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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기도, 사랑할 때
이 모두 내탓이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글이 좀 깁니다ㅜ)
"손님이 없어도 교회 다니는 사람은 사절".. 서울의 한 음식점 입구에 붙어있는 문구.. 공공의 적이 된 전광훈 목사(이후 목사 호칭 생략)의 비상식적인 행태로 한국교회 전체가 커다란 어려움에 처했다.
작년 가을, 바로 그의 말 한 마디로 대한민국이 들썩였던 기억이 난다. 교계에서는 신성모독과 이단성 논쟁이 들끓고, 이 틈을 타서 한 이단종교에서는 신성 모독한 목사를 규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의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막말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페이스북에 그의 설교 한편이 가라앉는 한국교회라는 배에 폭탄을 터뜨린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썼다. 이 해프닝으로 인해 일파만파 번질 거대한 소용돌이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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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민낯
당시 전광훈의 신성모독성 발언 이슈에 대해 특이한 현상은 거의 모든 언론과 종교계가 그의 '신성모독성 발언'에만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핵심은 '발언'이 아니라 '설교'였다.
이 말의 출처는 2019년 10월 22일 청와대 앞 집회현장의 저녁 예배 때 진행된 설교다. 메스컴에서 이 막말을 '설교'가 아닌 '발언' 선에서 다뤄준 것이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이런 신성모독성 막말이 예배 중 설교 시간에 행해졌다는 사실을 교회는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당시 페북에 올린 그 이유다.
“기독교 종교 행위 가운데 가장 거룩하고 준엄한 의식이 예배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 시간은 더더욱 두렵고 떨리는 자리다. 어느 책 제목처럼 설교는 '두려운 영광' 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설교를 “하나님이 예배현장에 임하셔서 그 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설교자를 '말씀의 전권대사'로 칭했다. 칼빈의 영향으로 1536년에 제정된 제네바 신조에서는 목사의 권위를 인정할 때 “말씀을 자신들의 개인적인 생각과 혼합하지 않고 순수하게 전달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제네바 신조에 의하면 전광훈의 이날 설교는 목사의 권위를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막말에 불과하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이것이 현재 우리 한국 교회의 수준이다. 저런 고삐풀린 목사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기관의 수장이 될 수 있는 시스템도 그렇고, 저런 천박한 유사 종교 행각을 벌이는 자를 제어할 수 없는 교계의 사분오열된 공동체성도 그렇고, 저런 3류 목사의 선동을 지지하고 은혜 받는 수많은 성도들도 그렇다. 예배와 상식이 몰락한 한국교회 민낯에 억장이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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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친밀함’의 가벼움
기독교 예배를 모르는 일반인들은 신성모독 설교행위를 그저 ’막말’이나 지나친 ‘발언’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한 문장으로 그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영성의 실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전광훈과 그를 추종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그런 막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친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얼토당치 않는 궤변이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불렀다(출 20:7). 하나님은 이것을 '죄'로 명하시고 제 3계명으로 주셨다.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자체를 더럽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경솔한 언사를 행했으니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모욕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으니(개역개정 '업신여김을’, 헬라어 우롱하다, 농락하다, 조롱하다, 기만하다) 심은데로 거둘 것이다(갈 6:7).
하나님이 우리와 아무리 친하다해도 우리가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우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분의 탁월한 영광스러움 앞에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경외감을 갖게 된다. 하나님과 친구처럼 1:1로 대면했던 모세가 왜 굳이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소서”(출 33:18) 간청했을까? 그분의 영광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지고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 경지는 두렵고 떨리지만 너무나 깊고 숭고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는 경배의 최고 지경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스런 얼굴을 보여주면 친구같은 모세라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임을 알기에, 자신의 뒷모습만 보여주셨다. 그런데도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모습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두려워하여 가까이 하지 못했다.(출 34:30)
이사야도 성전 보좌 위의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찬란한 영광과 눈부신 광채에 압도되어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비참한 죄성이 드러나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상) 자백했다. 그 영광의 극대치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주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의 친구가 되셨지만, 그리스도의 지식이 깊어지면 질수록,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영광에 압도되어 더욱 경외함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다”(시 25:14)는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높을수록 친밀함은 더 깊어진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진짜 친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더 높이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편 기자의 말을 1%라도 이해했다면 결단코 저런 막말과 궤변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호 4:6). 전광훈과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은 자신만 망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교회 전체가 무너지도록 시동거는 사교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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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할 때
결국 올 것이 온 것인가? 상식을 벗어난 전광훈의 행보로인해 시민들은 교회를 이교 집단으로까지 치부하고 있다. 그는 향후 10년간 대한민국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자신을 중심으로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주님의 피값으로 산 교회가 이런 현실에 처한 상황이 참으로 치욕스럽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안타까운 것은.. 천만 신도의 한국교회가 자가당착에 빠진 그를 제어할 힘도 권위도 없다. 한국교회는 좌초되어 침몰의 위기에 빠진 배에서 성도들을 구해낼 자정 능력을 잃은 것 같다.
이런 사태는 우리 생전 처음 겪는 일이다. ‘개독교’ 운운할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전광훈도 문제이지만 그런 사람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앉게 한 한국교회의 몸 자체가 더 큰 문제 아닐까? 한국교회가 곧 나이기에 마치 내 뼈를 깎아 내는 아픔으로 고백한다.
한국교회는 철저한 개교회주의의 덫에 빠져 있다. 남이야 어떻든 내 교회만 건강하면 된다. 폐의 암덩어리가 썩어 들어가는데 입이 자신은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상관없다고 외면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인 한 몸인데, 아픈 지체를 치료하기는 커녕 몸 전체가 자기 사역에 꽂혀 지체들의 아픔에 무관심했다. 썩은 부분은 도려내야 하는데, 몸 전체에 퍼질때까지 나 몰라라 했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지금은 회개할 때다. 한국교회가 ‘개독교’로 불리울 때부터 정신차리고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어야 했다. '기독'은 '그리스도'의 한자음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땅에 짓밟히고 있을때 교회는 흥청망청 부흥을 자랑했고 교회를 더 높이 지었으며, 세계 최대를 자랑했다.
더 늦기 전에 나부터 회개한다. 번영주의 우상에 빠져 성장에 눈이 멀었던 우리 지도자들의 탐욕을 회개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교만을 회개한다. 몸 전체를 보지 못하고 내 교회, 내 단체 키우기만 급급했던 이기주의를 회개한다. 손이 불붙어 타들어가는데 책임전가하고 뒷짐지고 있던 태만을 회개한다. 이 모든 것이 악한 것이다.
이 모든 악한 길에서 떠나는 회개만이 살길이다. 에베소교회를 향해 “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계 2:4하) 책망하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무너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함으로써 처음 가졌던 사랑과 은혜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급기야는 나에게, 교회에 주셨던 촛대를 성령께서 옮기실 수도 있다.(계 2:5)
나 자신부터, 우리 교회부터, 우리 단체부터 자정하고 회개를 시작할 때다. 개신교 버전의 “내 탓”운동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토록 교회가 타락한 것이 다 드러나고 있는데 왜 회개운동이 일어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누가 시작하기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나 부터, 우리 교회부터 하나님께 나아가자. 회개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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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때
절대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직감하고 모든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백기들고 하나님께 묻기로 작정하고 나아갔던 여호사밧 왕처럼(대하 20:3), 목회자들은 교회에 금식을 선포하고, 자존심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백기들고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우리 교회가 어찌해야할지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할 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하). 혹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겠는가?
역대하 7:14의 약속처럼 우리가 지난 날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주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이 땅을 고쳐주지 않으시겠는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전광훈의 가장 큰 실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겨가면서까지 그 수레바퀴를 감히 자신이 직접 돌리려고 생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과 같이 그분의 마음과 합한 자(행 13:22)와 함께 결국 그분의 일을 수년 내(합 3:2)에 이루실 것이다.
‘땅을 고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섭리로 창궐한 바이러스를 멈추는 일도 되겠지만. 악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이방인들에게 직접 회복하는 일도 포함된다.(겔 36:23)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는 회개와 기도 운동이 일어날 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일도 포함된다.
교회가 이 지경으로 몰릴만큼 깨어 기도하지 않고 태만했던 나 자신부터 회개한다. 망하게 된 나와 교회를 돌아보고, ‘내 탓’으로 여기고 기도할 때다.
교회 예배가 닫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혼자이던, 온라인 기도회이건 하나님께 나아가 재를 뒤집어 쓰고, 겸허히 엎드려 그분의 얼굴을 함께 구할 때다. 그분의 선하심을 구할 때다. 회개와 기도의 물결이 한반도 구석구석에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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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
지금 우리는 정부의 편파적인 대처를 불평할 때가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묵묵히 받으셨던 것처럼, 지금은 사회가 때리면 그저 묵묵히 맞을 때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을 돌려댈 때다. 억지로 오 리를 가자 하면 십 리를 가줄 때다. 속옷을 빼앗으려 하면 겉옷까지 줄 때다. 요구하는 사람에게 주고 꿔달라는 자를 거절하지 말 때다.(마 5:39-42)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도리라고 하신(마 5:44,45)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할 때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랑을 실천할 때다. 지금 국민들은 생각보다 큰 아픔과 근심, 불안, 염려에 휩싸여 있다. 코로나로 인해 정서적, 재정적, 환경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이 많다. 코로나 블루* 증상으로 내면의 우울과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정치가들의 편가르기, 좌우대립, 보수진보 이념전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민생이 찌들어간다. 최악의 글로벌 경제위기 앞에서 서민들의 가슴은 멍들어간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사랑으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다가가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합하고, 위로하고, 치유할 때다. 함께 애통하고, 긍휼히 여기고,화평케 하고, 의를 위해 핍박받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다(마 5:3-14). 그럴 때 성도들을 통해 이 사회가 고쳐지는 힐링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사실 교회가 이토록 두들겨 맞아도 보이지 않게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을 돕고 섬기는 일은 타종교보다 기독교가 압도적으로 많다. 단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만큼 이웃 사랑과 선행(마 22:37-40)도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최고의 카운셀러이신 성령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특권을 지닌 성도들이다. 이 위기상황은 오히려 교회만 의존해서 받아먹던 신앙생활을 뛰어넘을 기회다. 나와 우리 가정, 우리교회라는 안전지대를 넘어서 자신이 처한 사회, 일터, 길거리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할 기회이다. 펜데믹 상황은 어쩌면 모이는 교회모드에 갇혀 있던 우리의 에고이즘적 의식을 흩어지는 교회로 확장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회개하고 기도하고 사랑하자. 이길 외에는 답이 없다.
*코로나19와 우울 기분을 의미하는 블루가 합쳐져 만들어진 신조어
첫댓글 읽는 ㄴㅐ내 침통하다 눈물을 주체할수 없을만큼 흐릅니다..
대체 부흥만 할줄알았지 선한목자인지 늑대가 가장한 목자인지...
전광훈을 한국교회의 수장으로 뽑았던 목회자들은 옷을찟고 가슴을찢어 통회하며 회개하지않는다면 한국교회는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잘 믿는 신앙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살기위해 부정하지는 않을 각오로 살아갑니다.
올바른 목회자도 올바른 성도들도 찾아보기 힘든 시점에 이유정목사님의 절규가 한줄기 빛이 되는 느낌입니다.
많이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시국이 어수선한 이때 교회가 정치에 놀아나는 이비극을 어찌하오리까...
차라리 핍박을 받았다면...
이유정목사님의 말씀이 절절하게 다 맞
이분은 음악선교를 많이 하는분입니다 유능한 선교사지요
주로 미국에서 많이 생활 했습니다 왔다갔다 하면서요
공주와 친했고 공주가 좋아하는 목사지요 함께 성가대 하면서 정들었나 봐요
신앙 이념이 매우 모범적인 분입니다
@,하은초 뵙지는 못했어도 공주님과 친한 사이라면 알만 합니다...
여성지도자라해도 될만큼 대단하신 분이시네요~
덕분에 성서로 아침을 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