니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정작 실제로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상의 것. 오늘 복음에서 전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전통과 율법을 이야기하며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와 예의범절을 이야기하지만 실상 그것이 의미하는 본질적 내용은 사라지고 겉꾸밈만이 남은 허상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편 오늘 독서의 창세기의 말씀은 세상 만물과 함께 세상의 모든 생물들과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창조물들이 원래 창조된 목적에 따라 하느님 보시기 참 좋은 모습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모습을 전합니다. 이 모든 것을 엿새 동안 이루신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창조물들이 인간의 다스림 하에 각기 자신의 장소에서 자신이 맡은 바 일을 하는 조화로움을 이룰 수 있도록 배려하신 후, 이렛날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쉬심으로서, 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이 날이 바로 안식일, 곧 거룩한 주님의 날인 주일이 됩니다.
이 같은 오늘 독서의 창세기의 말씀처럼 세상 모든 만물은 하느님의 창조 아래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느님이 주신 질서, 곧 율법이라는 규정과 규칙들 안에서 그 질서를 이루어갑니다. 그런데 질서를 위한 그 율법이 어느 순간, 율법의 본래 정신은 사라지고 사람들을 제약하고 속박하는 제재를 위한 도구가 되어버리고 오늘 복음에 율법학자들이 보여주는 모습처럼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집, 거룩한 성전을 꾸미는 일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 분을 합당하게 모시기 위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그 분이 머무르시는 그 곳을 아름다운 꽃과 장식으로 꾸미는 것은 분명 필요하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분이 머무르시는 그곳에 내가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기 위한 곳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정작 그 분이 그 곳에 함께 하실 때, 아무도 그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인간이 만든 하찮은 구조물 안에 가두어 놓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만든 조그마한 편견과 선입견의 상자 안에 가두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바라고 희망하는 작은 소망들 안에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느님을 가두어 버리지 마십시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말씀처럼 하느님 그 분은 온 땅에 당신 이름을 널리 펼치시고 당신 손가락으로 하늘과 달과 별들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빚어 만들어 창조하신 하느님 그 분은 결코 우리 생각 안에 머무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생각을 뛰어 넘어 계시며 그 생각의 근본 그보다 더 깊은 곳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원하고 희망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꾸미려 하지 말고 내가 희망하는 것 그 너머에 그리고 내가 희망하는 것을 희망토록 하는 그 분의 놀라운 현존을 체험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하느님이 여러분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려 노력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법을 우리 마음 안에 새기고 그 분 가르침을 우리가 따라 살아갈 때, 하느님은 우리의 반석, 우리를 지키는 산성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바 그대로 병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이 베푸신 루르드의 기적을 체험한 우리들이 우리 주위의 아파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동시에 우리 각자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예수님께 맡겨 드리며 여러분 모두가 그 분의 사랑으로 모든 상처가 깨끗이 나아 여러분이 체험한 그 분 사랑의 힘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그리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힘을 얻고, 그 말씀의 희망의 씨앗으로 삼아 하느님과 함께 행복과 기쁨의 나날을 살아가시기를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시편 119(118),3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