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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伯父)의 달
이 순
돌아가신 아버지와 백부는 다섯 살 차이다.
세상을 뜨기 사흘 전 아버지는 특유의 고집으로 온양 온천엘 갔다. 그때 아버지를 수행한 사람이 큰아버지다. 하지만 온천물엔 손끝도 담가보지 못하고 아버지는 대절택시에 실려 되돌아왔다. 흔들리는 차 속 뒷자리에, 담요를 감고 누워 까무러쳤다간 정신이 들고는 하는 경황 중에도 병자는 한사코 성북동의 자기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겼다는 것이어서 아버지가 임종한 곳은 영등포의 큰아버지 집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객사를 두고두고 한스러워하였다.
“세상을 뜨려면 맘부터 변하는 법이라더니…… 하긴 그렇게 돌아오는 게 자기도 낯이 없었겠지. 좀 고집을 쓰구 갔게?”
하필이면 그곳이 큰아버지 집이었다는 게 어머니는 특히 야속했던 것이다.
일본 여대 출신으로 죽어지내는 며느리 노릇하고는 애초에 담을 쌓았던 데다가 특히 그 백부와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 어느 날 아버지가 큰어머니와 함께 주사를 놓으러 온 큰아버지를 잡고
“온천에르 가야겠소.”
했을 때 어머니는 곁에 앉았다가 질색을 했다. 그러나 그러는 어머니는 아랑곳도 없이 아버지는 암(癌)이 주는 고통과 모르핀이 주는 종작없는* 진통 효과로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얼굴을 백부를 향해 치켜들며 간곡히 이렇게 부탁하던 것이었다.
“내레 위야 에랬을 때부텀 좋지 않지 않았음? 아, 그 동경에서 형님하고 우유배달 할 때에도 노 허리 못 매고 지냈싫이요. 그런데 아따미 온천물 한 번 맞고 나서 허리빠르 매게 되지 않았음? 왜 진작에 그 생각을 못 해냈는지 모르겠음메…… 나르 온천에 데려다 주오.”
“오냐, 오냐.”
언제 보아도 표독스럽기만 한 얼굴이 아주 딴사람이 되어가지고 큰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에 눈물이 그득 고였던 것이 이치로 보아 도무지 가당치 않은 그 여행을 어머니가 끝까지 말리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그 양반이 원체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양반이지만 참 별나기도 하지. 6·25 땐 낙루장관도 있었다만 원 세상에 그렇게 독한 양반이 눈물은 또 흔해. 원체 눈물이란 게 제 살 아까운 줄밖엔 모르는 사람들한테 헤픈 건지도 모르지만 암튼 그 삵눈 같은 눈에 눈물이 고이니까 내가 힘이 탁 빠져버려서…… 형제분들 하는 대로 내버려둔 거지 뭐.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게 그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보아.”
라는 것이 어머니의 회고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여행의 부당성을 소리 높여 주장하면서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온천물의 기적에 어머니도 한 가닥 기대고 싶었던 게 더 큰 이유였을 것 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기적이라 부를 만한 의외의 국면에 힘 입어 사지(死地)에서 오히려 영달의 길로 벗어 나오곤 했던 아버지의 남다른 반생(半生)이었으니, 온천욕으로 말기의 암이 치유될지도 모른다는 그 허황하기가 이를 데 없던 환자와 가족의 기대를 나무랄 수만도 없다.
“그 사람이 어디 보통 사람임메? 앙이 미국 사램들하고 인연을 맺게 된 것만 해도 그렇지비. 아아 애비가 가막살이르 하다가 그리 핑게 앙임메? 아아 애비 전주로 오 년형으 받고 가막소살이 떠나고 놀래서 할마이 돌아가시고 할 때야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비. 하지만 그 가막살이가 없었으면 그 출세가 있었겠음. 할마이 돌아가시던 생각을 하믄. 막내 아아야 하고 두 손을 허우대다 흰창으 되비는데.”
하고 돌아가신 이의 회갑년을 맞아 마침 승진이 있었던 고인의 상주인 남동생의 일도 축하할 겸 성대하게 차린 제삿날 실로 오랜만에 동생의 기일에 와서 큰아버지가 정종잔을 휘저으며 온천 갔던 얘기에 열을 올렸었다.
“앙이 그 사램이 그처리 허무하게 갈 줄이야 뉘기 알았겠슴. 그 사램이 어디 보통 사람이오? 죽을 곳에서도 오히려 남의 머리 위로 솟구쳐 오르던 사람이었는데. 동겡에서도 야아야, 쌀 떨어졌다, 어쩌지? 하면 잘됐소, 기다려보기요, 굶는 일 생긴 담엔 꼭 배 터질 일 생겼응이까, 아매 쌀보다 더 좋은 기이 생길기요, 하고 싱글싱글 웃었당이까. 실로 하늘이 내린 사람이었당이.”
평생에 점철된 불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후각 외엔 그 어느 것도 믿지 않는 수풀 속 육식동물의 표정이 조금도 이지러지지 않은 칠순 노인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흘러넘쳤다. 거기다 대고 죽은 부친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건 조금도 없고 그리움 같은 게 있기는커녕 망자에 대해 ‘실패한 인간’ 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고 무엇보다 ‘도와주지 않는다’고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어머니의 경대 같은 것을 때려부수곤 했던 백부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일종의 증오심을 품고 살아온 남동생이,
“그럼 소싯적부터 그게 있었던 모양이지요. 아버지는. 과대망상증이.”
하고 거침 없이 내뱉어 큰아버지를 대로하게 하였었다. 모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풀어놓게 되어 한껏 유쾌하게 몇 잔이고 들이켰던 유리잔을 덜컥 소반 끝에 내려놓고 노인네의 그렇잖아도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 모양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민이 애비.”
어머니가 황급히 남동생을 말리고,
“너 취했구나.”
하고 외삼촌이 나섰으나,
“못된 놈의 간나새끼.”
끝끝내 큰아버지의 입에서 노호(怒號)*가 터져 나왔다. 벌떡 일어나 남동생의 근시안경 낀 현대인답게 창백한 얼굴을 그와는 정반대 되는 시뻘건 얼굴로 노려보았다.
“이놈으 새끼, 너어가 지금 좀 산다고 눈에 뵈능 기이 없는 모앵이다마는 너 같은 놈은 늬 애비 발뒤꿈처리도 못 핥아. 호랑이한테서 시라소니가 태어나가지 구서리. 이놈……”
툭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버릇임을 누부나 알고 있었으므로 잘잘못은 뒤로 미루고 사람들이 불붙은 듯 서둘러 남동생을 음복*상이 벌어졌던 거실로부터 가장 멀리 격리된 식당 옆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황황히 사라지는 장조카 뒤꼭지에다 대고 술추전자라도 메어 때릴 것 같던 처음 기세와는 달리 겨드랑이를 부축하며 말리는 외삼촌에게 못 이기는 척 주저앉았다. 그리고 온천 갔던 이야기의 본론을 시작했다.
“……허리빠 대신으로 바지 앞뒤에 구멍 내서리 노끈을 어깨에 걸고 다니등 거 기억나오? 형님이 허리빠 공장에 다니멘서리 하나 얻어다 준 돼지가죽 허리빠는 벽에 걸어놓고. 그런데 아따미 다녀와선 그걸 처음으로 매었잴이요, 하며 내내 방글방글 우스며 갔지비. 배 아프단 소리 한마디도 없이 눕지도 않고 똑바로 앉아서. 그런데 여관 앞에 차가 서자 스르르 모로 넘어지지 않겠음.”
외삼촌이 새로 따라 올린 노란 정종이 담긴 작은 유리잔을 들여다 보며 이윽고 백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갸아가 그렇게 갈 줄이야. 영어말로 남북통일을 변설하면 양놈들도 놀라 자빠치고, 이 박새(李博士)* 높이 앉아 있다가 뛔 내려왔던 천하 인물이.”
양복 소매로 어린애처럼 눈물을 닦았다.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딴 데를 보았다. 맏아들이 이번에 동기생들 중에서는 일착으로 과장에서 차장으로 승진한 일을 되도록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어머니가 올해가 고인의 회갑년임을 돈 문제로 서로 틀어져서 벌써 몇 년째 안부 전하는 일도 끊고 살았던 당고모에게까지 일일이 알리는 바람에 그날 모였던 사람의 숫자는 부모 따라온 아이들까지 합하여 무려 삼십몇 명이었다. 열 평짜리 거실의 소파를 모두 벽으로 붙이고도 여자들은 안방에서 따로 상을 받아야 했다. 그중엔 서로 몇 년 만에 얼굴을 보는 이들도 있어 문밖에서는 제주(祭主)가 삼촌에게 얻어맞을 뻔하다 내빼건 말건 관북 여성 특유의 활발한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목청 껏 떠들어댔는데, 얼마 있지 않아 거실의 침통한 분위기가 전달되어져 젓가락을 손에 들고 고개들이 안방 문으로 삐죽삐죽 나왔다.
“저 아바이가 또.”
6·25 때의 파편으로 한쪽 다리를 몹시 저는 당숙모 하나가 혀를 찼다. 칠순 노인의 눈물처럼 난처한 것도 없지만 17주기쯤 되고 보면 피차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은 바라기 어렵다. 제사를 지낸다는 건 명목뿐이고 어차피 일종의 친목회로, 부른 쪽이나 온 쪽이나 집 안 치장, 옷 치장으로 제사는커녕 잔치를 방불케 하게 마련이었다. 더구나 고향 묏자리의 보살핌이 있으셨던지 너나 할 것 없이 빈 몸으로 고향 땅을 쫓겨나다시피 떠난 깐으로는 제 몫들을 단단히 하고들 살고 있어서 아니 그런 케케묵은 문중 모임에 굳이 얼굴을 디밀 바에야 사는 자랑이 남 못잖은 사람들일 밖에 없어서,
“민이 애비 차장 됐다구? 축하한다. 이제 더 바빠지겠구나. 하긴 한창 일 재미날 때지. 난 이제 몸서리가 난다…… 누구보다 형님이 부럽소. 방학이 일 년이면 반이고 거기다 일주일에 사흘만 나가면 된다면서요? 이거 원 공평치 못해서. 남은 새벽 6시면 출근해서 밤 열 시가 넘어서 겨우 퇴근해도 밤 열두 시건 뭐건 전화벨 따르록 울리고 이(李) 이사 찾으면 또 부리나케 뛰어나가야 하는 판에…….”
하고 말하기에도 좋고 듣기에도 좋은 화제가 처음에는 한여름 만발한 꽃밭처럼 펼쳐졌던 것이었다.
“그렇지도 않아, 요샌 학생처장인지 뭔지를 맡아가지고 어찌나 골치가 아픈지 이 머리 흰 것 좀 봐. 도무지 요새 애들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하라는 공부는 않고…….”
“그놈들이 고생을 안 해봐서 그렇지요. 아, 우리하고 비교해서 요즘 대학생들이야 좀 호강인가요? 우리야 대동아전쟁이다, 육이오다 하구 먹는 일보다 굶는 일이 더 많았지요. 우리 학교 다닐 때 찍은 사진만 해도 요새 아이들 생긴 것하구 비교해보면 이건 숫제 비아프라* 난민이에요. 그놈들이 호강에 겨워서 그러지요. 그저 그런 놈들은 석삼년 빨갱이 아이새끼들 코끝 마주 닿는 최전방 지구에 파묻어 놓구 죽을 똥을 싸게 해얀다구요. 제깐 놈들이 뭘 안다구.”
하고 요즈음 대학생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일대 성토가 있은 뒤,
“아, 말이야 바른말이지 살기가 좀 좋아졌어요? 우리 회사 공장 있는 깡촌만 하더라두, 얼마나 깡촌이냐 하면 돼지우리하구 변소하구 아직두 이 층으루 있는 덴데 거기두 테레비하구 냉장고가 없는 집이 없어요. 또 전엔 부곡 온천 옐 집사람이 하두 쑤시구 결린다기에 식구들 죄 때려싣구 이박삼일루다 다녀왔는데 일본 벱부 온천장두 저리 가라겠드군요. 부곡 가보셨어요?”
하고 온천 이야길 꺼낸 것이 천려일실*이었다. 바둑집을 당구장으로 바꾼 뒤 그런 영업장에 으레 꾀게 마련인 동네건달들 취급에 익숙지 못해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소문을 일찍이 들었던 때문인지, 아니면 좌석의 이야기가 너무도 화려했기 때문인지, 연장(年長) 대접으로 가장 상좌에 앉았으면서도 도무지 초라하게만 보이던 얼굴에 와락 화색이 돌며 큰아버지가,
“야아야, 온천 얘기는 말아라, 오늘 제사 받는 이가 온천 갔다 오다가 영영 못 올 길로 가잴앴니?”
하고 거센 사투리로 끼어들게 됐던 것이었다. 제삿날 고인을 회고하는 일처럼 명분 서는 일은 없다. 학생처장이고 부곡 온천이고 다 이하 생략되었다. 화제의 중심이 되자 어언 기운이 필필 나기 시작한 노인네를 오직 경청할 따름이었는데 미구에* 여봐란 듯이 눈물까지 철철 흘리던 것이었다. 주객이 합쳐 사십여 명이 떠나가라 떠들던 집 안이 불시에 쥐죽은 듯해졌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제는 겡숙이 아바이도 없는데.”
라고 절름발이 숙모가 다시금 속닥거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거실 쪽과는 달리 안방에서는 킬킬 웃음소리가 일었다.
“앙이 겡숙이 아바이 그 울보가 있어야지, ‘성님 말이 맞소, 우리 억울해서 어찌 살겠소’ 하고 둘이 얼싸안고 울지, 저거야 혼자 싱거워서.”
웃음소리에 물 만난 고기처럼 생기가 나가지고 손짓 발짓 신명을 냈다.
“아니믄 돌머룻집 * 조캐 있든지. 그게 또 좀 울보요? 하구한 날 빈 쌀자루 개지구 와서리 어엉엉 울기 시작하던 일을 생각하믄…… 한번은 저 아바이와 있는데 그 식췽이 죽을쌍을 해개지구 쌀자루, 그 저보다 더 꼭 맥힌 마누라장이 헌 치마루다 꿰맨 것, 그 얼룩덜룩한 놈엣것을 끼구 시꺼머꺼먼 낯바대길 하구 들어오니까 저 아바이 불끈 일어나선, 아이고 네가 이게 무슨 꼴이냐아, 고향에선 십 리 안팎으루 느이 땅 안 밟는 사램이 없었는데, 부잣집 고명아들이 거렁뱅이 되는 게 이 나라 백성 신세로구나. 원수옛 놈으 삼팔선, 늬 동겡 작은 아재비만 살아 있어두 그누무 삼팔선은 발쎄 박살을 냈을 텐데, 아이구 내 동생아― 하고 대들보가 떠나가라 하고 왕 울음을 놓지 않겠음. 이쪽 울보도 질쎄라 하고 두 다리 뻗고 앉아 울고. 상이 났느냐고 옆집에서 물으레 왔더 라니깐.”
“저런 저런.”
“저 아바이도 외롭게 됐음. 앙이 울보라고 혼자 냄지 잃이오? 하기사 울보 열은 찜 쪄 먹는 왕울보긴 하지만, 발명왕이 어째 자기 울보고치는 약은 발명 안 했는지 모르겠오.”
남동생댁이 발명왕이란 소리에 웃음을 못 참고 턱을 그러쥐고 나가고 숙모는 더 신이 났다.
“저기 앉은 사램들이야 울보는커냥 썰어두 귀퉁이 하나 안 남는 사램들이 아님? 저 아바이 오늘 울음판 잘못 벌렸지비.”
관절이 말을 듣지 않은 다리 한 짝을 상 한옆으로 쭉 가로 뻗고 앉아 입에 침을 튀겼다.
경숙이 아버지란 그 사이 안에서 계를 대대적으로 하다 망해 이집 저집을 이일 저일로 성가시게 굴던 당숙이고, 돌모룻집 조카란 월남한 이래 밥 벌어먹는 재주라곤 같이 빈손 쥐고 삼팔선 넘어온 친척집들을 차례대로 뜯는 일밖에 없었던 육촌인데, 당숙은 마지막으루 한판 더 벌인 계의 돈이란 돈을 모조리 거머쥐고 야반도주하여 미국으로 이민갔고 육촌은 복막염이 도져서 죽었던 것이었다.
이자놀이가 알차던 영감님이 돈 놓은 데를 일일이 머릿속으로만 기억했지 적어놓은 데라곤 없이 덜컥 세상을 뜨자 너무도 충격이 심해 성한 다른 쪽 다리까지 한동안 못 썼다는, 그러나 지금은 아들 삼형제가 모조리 중동에 나가 돈을 부쳐대는 통에 못 쓰던 다리까지 한결 나아졌다는 그 숙모는 또 이렇게 결론 삼아 덧붙였다.
“장짜리가 저기 몇임메. 학장에 지점장에 사장에…… 이제 우리 집 안도 쭉정이들은 다 골라지고 알백 이들만 남았음…….”
신이야 넋이야 하면서도 문턱을 넘지 않도록 빈틈없이 목소리를 단속하며, 우는 노인네를 가운데 두고 하나같이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면면들을 흘끔거렸다.
“이제 그만 고정 하시지요.”
참다못해 당숙 하나가 애써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모 사립대학의 학장직을 맡고 있다 최근에 학생처장이 된 아버지의 사촌동생이었다. 거기에 힘입어 상공부의 전직 국장으로 지금은 상사(商社)를 열어 봉제완구 무역으로 졸부 소리를 듣고 사는 당고모부 하나가
“형님두 이젠 그 툭하면 우시는 버릇 좀 그만두십시오. 뭡니까, 여자들 보기 창피하게.”
하고 한 발 더 좌중의 의중을 드러내주었다. 그러자 정말 여자들 보기 창피하다 느꼈음인지 안방 문에 기웃기웃 내민 얼굴들을 일별하곤 큰아버지가 흐느낌을 멈추었는데 거기에 힘입어 부자 고모부가 이런 말을 한마디 더 덧붙였던 것이 실수였다.
“형님두 이제 그 나이가 되셨으면 좀 체면도 생각하십시오. 아까두 그게 뭡니까? 말실수 좀 했다기로소니 다 커서 애 애비 된 아일 가지구 간나새끼니 뭐니…… 남들이 들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고모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큰아버지가 고개를 번쩍 쳐들던 것이었다. 눈물로 짓무르니까 한층 모양이 포악해진 두 눈을 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서껀* 문에 고개 내민 사람들을 향해 화등잔만 하게 부룹떴다.
“에구만나.”
하고 제일 먼저 고개를 쏙 들이민 것은 몸의 일부가 불구인 만큼 위기감 포착이 가장 빠른 절름발이 숙모였다. 그 뒤를 이어 학생처장 숙부가 벌떡 일어났으나 그때는 이미,
“에잇 가라데로…….”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큰아버지의 반달형으로 굽힌 손의 모서리가 있는 힘껏 음식상의 한복판을 내리친 다음이었다. 왕년에는 어땠는지 모르나 칠십 노인의 손힘이란 건 뻔해서 노인이 의도했던 대로 상이 그 당장에 두 조각이 나지 않은 건 물론이고, 상 위의 음식들도 매운탕 찌개가 좀 넘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한순간, 큰아버지가 벌떡 일어선 숙부를 향해 비호같이 몸을 솟구친 것이었다.
“이 노옴.”
순식간에 큰아버지의 두 손아귀에 숙부의 넥타이 맨 멱살이 잡혀들었던 것인데 그 경우 없는 노인네의 아귀찬 손아귀에 노인을 도발한 장본인인 고모부가 아닌 그 학생처장 숙부가 걸려든 일은 두고두고 어이가 없다.
더 어이가 없었던 일은 그 일진 나쁜 사촌동생의 창백해진 얼굴에다 대고 백부가 “서울말만 쓰면 다냐”고 고함을 쳐댄 일이다.
그러고 보면 그날따라 음복상에 모여 앉은 ‘장자리’들 억양에 사투리기라곤 없었다. 하긴 그날 그렇게 한데 모인 것이 거친 성격 외에도 턱없는 발명소동으로 서울에 남아 있는 친척들 사이에서 인심이란 인심은 죄다 잃어버린 백부 대신 큰집 대접을 받아 결혼식 같은 데에 어머니가 상좌로 초대되어 가는 우리 집으로서도 근 십 년 만의 일이었다. 남자고 여자고 집 안이 떠나가라 거센 관북사투리로 목청껏 외쳐대던 일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삼년상 같은 것이 있었던 60년대의 일이었다. 사투리란 그것을 쓰던 사람들이 한데 모이면 한층 기세를 올리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세월은 흐를 대로 흘렀고 무엇보다 새로운 터전에서의 생활의 안정이 이룩된 지가 오래였다. 고향말을 실향의 아픔과 함께 잊어버리는 일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날도 사투리를 쓰고 있는 사람은 절름발이 당숙모와 큰아버지 정도로 나중에 생각해보니 현재의 처지가 불우할수록 사투리를 쓰고 었었다. 아마 그날 저녁 누구보다 먼저 큰아버지는 그 점을 알아채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고모부가 아닌 숙부가 걸려들었던 까닭도 그중에서도 가장 말간 서울말씨였던 데에 있었던 모양이지만 죽은 동생을 추모하다 말고 말씨 트집이라니 보는 사람마다 기가 찰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무경우함을 큰아버지는 또 누구보다 먼저 깨닫고 있었다. 얼핏 말을 바꾸어 이렇게 흐령호령하던 것이었다.
“이놈, 주제에 학장이라고? 이노옴 학생들이 공부도 안 하고 뭐를 할 때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그걸 살펴볼 생각은 안 하고 뭐가 어째? 골치가 아파?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인 거다. 아직 통일이 못 되고 이 모양 이 꼴인 거다. 이놈, 그리고 너 이놈.”
어디로든 내빼려고 엉거주춤 일어섰던 이사 숙부의 멱살이 또 달려 올라갔다.
“호강에 겨워 그런다구? 이놈아, 호강에 겨운 놈은 네놈이야. 뭐가 어째? 석삼년은 죽을 똥을 싸게 해얀다구? 이놈아,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오늘 제사 받은 이가 제명에 못 죽은 거야. 통일이 안 되는 거야.”
그날 저녁 손님들을 보내고 난 뒤 어머니는 회갑제사고 아들 승진자랑이고 엉망이 되어버린 일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한탄했지만, 어조는 마냥 부드러운 것이어서 남동생댁과 내가 서로 눈짓을 하며 웃었다. 그 눈짓을 보았는지 어머니는 또 열을 내어
“미추겡이는 미추겡이지만 옛날부터 그 큰아버지가 없는 소리는 안했느니라” 하였다. 둘레 사람의 제지로 두 숙부의 멱살을 내려놓은 뒤 큰아버지는 젓가락을 휘두르며 이렇듯 기고만장하게 연설을 했던 것이었다.
“너어들이 지금 좀 사는 모앵이다마는 너어들 그리 된 기본을 맹그러준 기이 뉘기냐? 오늘 제사 받는 이가 너 대학에 옇어주고, 너 은행에 옇어주고, 너 관청에 옇어주었등 기이 아이냐? 그런데 제삿날 와서리 잔칫날처리 시시대고, 우는 내더러는 되려 체면이 없다고? 아무리 산 사람 한펜: 죽은 사람 한펜이라지만.”
……
“말이야 바른말이지, 느이 집안에서 느이 아버지 신세 안 진 사람이 있는 줄 아니? 지금은 학장이니 사장이니 한다만: 참 느이 아버지 같은 사람도 없다. 그 출세에 그 도량에, 동기간 끔찍이 아는 것하며.
하면서 아들, 딸, 며느리 앞에 놓고 밤늦도록 어머니는 추연해했던 것이지만 가장 맏이로 그중 아버지를 안달 수 있는 나로서도 아버지하면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고작 영어시험 채점하던 일이나 생각 난달까?
광산으로 폭삭 망해가지고 장충동 고급 주택지에서 성북동 산비탈로 하루아침에 영락하여 옮겨 간 뒤 허리띠 대신 고무줄이 든 멜빵을 바지에 달고 일주일에 두 번 고개를 넘어 아버지는 혜화동의 여의대(女醫大)에 영어를 가르치러 나갔다. 두 달에 한 번은 시험지 보따리를 들고 와 내게 채점을 시켰다.
“한 문제에 이십 점씩 조오라. 단어 한 개 틀리면 이 점씩 깎고.”
이르고는 아랫목에 배를 싸고 드러누워 아버지는 신문을 보았다.
“느이 에미는 말이 많아서.”
라는 것이 영문과 출신인 어머니를 제쳐놓고 국민학교 학생인 내게 영문해석 시험 답안을 채점시키는 이유였다. 추측건대 직역이니 뭐니 하고 아버지의 일도양단식 정답에 어머니는 자주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리라. 채점에 관한 한 아버지는 시간을 끄는 일을 딱 질색하는 성미였다. 그러나 내게도 장애는 있었다.
윗목에 둥근 밥상을 펴놓고 앉아 아버지가 제시해준 정답에 의해 맞으면 다 맞고 틀리면 다 틀리는 채점을 일사불란하게 해나가야 되는 시험지에는, 모르는 단어를 영어로 그대로 옮겨놓은 답안이 너무나도 많았다.
처음의 몇 번은 아버지가 일어나 밥상 앞으로 확인하러 왔으나 곧 짜증을 내고 종이에 영어를 써서 번쩍 치켜들게 하였다. 누운 이에게 잘 보이도록 들어 올리는 일은 어려울 게 없었다. 어려운 건 쓰는 일이었다. 결국 점수를 매기는 일보다 나로선 도무지 요령부득인 마구 갈겨쓴 영어단어를 원형에 가깝게 모사하는 일에 시간이 더 먹혔다.
“마이너스 이 점.”
눈알 굴리는 것도 성가시다는 듯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 아버지는 외쳐대던 것이었는데, 하루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여학생 이 고기를 사가지고 찾아온 일도 있다.
“와이로* 가지고 온 학생한테는 점수 많이 주고 그러지?”
내가 이틀에 한 번씩 시내를 건너 산수와 자연을 배우러 다녔던 땅꼬마 청년이 물어본 말이었다. 돈이 없어 대학에 못 간다는 그 청년은 대학에 관계된 일체의 모든 것에 증오심을 내뿜는 일을 서슴지 않았었다.
그날 저녁엔 혜화동이나 삼선교에서 전차를 내려 어른 걸음으로 삼십 분은 착실히 걸어야 당도하는 우리 집에서도 삼십 분은 더 올라가야 하는 산꼭대기에서 방 한 간짜리 날림 벽돌집을 손수 짓고 있던 정 씨 아저씨와 한 씨 아저씨를 불러 불고기를 푸짐하게 먹었었다.
아버지의 광산에서 일하다 광산이 망하자 오갈 데라곤 없는 같은 형편의 동료 대여섯 명과 함께 장충동 집에 와 기식했던 정 씨와 한 씨는, 하나, 둘, 제 살길을 찾아나간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끝까지 남아 있다 마침내 우리 집이 이사하게 되자 그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서 이삿짐을 쌌다. 그리고 그 이삿짐을 따라서 성북동까지 왔다.
당시의 나이가 40대와 20대이던 그 정 씨와 한 씨처럼 한심 한 사람들을 나는 아직 본 일이 없다. 나중에 아버지가 실토한 바에 위하면 그들은 광산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정 씨는 발명취미까지 있어서 다이너마이트를 더 위력있게 만든다고 모종의 비방에 의해 조제한 정체불명의 용액에 푹 담근다든가, 장작을 조금 때고도 방을 더욱 덥게 만드는 실험을 하다 숙소에 불을 지르는 등 끊임없이 물의를 일으켜, 그렇지 않아도 악전고투하던 고용주와 동료들을 골탕 먹였다고 그랬다. 결국은 발명이라면 한 수 더 뜨던 큰아버지의 새로운 발명을 위한 조수로 채용되어 갔지만 그 중년사내의 “코 안 볼게 하는 법” 때문에 한 씨는 귀가 곪아 혜화동에 있는 김외과에 가서 수술을 받은 일도 있다. 성북동으로 이사하고 얼마 안 되고서의 일이었다. 한 씨가 어찌나 코를 고는지 어머니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빚 시달림은 그걸로 모면했다고는 하나 하루아침에 고대광실*에서 오막살이로 옮겨 앉은 회한이 없을 리 없어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판에 어머니가 이번에는 아예 하얗게 밤을 새우게 되었다. 면저 주인이 양계를 하느라 사용하던 바깥마당 닭장 옆의 허드렛방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거기까지 따라온 데 턱 없이 감격한 어머니가 안방과 다가붙은 널찍한 뜰아랫방을 그들에게 내준 것이 불찰이라면 불찰이었다. 뒤늦게 바깥마당으로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별수 없이 어머니가 뜰아랫방으로 가 제발 코를 골지 말아달라고 통사정을 했던 것인데 옆에서 듣고 있던 정 씨가 그 일이라면 걱정 놓으시라고 장담을 하고 나섰다.
“어젯밤엔 잘 주무셨지요?”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아침밥을 짓는 부엌으로 정 씨가 들어서며 의기양양하게 지껄인 말이었다.
“거참 신기하네요. 어떻게 했길래 온 집 안이 떠나가라 골던 코를 딱 그치게 했어요?”
“다 내 발명 입니다요.”
“그것 참 노벨상깜이네. 혼자만 알지 말고 다른 사람도 알게 해서, 코 고는 게 고질인 사람들 좀 고쳐주지 그래요. 도대체 무슨 방법을 썼지요?”
어머니는 밥이 끓어 넘치는 것도 내버려두고 신기해서 야단이었으나 그러나 평소의 떠벌이는 성품과는 달리 그 “희한한 발명”에 대해서는 설명하려 들지 않았는데 며칠 후 한 씨가 귀를 싸쥐고 뒹굴음으로써 그 전모가 밝혀졌다. 정 씨는 자기의 발명 아이디어에 따라 한 씨가 코를 골 때마다 미리 잡아둔 이〔蝨〕를 한 마리씩 한 씨의 귓구멍에 떨어뜨렸던 것이었다.
“성공으 했궁, 코는 골지 않게 됐으이.”
하고 가간사*에는 도무지 무심한 성품인 아버지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했다가 어머니로 하여금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게 했다.
“세상에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한 푼이 새로운 처지에 한 씨의 곪은 귀를 수술하느라 어이없이 목돈을 허비하게 된 일을 어머니는 두고두고 치를 떨었다.
한 씨가 혜화동 김외과에서 수술을 받은 날 저녁엔 어디론가 나가버린 정 씨가 돌아오지 않았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아마 이제야 제 갈 길로 갔나보다.”
하며 어머니는 정 씨의 가출을 은근히 환영했지만 다음 날 아침 정 씨는 시내에 나갔다가 친구를 만나 자고 오는 길이라며 알사탕 한 봉지를 사들고 태연히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은 비록 아버지가 여의대에 나가 매달 월급을 들여오고는 있었으나 아버지의 위장병으로 수입 약품이니 토종꿀이니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뿐만 아니라 집을 포기하고서도 해결이 안 된 빚을 다달이 얼마씩 갚아나가야 하는 숨가쁜 처지였음에도 어머니가 서둘러 정 씨와 한 씨를 내쫓지 않은 일이다.
“느이 아버지 턱없는 성격 때문이었지 뭐긴 뭐겠니. 아 글쎄 집안 식구들은 빚쟁이들에게 둘러싸여 조석도 간 데 없는데 내가 데리고 있던 사람들입네 하고 한 떼거리를 몰고 들어왔던 양반이 그 양반이야. 더더군다나 원체 못난 놈들이 돼서 내 곁을 떠나면 그날로 굶어죽을 거라면서 그 두 화상을 얼마나 싸고돌았게.”
라며 그 비현실적이던 당시의 일을 어머니t三 아버지의 턱없는 성품에 떼밀고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아무래도 ‘닭’ 에 있었다. 새로 이사해 들어온 집의 허물어져가는 닭장을 보고 어머니는 절박한 심정에서 닭 칠 일을 생각해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답십리의 부화장에 정 씨와 한 씨를 데리고 가 기계로 깐 노란 병아리 백 마리를 구멍 뚫린 상자에 날라 온 것은 한 씨의 귀가 거반 나은 삼월의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다.
겨우내 갇혀 있던 오리가 한 줄로 서서 뒤뚱뒤뚱 냇가로 가고 시냇물이 왈왈 소리 내어 흐르던 저 너머로 키가 큰 어머니가 불쑥 솟아오르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마침 아지랑이가 끼었던지 종이상자를 인 엉성한 어머니의 모습이 물살 지는 연못에 비친 그림자처럼 마구 일렁이던 기억이다.
“병아리다.”
이웃 수도원의 동네 어린이를 좋아하는 수사(修士)와 나란히 앉아있던 옆집 토방머리에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내가 소리 질렀다.
“병아리라니.”
내게 사과를 깎아주고 있던 목소리가 여자처럼 가녀린 수사가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네, 오늘 우리 엄마가 병아리를 사 와요.”
수사가 문득 칼을 내려놓고 허공에 엄숙히 십자를 그었다.
“생명은 성스런 거야.”
그러곤 잠시 후 우리 앞에 당도한 어머니 일행을 맞아 다시 한 번 정성스레 상자에 대고 십자를 그어주었던 것인 데, 그 성스러운 생명이 하룻밤에도 서너 마리씩 죽어나가 우리 집안을 글자 그대로 초상집을 만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의 어머니 자리는 진작에 비어 있고 이윽고 닭장이 있는 마당으로 통하는 부엌문이 기운 없이 열렸다. 그리고 미물의 시신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어머니가 비극의 여주인공 같은 모습으로 그리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오늘은 다섯 마리다.”
마루 끝에 그 심란한 것을 내려놓고 누구에랄 것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병아리보다는 어머니의 키가 작지 않고 크다는 사실에 깊이깊이 우울해지고 있었다. 양옥집에서 쿠키 같은 걸 구우며 살 때에는 돋보이기만 하던 키가 이제 와서 눈에 거슬리기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허리를 구부리고 병아리를 키우는 닭장 옆 허드렛방으로 들어갈 땐 그 덜렁한 키가 너무도 멋쩍게 느껴져 무심히 마당을 들어서다 얼굴이 빨개진 일이 여러 번이었다. 어느 날은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나와 친한 수사가 마침 판자 쪽으로 된 대문을 사료봉투를 깍지 껴 안은 손등으로 미는 어머니의 등을 보며
“느이 어머닌 키가 몇 센치시냐?”,
하고 무심히 물은 일도 있어, 오 학년이 되며부터 부쩍 크기 시작하는 키를 거울에 비춰 보며 기분이 암담해졌었다. 그러나 정 씨의 견해는 달랐다.
“세상만사는 겉볼안*인 거라구. 후리후리하게 키 큰 사람치구 속 트이지 않은 사람 봤어? 아 이 집 사모님만 해두 그렇직…… 사람은 뭐니 뭐니 해두 속이 트여야 앞날이 트이는 법이라구.”
그새 삼 분의 일로 줄어버린 병아리를 마당으로 내몰면서 키가 작은 한 씨를 향해 그렇게 열을 내어 떠들던 것을 들은 일이 있다. 하지만 어디 가나 곧 눈에 띄는 키다리이던 정 씨가 앞날이 트였다는 소문을 들은 일은 여지껏 없다. 그 불운한 중년이 그래도 기를 펴고 산 것은 평생에 단 한 번 어머니의 병아리를 기르던 그때가 아닐는지.
정 씨는 어머니가 구해 온 양계책을 들여다보며 나날이 늘어나는 설사병 난 병아리의 주둥이를 억지로 열고 구아니딘* 가루를 섞은 모이를 먹였다. 그리고 애초의 기대와는 너무나 달라 실망의 빛이 역연한 어머니를 향해
“원래 양계는 늘 하는 사람도 반타작이면 성공으로 치는 거랍니다. 첫 번에 백 마리에 삼십 마리 건지면 성공한 거라구요.”
하며 씩씩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어 있던 어머니가 그럴싸하게 듣고 있으면 정 씨는 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전에 우리 집안 형님 하나하구 했을 적엔 천 마릴 사 왔는데 스무 마리 남더라니까요. 그뿐이게요. 그중에 열 마리는 또 수탉이라니까요. 생각 같아선 그놈의 부화장에 가서 불을 싸질러버리고 싶더라니까요. 그런데 그 열 마리가 알을 낳기 시작하는데 이건 숫제 소나기예요. 알도 알이지만 미끈하게 큰 놈들이 닭장 안에서 구구구 모이를 주워 먹는데 어찌나 이쁘던지, 이 재미에 짐승 기르는구나 했었지요. 그다음에 천 마리 또 받아다 길렀더니 이번엔 오백 마리 남는 거예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랍니다. 헛헛헛, 사모님 너무 심려 마세요.”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정 씨의 종횡무진 활약하던 양계업이니 집안 형님이니는 모두가 말짱 허풍이었다. 그렇다고 병아리를 길러 본 일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의정부에 있는 양계장에서 막일꾼으로 일했다는 점만이 달랐다. 거기서도 발명 취미를 못 버려 알낳는 기계를 실험하다 중병아리 몇십 수를 떼죽음 시키고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고 내쫓긴 것이 그의 양계 경력이긴 했지만.
그 같은 그의 전력을 몰랐던 게 어머니에겐 불운이었다 할 밖에 없다. 얼마 있지 않아 정 씨는 그의 발명 취미를 우리 집 병아리에 실험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그나마 남아 있던 병아리란 병아리가 다 죽어 있었다. 그래도 입은 있다고 한다는 소리가 “설사병으로 다 죽어가는 병아리를 그냥 두고만 볼 수가 없어서” 였다. 결국 정 씨는 내쫓겼고 한 씨도 그를 따라 우리 집을 나갔다. 정 씨가 아버지에게 애원했으나 토산의 타격과 위장병의 악화로 원래의 이기적인 성품이 첨예해져 있던 아버지는 신경질을 냈을 뿐이다. 그들이 짐을 챙겨 산꼭대기를 향해 떠나던 처량한 모습은 나는 학교에 가 있어서 보지 못했다.
산꼭대기로 간 이유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별장과 벌 치는 집밖에 없었던 계곡엔 이미 사람들은 밀려들 대로 밀려들어 뒤미처 성북동에 아직 무허가 주택을 지을 여지가 남아 있다는 소식에 접한 시내(市內)에선 도저히 발붙일 길이 없었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거기에서 블록을 찍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날림 집들이 미처 파먹어 들어가지 못한, 그래서 이미 점령당한 보다 낮은 구릉들에 비해 마치 하늘 끝까지 솟구치기라도 한 것처럼 내겐 여겨지곤 하던 서쪽의 북악과 연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보며 벌꿀 냄새 묻힌 바람이 부는 잡목 숲을 가로질러 절름발이 당숙모가 세 어린 아들과 함께 울며불며 집을 짓고 있던 산꼭대기르 올라가면 어느덧 잿불에 묻어 굽는 감자냄새가 코를 찌르고 그러면 아 이제 산꼭대기로구나ㅡ 하고 까닭도 없이 까마득해져 왔다.
잡목 숲 사이의 나무 기와 얹은 꿀벌 치는 집이며 칠 벗겨진 목제 덧문이 완강히 창 마다 닫혀 있는 비어 있고 덩치 큰 옛 일인(日人) 별장들은, 그 달콤함과 예쁨은 그럼 바로 그 꼭대기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날림집 짓기에 여념이 없는 사납고 거친 사람들, 사납고 거친 광경들을 좀 ㄷ1 분명하게 좀 더 심술궂게 내게 보여주기 위한 모종의 속임수였다고 홀연 깨닫기도 했다.
“어서 오나라.”
진흙을 반원형으로 쌓아 올린 부뚜막 앞에 구부러지지 않는 다리를 힌 치마 밑으로 뻗쳐놓고 앉았다가 절름발이 숙모는 엄마 심부름인 쌀자루 등을 힘 겹게 들고 올라오는 숨 가쁜 나를 반색을 하며 맞았다.
“무스 거 또 올려 보내기는 우리. 겡순이가 수고가 많구나. 꾸운감재 먹을래.”
쌀자루를 소중히 천막 안에 들여놓고 절름발이 당숙모는 으레껏 화젓가락으로 부뚜막 아궁이 속 사위어가는 잿불을 헤쳤다.
하늘은 스며드는 끈질긴 어둠으로부터 기를 쓰고 도망이나 치려는 듯 한없는 위쪽에 둥실 떠선 환하게 밝고 어디선가 감자 불 헤치는 소리를 듣고 당숙모의 세 아들들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왔다.
“이 간나새끼들.”
당숙모가 화짓가략을 아궁이 앞으로 때에 까맣게 전 얼굴을 다투어 들이미는 두 아들의 머리 위로 기운차게 휘둘렀다.
“이 씩췽이 간나아새끼들.”
그러면 또 으레 폭이 두 뼘은 실히 되는 고랑 너머 저쪽 집 짓는 천막 근처 에서,
“간나새끼.”
하는 흉내 내는 소리와 킬킬 웃는 소리가 잇달아 났다.
처음엔 불편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당숙모가 그쪽으로 갔으나 그러나 곧 들은 체도 않게 되었다.
잿불더미 속에서 꺼낸 탄 감자는 놋젓가락에 꽂아주는 대로 마다 않고 받았었다.
천막과 부뚜막 사이, 다 뜯기고 남은 산 잔디 한 자락이 거기 남아 고무신을 벗어 그 위에 얹곤 주저앉아 감자의 껍질을 벗기노라면 참 깊고도 넓게도 판 경계 표시의 고랑이 여기저기서 밝히기 시작한 남폿불 아래 고요히 그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내 쪽을 향해 딱 아가리 벌렸다.
아아 저렇듯 가진다는 것은 끔찍한 상처로군 하고 깨달았었을까? 그때 열한 살의 나는.
터무니없는 배합률의 시멘트와 모래의 혼합을 급급히 함석과 나무의 블록 틀에 쑤셔 넣는 소리는 땅거미가 짙어질수록 급해지고 반쯤 올라간 블록담 혹은 천막 근처로 밥 짓는 하얀 연기가 자옥이 깔렸다.
“내일이면 상량하겠음메.”
“세상에 한나절에 집 한 채라니.”
“시멘트벽돌 찍는 게 어렵지, 쌓는 거야 뭐 공들을 거나 있나요.”
“……집 같지도 않아서.”
“……같지 않은 게 어디 집뿐이오. 사는 것부터가 같지 않은 지가 언젠데.”
나는 채 다 먹지 않은 군감자를 놋젓가락째 임시 부뚜막 가장자리에 놓고 슬그머니 일어섰다.
고랑을 사이에 두고 당숙모와 이웃 여자가 마주 서서 얘기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아무도 몰래 그곳을 빠져 내려왔다. 나로선 표현할 길이 없는 서글픔에 싸여……
그러나 정 씨와 한 씨에게 고기 먹으러 오라는 말을 전하러 갔을 때에는 이미 그처럼 내 가슴을 에었던 고랑도 천막이 들어선 빈터도 감자 굽는 냄새도 없었다.
단호한 블록담을 두른 새로 지은 집들이 빼곡 들어차 있을 뿐어었다. 다만 북쪽 음지에 아직 집이 들어서지 않은 곳이 남아 있어 침울한 표정의 사내들이 서툰 솜씨로 시멘트 블록을 찍어내고 있었다.
“젠장 일일이 벽돌을 찍어내서 집을 짓는다니.”
“다행이지 뭐야. 이걸 산다고 생각해봐. 그 돈을 어떻게 당해내.”
벗어부친 알통에서 나체 여인의 문신이 팔 임자의 움직임에 따라 얼굴 뜨뜻한 모양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한 구레나룻 시커먼 덩치 큰 사내와 대조적으로 몹시 작은 사내가 떠들어대는 뒤쪽에서 하나 같이 창백한 낯빛인 정 씨와 한 씨가 앞쪽의 사내들보다 더 못한 솜씨로 시멘트와 모래의 혼합을 벽돌 틀에 조심조심 틀어넣고 있었다.
“사모님이 고기를 먹으라고.”
정 씨의 팔이 금시 눈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한 씨는 처음부터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내가 데려다 살까?”
하고 살짝 나를 일별하며 땅을 향해 음흉하게 웃어 정 씨가 눈을 닦다 말고 어리둥절해했다.
“그 안대 하고 다니는 여학생, 고기 가져왔다는.”
정 씨가 사모님에 대한 감읍도 잊고 기가 차다는 얼굴을 했다.
“소학교도 다 못 마친 네놈이.”
“흥 그것도 과남할걸.* 병신 주제에.”
“병신?”
“내 다 봤다구. 그 안대 왜 하구 다니는 줄 알아? 보성학교 밑으로 지나오는데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떼데. 시퍼레 시퍼레.”
느닷없이 한 씨가 시멘트 삽도 떨어뜨리고 아이구 배야 아이구 배야 하고 웃어젖히기 시작해 이웃의 블록 찍던 사내들이 놀라 뒤돌아보고 내가 그 몸집 작은 불운한 사내의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탄력이 넘치는 모습에 아연해졌다.
그로부터 한 달 후 한 씨는 아버지의 은수저와 함께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고기를 가져왔던 그 여학생은 다음 해 여의대의 부속병원에서 다시 보았다.
“교수님. 음식물을 씹어 삼키듯 그냥 삼키세요. 그냥 삼키시면 돼요.”
여전히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방금 아버지가 토해낸 고무줄 관과 아버지를 안타까이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모처럼 삼켜졌던 위산 검사용 튜브는 재채기 때문에 다시 토사물과 함께 아버지의 목구멍으로부터 튀어나오고 아이 참 하고 여학생이 무의식적 으로 안대를 벗었다.
그 안대 밑으로 손바닥만 한 시퍼런 점이 드러나 모두 놀랐다. 눈두덩은 물론 눈썹 위까지 그림물감 칠을 골고루 두텁게 한 것처럼 검정 사마귀까지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실내는 잠시 환자에 대한 우울함도 잊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에다 대고 환자가
“매카나기* 왔응이 이 박새 이제 다급하게 됐소.”
하고 차갑게 내뱉어 한층 다들 어리둥절해졌다.
둘러서 있던 사람 중 그런 시사적인 발언의 상대가 될 만한 사람도 없었지만 검사용 튜브를 삼키지 못해 벌써 두 시간이 넘도록 죽을 애를 쓰다 말고 매카나기라니, 검사용 철제 침대에 드러누운 여윌 대로 여윈 환자의 얼굴이며 넥타이를 푼 흰 와이셔츠 칼라 속의 빈약한 목, 그리고 그 둘레에 흩어진 미처 치우지 못한 오물들을 바라보며 하나같이 말문이 막혀 할 밖에였다.
그때의 광경을 써 남긴 나의 여고 문예반 시절의 수필에 이런 것이 있다.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필이 있지만 거기에 병으로 죽어가는 자의 정치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관심도 덧붙여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기(前記)한 수필의 명편 가운데 나오는 초추의 양광이 병실의 유리창을 힘없이 쪼이고 있던 가을날이었다. 어느덧 흑 하고 어머니의 흐느낌이…… 운운’ 하는 것인데 물론 실제로 어머니의 흐느낌 같은 건 없었다. 물론이라는 명백한 표현을 쓰는 이유는 나의 어머니의 타고난 성질이 감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경우 흐느끼는 사람은 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외로 울어야 될 때 가서 울지 않는다. 우는 것은 울지 않아도 되는 이미 극한 상황이 지나가버린 연후이다.
그날 어머니가 울기는 했다. 그러나 녹초가 되어버린 환자를 앰불런스에 싣고 집에 돌아와서였고 이유도 깊어질 대로 깊어진 환후라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완고하게 표명해 보이는 지난날의 분야에 대한 관심, 그러자 오히려 둘레 사람들 눈에 다시 한 번 극명해진 그리로의 복귀에의 영원한 불가능이 아니었다.
실습 여의과생이 둘레 사람들의 시선에 쫓기듯 다시 안대를 두르고 아버지가 자기 말에 대한 주위의 무반응에 감았던 눈을 신경질적으로 번쩍 뜨자 환자가 튜브를 삼키기 시작할 때부터 안절부절이던 큰 아버지가 덥석 한 발짝 다가가며 이렇게 외치듯 입을 열던 것이었다.
“맞소 맞소. 작은애비 말이 맞소. 매카나기 왔응이 이제 이 박새 똥끝이 타게 됐소. 앙이 그렇게 독재를 쓰등이.”
“쉿 말으 함부로 하능 기이 아님.”
환자가 문득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는데 따지고 보면 중증의 환후가 흔히 가져오는 경미한 정신착란 증세가 그때 최초로 아버지를 찾아왔던 것이지만 미(美) 대사의 신임(新任)에 대한 시평(時評)의 밑도 끝도 없음이 그 말을 받는, 실은 매카나기가 누군지 모르는 게 뻔한 큰아버지의 밑도 끝도 없음과 만나자 밑도 끝도 없기는커녕 뭐랄까? 강대국 대사의 약소국 부임이란 게 원래 그렇게 치명적인 중병을 확인하는 그런 자리에서나 주고받게 마련인 것이라 순간적으로 누구에게나 느껴졌달까, 죽어가는 동생과 건강이 철철 넘쳐흐르는 형의 척척 장단이 맞아 들어가는 병실 문답에 환자를 에워싸고 서 있던 다른 사람들 또한 밑도 끝도 없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던 것이었다.
그 장면을 예의 나의 여고 시절 수필은 다음과 같이 계속해 적고 있다.
——닮았구나——
어머니의 유똥* 치마폭 옆에 서서 나는 불쑥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본디 부친과 백부는 일러주지 않으면 처음 보는 사람은 형제라는 걸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생김새가 달랐다. 부친은 고수머리에 키도 작고 얼굴도 선천적인 위약증으로 말미암은 불건강한 흰빛인 데 반해 백부는 구척장신에 이글이글 타는 듯한 정력적인 붉은 얼굴이었다. 생김새뿐 아니라 분위기도 판이하여 빚에 몰려 장충동의 고급 양옥을 팔고 당시론 오지나 다름없던 성북동 방 세 개짜리 쓰러져가는 한옥으로 이사 오기 전 노상 드나들며 정박아 딸과 함께 사발농사*를 짓던 먼 친척 아주머니 하나가 큰아버지를 싫어하는 어머니의 비위도 맞출 겸
“옥골선풍* 동생한테 어떻게 막일꾼 같은 형님이 있는지.”
했을 지경이었던 것인데 또 나도 아버지와는 천양지차로 언행이라고 야비하기만 한 큰아버지를 내심 멸시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날 그 병실 풍경에서 본 그들은 문자 그대로 일심동체였다. 부기(附記)할 일은 백부 쪽에서 상향(上向)하여 부친에게 합쳐져 왔다기 보다 부친 쪽에서 자기보다 훨씬 아랫단 쪽에 위치한 그의 형님 쪽으로 부합해갔다고 느껴졌던 일이다…… 운운
그 나이다운 과장조로 일관된 문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형제의 문답은 비단 병원 검사실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다.
“일본이 망할 거라고 그러지 않았음? 진주만을 공격하고 도오죠오*가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땐데 말이오. 그때도 나는 믿었음. 아니나 다를까? 몇 해 못 가 항복으 하지 않았음? 이번에도 틀림없을 기요. 앙이 이 박사 그 늘그니 권세에 눈이 어두워 그리 노망을 떨더니.”
하고 앰불런스 안에서 아버지의 죽은 듯이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기염을 토하던 것이었다.
“영어말 하는 사램이 득세르 하는 세상 온다고 하던 말도 봅세 딱 맞추지 않았음? 어데서드라 가께우동 먹으멘서리 그래 맞다 도서관에서 밤새우고 공부하고 나오다가 새벽일 가는 내하고 약속으 하고 만나서리 염 씨 하는 우동가게에 들어가서…… 참 염 씨는 아직 거기서 국수르 파는지. 우리한테 우동으 싸게 팔았는데.”
“싸게 팔긴요.”
아버지가 들것에 담요를 덮고 반듯이 누워 있다가 감은 눈을 뜨며 비시시 웃었다.
“팔다 남은 불은 우동 버리기보다는 인심 쓰는 체했던 거지. 공짜로 주었다면 또 몰라도. 버릴 걸 돈 주고 사주었으니 오히려 염 씨가 우리 신셀 졌던 거지.”
“맞소 맞소. 하긴 우리가 언제 누구 신세 지고 산 일이 있소? 신세지고 살자구 들었으면 진작에 망했을 거요. 아암 망했구말구. 아암 신세 질 생각은 애초에 말아야지.”
둘만이 소유하고 있는 추억으로 치달았다. 동생은 집으로부터 송금 한 푼 없는 고학을, 형은 날품팔이를 하며 형제는 동경살이를 같이 치렀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지 작은애비, 자네 말이 맞지 않았던 일은 없음메. 그놈의 늘그니 통일할 생각은 안 하고 그저 자기 앞 챙기는 데만 급급하더니.”
지금 당장 대통령의 하야가 있기라도 하닥는 듯이 의기양양해하는 큰아버지를 향해 누운 아버지가 어린아이의 그것 같은 미소를 잔잔히 지어 보내주고 병실에 이어 한 명도 빠짐없이 환자를 수행하고 있던 외삼촌 당숙들도 환자의 증세가 주는 긴박감을 잠시 잊는 듯 했다.
오직 어머니 혼자 한층 더 핏기 가신 얼굴을 하고 있다가 집에 돌아가자 앰불런스 안에서 혼곤히 잠이 들어 모두들 진땀을 빼고 고이 데려다 누인 아버지도 아랑곳 않고 방성통곡을 했다.
“누님 이러면 안 돼요. 이럴수록 기운을 내야지요.”
외삼촌이 황급히 달랬으나 어머니는 울음을 그칠 염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달라졌다 사람이. 아까 헷소리하는 거 봐라. 사람이 달라지면 변고가 생기는 법이야.”
“그야 미국하고 관계된 일이면 예전부터 관심이 많다 보니까 그런 거지요.”
“누가 그 얘기니? 언제 그 양반이 그 형님한테 그런 소릴 하더냐구. 미국이라면 구호물자밖에 모르는 그 천하무식하구 매카나기니 뭐니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었냐구. 매카나기가 다 뭐냐. 경우에 없는 일 하나라도 덜 당하려고 앞문으로 오면 뒷묻으로 나가고 뒷문으로 들어오면 앞문으로 도망 나가던 양반인데. 아이구 아이구.”
방바닥을 치며 소리 내어 흐느껴 울었다.
역설적이게도 어머니는 형제간인 두 사람의 우애로운 모습에서 결정적인 불길한 조짐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트럭 사주면 트럭 팔아먹고 가게 내주면 장사는커녕 옆집 주모하구 놀아나 조강지처나 뚜드려 내쫓곤 그리곤 밑천 빨리 다시 안 대준다고 와서들 부수고 그뿐이냐 밤낮 무슨 발명인가 한다고…… 천하에 저런 형이 또 있겠냐? 그래서 그 형이라면 뒤꼭지도 보기 싫어했던 게 아니냐? 그런데 글쎄…… 두고 봐라 느이 매형은˙ 이제 못 일어난다. 사람이 달라진걸.”
기승스러웠던*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니와 뒤꼭지는 고사하고 미구에는 큰어머니까지 대동하고 큰아버지는 매일 같이 우리 집에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술집 여자였대서 아버지는 형수라 별반 불러본 일도 없던, 그래서 피치 못하게 우리 집에 오게 되는 경우 시동생을 피하느라 찔쩔맸던 그 큰어머니가 피하기는커녕 이번엔 당당하게 아버지 앞에 등장하게 된 까닭은 주사 때문이다.
수술을 받기는 했으나 입원도 소용에 닿지 않아 집에 돌아와 오직 진통제 주사에 의지하여 아버지는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던 것인데 대폿집 안주인을 비롯한 큰어머니의 갖가지 경력 가운데에 보조간호원의 경력도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큰어머니는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어김없이 큰아버지를 앞세우고 나타나 마악 약 기운이 떨어져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한 아버지의 팔소매를 걷었다.
“살살 놓으라.”
환자의 말라빠진 팔뚝에 비대한 큰어머니가 무감동하게 알코올 솜을 문지르기 시작하면 큰아버지는 옆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그렇게 일렀다.
그러나 그 소리도 들은 척 만 척 지난날의 무안함을 이걸로 다 갚겠다는 듯이 살찐 팔목에 힘을 주어 쿡 바늘을 찌르는 것이었는데 한번은 아버지가 “아” 하고 비명소리를 내어 큰아버지가 “이 돼지 같은 년 살살 놓으라니까” 하고 벽력같이 악을 썼다.
돼지 같은 년이라니, 같이 앉아 있던 어머니와 나는 차마 큰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본인은 태연하기만 하였고 큰아버지도 큰어머니가 주사 놓기를 마치자 이번엔 잔뜩 점잔을 뺀 목소리로 “수고했소 마누라. 예전 솜씨가 점점 나오는구만.”
하여 다시 한 번 주위를 어리벙벙하게 하였다.
그러곤 천연히 어제에 이어 발명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어서 더구나 주사로 순식간에 명랑한 기분을 되찾은 아버지가 즐겁게 귀 기울이는 것이어서 어머니는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후르르 떨치고 일어섰다.
“세상에 이게 무슨 꼴. 패가망신이라더니 다 잃다 못해 나중엔 건강까지. 거기다 온 저 엉터리없는 이야기라니.”
하고 마침 문병 차 온 이대 출신이어서 어머니와는 그중 죽이 맞는 당숙모 하나를 붙잡고 눈물 섞어 간절히 하소연한 일도 있지만 그러나 큰아버지의 발명 이야기라면 큰아버지 내외를 어머니 못지않게 싫어하는 나도 재미가 깨가 쏟아졌다.
대폿집 출신 큰어머니의 소생인 남매 중 동생 되는 아이가 국민학교 환경조사서의 보호자 직업란에 “발명가” 라 썼다지만 정말 큰아버지로선 청춘을 다 바쳤던 일이 바로 그 일이었다.
“기계라면 뭐니 뭐니 해도 자동차 기계가 제일이 아니겠음? 또오 일정시대부터 자동차 하면 문제가 기름이고오. 어떻게 하면 기름을 적게 먹느냐 아니 숫쩨 안 드느냐 하는 것이 연구 목적이 아니겠음매?”
하루는 직영 과수원의 사과를 한 바구니 가지고 아버지의 병문안을 온 나와 친한 수사가 새로운 청중으로 껴 큰아버지는 아예 그렇게 새로 잡아 얘기를 시작했다.
아마 수사의 검은 제복이 큰아버지의 마음을 몹시 사로잡았던 것 같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의 고향 동네 가까이에도 꽤 큰 수도원이 있었다는 것인데 거기 나이 젊은 신부가 특히 부친 형제를 사랑하여 아버지와 백부가 동경행을 결심하게 된 것도 독일 유학인가를 했다는 그 신부에게서 감화를 받은 나머지였다는 것이었다.
“신부님이니 잘 알아들으실 것 같아 특별히 말씀이오다만 사람 하는 일에 하늘이 안 봐줘서 되는 일이 있음? 말하자면 아직 내 일을 하늘이 안 보아준 거라.”
그러고는 새삼 감회가 가슴을 쳤던지 “야아야 나 한 대 피울란다”
하고 병자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반쯤 돌아앉아 안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백양갑을 꺼냈다.
“하지마 내두 저 사람 일은 하늘이 봐준당이.”
담배 한 대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이 느닷없이 터진 하늘타령을 어떻게 감당해야 좋을지 몰라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수사의 좁은 어깨 너머 벽만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문득 활짝 펴진 음성으로 백부는 반듯이 누워 눈을 감고 있던 부친의 창백한 이마를 가리켰다.
“아 우유 배달하며 공부를 하는데 그놈들이 학도병입네 하고 잡아가지 않겠음? 기가 막혀서. 남의 집 신주단지를 즈이네들 총알받이로 데려간다니. 야아가 출정하던 날 밤은 이불을 둘러쓰고 밤새 울었당이. 조상님네들이 그리 원망스러울 수가 없고. 근데 빠져나왔거든.”
마치 만주로 향하는 죽음의 행렬에서 그때 그렇듯 구사일생으로 도망 나온 것이 동생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 듯이.
“아아 네에.”
그런 얘기라면 최선을 다해 듣는 도리밖에 없다는 듯이 수사의 앉음새가 한층 공손해지고 큰아버지의 목청이 더 기세를 띠었다.
“빠져나오기만. 함흥 무기고를 불 지를 심산을 하지 않았겠음. 함흥 무기고가 어디요. 북쪽지방으루다 걔네 헌병 무기고 중 젤 큰 데 였는데 근데 그만 그 사지를 찢어 죽일 홍가 놈이 등을 돌리는 바람에.”
바로 그 홍가 놈이 눈앞에 있는 듯 그래서 당장에 사지를 찢어 죽일 듯 큰아버지의 두 눈이 있는 대로 부릅떠졌다.
“하긴 그놈이 은인이다이. 그놈이 찔르지 않아서 가막살이를 면했던들 미군들과는 상봉도 못했겠으니까.”
“형님 왜 이러오.”
아버지가 감았던 눈을 뜨고 이맛살을 찡그렸다.
“응 그래그래.”
큰아버지가 어른 몰래 못된 짓 하다 들킨 아이 얼굴이 되어 얘기를 중단했다. 그러나 실은 아버지는 계속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던지.
아버지가 수감 중에 8·15를 맞고 거기서 공공건물을 접수 중이던 미군들을 만나 일찍이 선견지명을 가지고 동경유학 시절부터 닦아놓은 영어회화 실력을 인정받고 그를 계기로 눈부신 출세가도에 올랐다는 그 우리 집의 신화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수사는 나중에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
학도병으로 끌려 나가다 탈출하여 원수의 무기고를 폭파할 작정을 했었다는 아버지의 무용담에 어지간히 감격 했던 수사가 이번엔 사과 바구니가 아닌 꿀 항아리를 들고 재차 병문안을 온 것이었다.
마침 모르핀을 맞고 잠이 든 아버지 머리맡에 수사는 두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아 어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날 그 애젊은* 수사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로 죄수 신분에서 일약 점령군의 보좌관으로 발탁된 그 시대다운 전설 외에도 여자 고무신을 신고 도망친 이야기가 있다.
육이오가 난 며칠 후의 일이다.
아버지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아버지가 한때 나가 교편을 잡았던 학교의 학생 한 명이 낀 체포대가 앞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었으므로 꼼짝없이 그들에게 양 겨드랑이를 잡혀갔는데 그들이 세워놓는 데가 웬 계단이 길길이 뻗친 아래였다.
“올라가시오 동무는 사형이오.”
라는 것이 그들의 딱 한마디 변이었는데 고개를 숙이자 웬 검정 여자 고무신이 한 켤레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하고 신고 내뺐는데 그 순간 앞문을 누군가가 쾅쾅 치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 집이 퍽 커서 앞문과 뒷문이 각각 동네가 달랐답니다.”
잘살던 지난날을 떠올리자 어지간히 사무쳤던 듯 두 눈에 눈물마저 어리면서 어머니가 수사에게 설명했다.
“모르는 사람은 뒷문으로 나가면 감쪽같다는 것을 통 모르게 되어 있었지요……문 두드리는 소리에 금방 꾼 꿈이 얼른 켕겨온 거예요. 뒤돌아볼 것도 없이 뒷마루로 나왔는데 마침 거기 댓돌에 얹혀있었던 것이 우리 집에 드나들던 참기름장수 할머니 검정 여자 고무신이었던 거지요……”
지금 와 생각하면 여자 고무신을 신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뒷골목으로 빠져 달아나는 젊은 남자의 모습은 그저 실소만이 자아지고 그래 그때 그런 난리판 시대가 있었지 싶기만 한 것이지만 특히 어머니는 뭐랄까 일종의 수사력을 갖추고 있어 들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구나 우리가 그전부터 이렇게 다 쓰러져가는 집 에서 닭이나 치며 살던 사람은 아님을 이번 기회에 똑똑히 밝히고 싶었던 모양으로 그 어느 때보다 빛나던 어머니의 화술이었다.
“정말 하늘이 도우셨군요.”
수사는 완전히 감복하였다.
“네, 누구나 그런답니다. 하늘이 돕는 분이라고…… 앞일을 얘기해서 틀린 일이 없었답니다. 일본이 망할 거라는 거며 분단이 될 거라는 거며…… 영어로 남북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면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는 미국 사람이 없었답니다.”
단순한 남편의 칭송을 넘어선, 그런 대단한 사람이니 절대로 이대로 죽을 리가 없다는 안간힘이 어머니의 말에는 서리어 있었던 것이지만 그러나 백부의 발명을 돌보지 않는 하늘은 아버지의 암도 돌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영등포 큰아버지 집에서 있었던 망자(亡者) 굿에는, 가장(家長)을 잃은 슬픔도 잠깐, 타고난 생활력을 십이분 발휘하여 구직전선에 나서 있던 어머니 대신 내가 갔다.
“아버지가 뭐가 되어서 저세상에 가셨는지 보고 오라.”
는 애절한 지시였지만 나는 볼이 부을 대로 부어버렸다. 성북동에서 영등포까지의 거리 때문이었다. 더구나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자상한 부정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데다 병이 깊어지면서부터는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을 때느라”고 여편네고 자식이고 간에 폭력이나 다롬없는 신경질을 부려댔던 아버지였으므로 굿에 쓰일 아버지가 생전에 쓰던 물건들을 싼 보따리를 들고 두 시간도 더 넘어 걸리는 길을 내내 눈물을 닦으며 갔다.
굿은 엄청나게 넓은 큰아버지의 집 앞뜰에서 있었다.
정말이지 지금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그 큰집의 앞뜰이다.
그처럼 넓은 넓이를 확보하기 위해 무언가 트집을 잡아 앞집을 재판 걸었다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아직 아버지가 고위직 관리로 있었던 때라 쉽사리 승소하여 그 집에서 채소밭을 갈아먹던 넓은 땅을 한 입에 꿀꺽 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트럭이니 가게터와 함께 부친이 그 형님에게 마련해준 생활의 방편들 중의 하나였으니만큼 거기서 부친의 망자 굿을 하게 된 것은 인연이라면 인연이랄 수 있는 일이었다.
콜타르를 칠한 판자 담 한옆으로 자동차 배기가스에 시든 토마토 두어 포기가 지친 듯 서 있고 갖가지 자동차 부속품들, 바로 그것들을 세상이 깜짝 놀랄 발명품으로 만들기 위해 이처럼 넓은 터가 필요했던 바로 그것들이 오늘만은 차지하고 있던 한복판을 물러나 한옆에 진을 친 것처럼 모여 놓아져 있는 황량한 마당 한가운데 멍석이 몇 장이고 깔렸다.
“착한 사람이었다우.”
뚱보 큰어머니가 무슨 생각에선지 생전에 그리 자별한 일 없었던 시동생을 몇 번이고 그렇게 간절하게 이르면서 으레 그러는 것인지 도무지 시큰둥한 낯인 무당 박수들을 채근했다.
“자 노잣돈 여기 이렇게 미리 놀 거니.”
굿상 떡 벌어지게 차린 위에 아무래도 몹시 아까운 시늉으로 천천히 치마 밑 전대에서 꺼낸 꼬깃꼬깃한 지전을 펴 올려놓기도 했다.
그러나 무당은
“한이 많아. 도무지 미련이 많아 못 떠나는 넋이야. 떡이 열 바리에 술이 스무 바리 돈이 서른 바리는 있어야 겨우 치밀어 오르는 불꽃이나 끄구 그냥저냥 길 떠나볼 텐데…….”
하고 울긋불긋한 술이 매달린 패랭이 쓴 머리를 도무지 마땅찮다는 듯이 제상머리를 향해 까딱댈 뿐이었다.
“원 세상에 그렇게 들구야 어느 누가 망자 굿을 할 엄두를 내나? 자 어서 시작이 힘이야 들겠지만 이게 다 좋은 일 아니우? 망자 길 편허게 떠나게 하자고 하는 일이니깐.”
큰어머니가 얼레발을 쳤으나 무당은 요지부동이었다.
“저것 갖군 안 돼우. 이번 굿 받을 이 한이 이만저만인 줄 아우…… 이렇게 코에다 찍어 붙일 바에야 아예 시작 않는 게 나우. 얘들아 가자.”
숫제 훌훌 털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굿 보러 모여든 동네 구경꾼들이며 안쪽에 모여 서 있던 나를 비롯한 식구들이 술렁이고 눈을 불안하게 굴렸다.
그때였다.
“이 쌍녀러 간나들.”
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뒤꼍에서 터지던 것이었다.
“에그머니나.”
누구보다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무당이 기겁을 했다.
하긴 무당 아니라 그 누구라도 도끼를 치켜들고 뛰쳐나오는 그 모습에 기겁을 안 할 사람은 없었다.
알려질 대로 알려진 거친 성미였을 텐데도 동네 구경꾼들은 아예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한층 더 말문이 막혔던 것은 그 도끼를 무당 발 앞 멍석 위에 쿵 찍어놓은 일이었다.
“갈 테면 가봐라.”
무당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러다간 망자가 구천에 들 길도 채 못 찾을걸.”
“그럼 네년을 죽여 같이 보내면 네년이 길잡이 해주겠구나 으응.”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도로 뽑았다. 어디서 마셨는지 주기가 거나한 얼굴에 두 눈에서 불이 철철 흘렀다.
“살려줍소사.”
무당이 납작 업드렸다.
“곧 거행하겠나이다.”
“오오냐 오오냐.”
잡귀를 밟고 선 사천왕 모양 큰아버지가 도끼자루를 짚고 서서 으핫핫핫 으핫핫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무당의 그날 궂은 일진은 그걸로 끝나주지 않았다.
굿이 거의 막판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마도 그것이 이 굿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모양으로 둘러앉은 북채 잡은 이, 장구 멘 이, 꽹과리 먹이는 이들이 한층 긴장된 표정이 되어 제각각의 악기를 가장 높은 소리로 울리고 무당이 쾌자자락을 돌리던 몸짓을 언뜻 바로 세웠다.
“그럼 자아.”
하고 목쉰 소리로 악을 썼다. 그러자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던 듯 큰어머니가 그 비대한 몸집을 어기적거리며 쌀이 수북이 담긴 양푼을 들고 멍석 한복판으로 나갔다.
“엇쉐 그림자 밟아라.”
양푼의 쌀은 멍석 위에 남김없이 쏟아 부어지고 이어 그 양푼이 쌀 쏟아진 한복판 위에 털썩 옆어졌다.
“까악 깍깍깍깍.”
곧 양푼은 들어 올려지고 그 위를 잠깐 보다 무당이 그렇게 느닷없이 까마귀 우는 소리를 저물어 오는 하늘을 향해 냅다 흉내 내었다.
“오메 이런 일이.”
큰어머니의 얼굴이 꺼멓게 죽고 구경꾼들이 일제히 수런거렸다.
“착한인데.”.
큰어머니의 손이 눈으로 갔다.
“까악 깍깍깍깍.”
이걸로 당한 것은 죄다 갚겠다는 듯이 무당이 신나라 다시 까마귀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다시 도끼가 쳐들리운 것 이었다.
“다시 못하간.”
무당이 기겁을 하고 정신없이 쌀 뿌려진 위로 갔다. 그러다간 이럴 일이 아니다 여겨졌던지 큰아버지를 향해 있는 껏 애교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거야 사람 힘으로 되는 건가요. 망자가 뭐가 되어 저승길을 갔는지야 제석님이 일러주시는 걸입쇼. 아 이걸 보세요. 쌀 위에 새 발 자국이 이렇게 영절스레* 나지 않았습니까요?”
그러나 큰아버지는 두 눈을 한층 더 불량스럽게 희번덕였을 뿐이었다.
무당이 별수 없다는 듯이 양푼올 다시 쌀 위에 엎고 그에 따라 북소리 꽹과리 소리가 온 동네를 뒤엎을 듯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무당이 연상 큰아버지의 치켜든 도끼날을 홈쳐보며 공수*를 외우고 꽹과리 소리 북소리 장구 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모여 온 듯 구경꾼들이 진을 쳐 있던 그 광경, 무엇보다 자기가 연출해낸 그 광경을 자못 만족스럽다는 듯이 둘러보던 큰아버지의 도끼 을러 멘 술 취한 무시무시한 얼굴은 그 후 몇 번이나 내 어린 꿈을 휘저어놓았다.
“달이다 달.”
하고 양푼을 벗긴 쌀 위를 자기로서도 무척 멋쩍은 일이라는 듯이 손가락질하던 무당의 알록달록 색동두루마기 입은 보습도 감기 기운이 있거나 체기에 받히는 날 저녁이면 으레 꿈속에 누벼졌다.
더구나 어머니가 여고 영어교사로 취직을 하고 우연히 손댄 이자놀이가 번창을 하는 등 곧 우리 집이 안정세로 접어들자 예전에 동생이 미군정의 고문관이며 그 이후 제1공화국의 고급관리 노릇을 하며 떵떵거리고 살 때 으레 하던 짓, “예전에 동경 유학할 때 내가 대준 학비 내어놓으라.”고 집 안을 들부수며 자기네들 살 도리를 강구해내라고 생떼를 쓰던 짓을 다시 시작하게 되자 그런 날 밤이면 그날 밤 굿 광경이 한층 더 새롭게 살아나는 악몽을 꾸게 되었다.
예전엔 “달이 됐다, 달이 되어 갔다. 역시 생전에 신선이드니 세상 떠서도 아무 여한 없이 고운 달이 되어 갔다”라는 무당의 억지 공수로 꿈은 끝나던 것이었는데 그게 아니라 그 곱게 떠가는 달을 큰아버지가 도끼로 휘둘러 떨어뜨리려 하는 장면이 덧붙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이 등장한 장면에 가려져 미구엔 새까맣게 잊혀진 진짜 마지막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큰아버지가 도끼로 마구 멍석 위를 패면서 통곡을 하던 장면이었다.
“야아 야. 언제 우리가 뉘기 믿고 살았다고. 그까짓 국장자리 떼 가면 떼 가라지. 그까짓 개도 안 먹을 것 빼앗긴 게 그리 분해 병까지 나고, 또 그 광산인지는 왜 해가지고. 광산왕 안 되면 누가 너더러 헐값이라 할까봐. 니 값이야 니가 맥이는 것인데. 니 천금 같은 값 니가 알고 내가 알면 되지 않았니? 언제 우리가 뉘기 믿고 살았다고. 이 식췽이 같은 간나새끼야.”
“……”
그때 나는 큰아버지를 따라 엉엉 울었던 것이지만 이제 와 고백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나 뭐 별로 슬픈 줄도 모르고 그저 집안이 왁작왁작 하니까 잔칫집만 같고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사촌 육촌들과 몰려다니다가 끝내는 어머니에게 야단만 맞고 부친상이라고 당해 돌아가신 이 때문에 눈물을 쏟은 것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큰아버지가 그 이후에 우리 집에 가한 행패는 그런 것을 충분히 다 잊고도 남게 해줄 만한 것이었다.
“글쎄 내가 대학입학 시험에 떨어졌다니까 그날로 달려와선 네가 떨어졌다니 속이 다 시원하다. 큰애빌 큰애비로 보질 않더니 네가 그여 그 죗값을 받았구나 이러는 거예요. 정신병원에 보낼 수도 없고.”
하고 고려적 일을 남편에게 털어놓으며 치를 떤 일도 있지만 어느 날 저녁은 큰어머니며 두 사촌동생을 데리구 와 안방에 드러누워 버렸을 정도이다.
“길가 잠을 자게 됐음. 발명이 다 되다가 되레 터져서 사람이 다챘으니 어쩜 메. 다 팔아 치료비 내고…… 작은에미가 날 살콰줍세.”
하곤 아아 고단하다. 영등포에서 예까지 꼬박 걸어왔더니, 하고 이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아 기승스런 어머니가 한밤중임에도 대청마루를 손으로 치며 울었었다.
결국은 그들의 요구대로 그다음 날 아침 이만 원이라는 당시로선 거금을 내놓고야 그들 가족을 내보낼 수 있었거니와 큰아버지는 돈을 받아 쥐고도 냉큼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늘어지게 먹은 아침밥의 트림을 큰어머니와 더불어 번갈아 꺽꺽하며 대청마루에 앉아 조간을 펐다. 그러곤 혀를 첫첫 다시며,
“그 늘그니 내쫓았으면 됐지 학생들은 또 무슨 데몬구.”
하고 걱정을 태산같이 늘어놓는 것이었다. 또 측은하기 이를 데 없다는 듯이 우리 남매를 새삼 둘러보며,
“니 애비가 하늘이 낸 사람이었당이. 아 사일구 날 것 맞춘 거 봐라. 오일육도 맞췄다면 맞췄지. 군인들 얘기도 했었으니까. 참 하늘이 낸 사람이었당이. 아 사일구 때는 그게 다 죽은 내 동생이 시키는 일 같애서 그 학생들 뒤를 따라 막 뛔다녔당이까. 이젠 통일이 될레나부다 싶고. 앙이 늬 애비가 왜 그렇게 한을 품고 국장자리를 쫓기워나게 된 줄 아니? 남북회담 하자고 나섰다가 그랬단다. 다아 이놈의 땅덩이 두 조각 나서 생긴 일이랑이. 세상에 그 수재가 그 하늘이 낸 애가 그렇게 허무하게 가당이.”
하고는 다시금 흑흑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어서 남동생이 혐오로 얼굴이 다 하얘졌다.
그러나 나는 웬일이었던 것인지, 백부가 앉아 있는 대청의 널판들이 이룬 고랑 때문이었는지 시멘트 블록 치던 그 산꼭대기에서의 애수가 밑도 끝도 없이 되살아나던 것이었다. 그래서 또 밑도 끝도 없이
“큰아버지 그날도 우셨지요.”
했던 것인데 그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어찌 알아듣고 큰아버지가
“응 그래. 늬 애비 뭐가 돼서 구천으로 갔는지 알아보느라고 굿하는 날 내 울었지.”
하고 척 받아 내가 말을 꺼낸 당사자이면서도 가슴이 다 서늘해졌다.
그러나 더 울지는 않고
“그 무당년 그날 간깨나 졸아붙었을 거다. 그년 그날 첨 임자 만났었을걸.”
하곤 잔인하게 킬킬대는 것이어서 애수고 뭐고 다시 정이 천리만리 떨어졌다.
하긴 그 이후에 그가 우리 집에 가한 요모조모의 행패를 감안하면 그런 것쯤이야 아랑곳할 일도 못 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남동생이 대낮에 마침 우리 집에 다니러 와 있던 어머니를 찾아 하얗게 질려 달려왔었다. 아버지의 회갑을 치른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사무실에서 곧바로 달려온 듯 윗도리도 없는 와이셔츠 바람으로 동생이 식식댔다.
설명인즉슨 큰아버지가 남동생의 사무실에 느닷없이 나타나 십만 원만 내어놓으라고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뉘기가 그냥 달래느야? 두 시간 후면 십오만 원 갖다 준다. 십오만 원.”
하고 누가 듣거나 말거나 십 년도 더 전에 유행하던 좁은 깃고대*의 양복차림에 하얀 중절모라는 기괴한 옷차림으로 사무실 한복판에 서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더라는 것이었다.
“아니 십만 원은 왜?”
“글쎄 그 용도라는 것도 남 듣기 창피해서. 지금 자기가 발명품을 하나 완성해서 그걸 막 써먹으려는 찰난데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십만 원이라는 거예요.”
“발명품?”
“기가 막혀서. 언필칭 돈 따는 기계라는 건데 글쎄 그게 뭔지 아세요? 발명도 뭣도 아닌 그냥 에들 장난감 워키토키인데 그걸 한패끼리 하나씩 노나가지구 한 사람은 방 안에 한 사람은 방 밖에 있는 거라는군요.”
“방 안에?”
“네 노름하는 방 안이요.”
“……”
“글쎄 밖에서 거울을 가지고 창밖에서 또 들여다본다나요 어쩐다나요. 그 노름 밑천 십만 원을 달라는 거예요 글쎄. 당구장이 영 안 돼서 다시 발명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나요.”
내가 웃음보를 터뜨리고 그러는 나를 남동생이 지가 당한 일 아니니 웃음이 나올 법두 하겠지 하고 투덜투덜댔다.
“글쎄 돈이 없다니까, 늬가 그 모양이니 통일이 안 된다구 악을 쓰기 시작하는 거예요. 통일이 뭐 자기 쌈짓돈이나 되는 것처럼 그 미친 늘그니네 집이 도대체 어디예요. 내 경준이 만나서 좀 따지려고.”
경준이란 지금 큰어머니 소생인 사촌의 이름이었다.
“관둬라. 내가 가마.”
나와는 달리 아들보다 더 부아가 터진 어머니가 천방지축 일어섰다.
“동생 살아생전 그렇게 못살게 굴다 이젠 대물림해서 아들한테까지냐. 경순아 너도 가자. 내야 팔자 기박해* 남편 없는 시아주비 횡포도 고스란히 받고 말았지만 그러나 늬들까지 또 당하게 할 수야 없다. 자 우리 식구 모두 다 떠서 가자. 이번에야말로 죽든지 살든지 결단을 내자.”
그러나 그날은 그렇게 어머니가 결의만 표명하는 걸로 끝이 났다.
단걸음에 달려온 부아가 어머니며 누이 얼굴도 보고 부지런히 타내 온 꿀물도 한 잔 마시고 나니까 어지간히 가라앉았는 데다가 사촌동생이라는 게 또 어지간히 질긴 작자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은 바둑집이며 당구장을 차린 것도 순전히 그 중학교를 중퇴한 뒷골목 출신 사촌동생의 늘푼수이고 또 그 사촌이 대학을 나온 작은 집 형제들을 늘 아니꼬워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선병질적 체질인 그 남동생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간곡히 말리고 나선 때문이었다.
왜 그랬는지, 마흔이라는 세상 알 것 웬만큼 아는 곰삭은 나이라서 그랬던 것인지
“관둬라 얘. 뭐니 뭐니 해도 큰아버지가 아니냐?”
하고 육중한 음성으로 말리게 되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뜻밖의 발언에 놀라는 어머니의 늙은 얼굴을 일별하였는데 얼룩덜룩한 꽃무늬의 홈드레스에 감싸인 더 이상은 키가 커 보이지도 비극의 여주인공 같아 보이지도 않는 두루뭉술하기만한 모습이었다.
“엄마 살쪘수.” 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갑자기 살찐 타령은 왜.”
“전에 성북동에서 닭 기르던 생각나우? 그 엉터리 정 씨가 다 죽였지 왜. 한 씨는 은수저 갖고 달아나고.”
“……”
어머니는 완전히 어안이 벙벙해진 모양이었다. 남동생도 물끄러미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나도 내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면서 내 나이를 생각하게 되던 것이었다. 서른아홉― 남편과 아이들과 우리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마흔두 평짜리 아파트로 형성되어 있는 나의 갓 마흔―
나는 죽어서 무엇이 되어갈까?
이제 어머니는 더 이상 닭을 기르지 않으며 산꼭대기에는 시멘트블록이 만들어지지 않으리라.
정 씨는 영원히 닭을 죽이고 한 씨는 은수저를 홈치겠지.
“며칠 전 아빠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었는데.”
또 불쑥 내가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얘기를 시작했다.
“다 고만고만하게 부장, 이사대우 하는 사람들인데 그중에 파리 지사장을 하다 온 사람이 있는데.”
“아 매형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대머리? 그 불어 기차게 하는 사람?”
남동생이 나의 평온한 말투에 끌려 더 이상의 의심을 버리고 말을 받았다.
“응.”
“그치 마누라가 돌았다지 아마.”
내가 말문이 막혔다.
“파리에서 호수 한가운데로 헤엄쳐 들어갔다지. 달을 찾으려고 그랬었다던가.”
“그래애?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아니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미쳤다니?”.
어머니가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큰아버지 꿈이었는데 그 옛날 장년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꾀죄죄하게 늙은 모습이었다. 도끼를 부둥켜 안곤 환한 하늘 한복판을 그보다 그 환한 빛을 내며 가는 달을 향해 이젠 죽어 없어져버린 그의 영웅을 부르며 엉엉 울고 있었다.
“……언제 우리가 뉘기 믿고 살았다고 이 식췽이 같은 간나새끼야…… 그러니까 통일이 안 돼지.”
혹시 그들은 신발명품인 소형 워키토키를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백부의 머리 위로 둥근 달이 찬연히 빛나며 제 갈 길로 둥실둥실 떠가고 있던 것이었다.
『문학사상』 145호(1984: 11); 『백부의 달』 (예전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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