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려 4시간 이상을 메슥거리는 뱃멀미에 시달리며 찾아간 가거도 독실산의 첫인상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손바닥으로 주욱 밀쳐둔 듯 밋밋한 산록에 멋없는 직선형의 능선이 선창에서 뵈는 독실산과 가거도의 모두였다. 어떤 이는 “에게게…” 하는, 가거도민들에겐 다소 모욕적으로 들릴 언사마저도 서슴없이 내뱉었다. 포구를 지키듯 날카로운 기치창검으로 일어선 회룡산 암릉의 기관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배를 타고 되돌아가고 싶어졌을 것이다.
-
- ▲ 산행 끝무렵 만난, 항리와 섬등반도 일대가 아름답게 내려다뵈는 기암봉 근처에서 노을 풍경을 즐기며 쉬고 있는 일행.
-
그러나 오래지 않아 우리는 진중치 못했음을 겸연쩍어해야 했다. 섬누리민박 봉고트럭이 회룡산 목덜미께의 고개를 넘는 순간 짐칸 지지대를 잡고 섰던 사람들은 약속한 것처럼 긴 탄성을 올렸다. 포구에선 지능선에 가려져 뵈지 않았던, 거대하고도 기나긴 섬이자 산인 독실산릉의 풍모가 대양에서부터 높직하게 부풀어 오르듯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물론 크기에만 감탄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 아름다운 미세 조각들이 모여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이루듯, 구석마다 고밀도의 풍경들이 이어지고 커져서 이윽고 가거도라는 큼직한 절경의 섬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진초록 바탕에 여기저기 연한 연두색 신록의 수목들이 몽글몽글 부드럽게 부풀어 오른 산록을 가로지른 콘크리트 포장도로는 4km 저 멀리 섬등반도까지 가닿았고, 거기까지 어디 한 구석 감하여 버릴 데가 없는 절경이었다.
-
- ▲ 섬등반도를 등 뒤로 하고 독실산정을 향해 오르고 있는 취재팀. 반도 목덜미께를 지나고 있는 콘크리트 포장도로와 항리 마을 집들이 내려다뵌다.
-
지금의 가거도 한자 표기는 가히 사람이 살만하다는 뜻인 가거도(可居島)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히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는 뜻의 가가(可佳), 여지도서엔 아름다울 가(佳), 아름다울 가(嘉) 자를 겹쳐 써서 가가도(佳嘉島)라 표기하기도 했다. 옛 사람의 눈에도 가거도는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섬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이런 옛이름을 무시하고 소흑산도(小黑山島)라는 멋없는 이름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뉴질랜드에서 부러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그런, 새긴 듯 말끔하고 곱게 쓰다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 땅에서 마주 대한 감격으로 연신 사방을 둘러보았다. 신록이 워낙 고운 시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첫날의 그 고조된 감흥은 닷새 후 가거도를 다시 떠나는 날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단지 먼 길을 떠나온 여행객의 사뭇 들뜬 가슴으로 과포장된 감동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닷새 후 섬을 떠나는 날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가거도와 독실산은 다만 뱃길이 멀었기에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을 뿐인, 커다란 보석같은 섬이자 산이다. 취재에 동행했던 평택의 이화선씨(53)는 “이탈리아의 그 유명한 카프리섬을 가봤지만, 거기보다 가거도가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
등산꾼 필지의 명산 반열에 오를 대상
동해에 울릉도 성인봉이 최고봉으로 섰다면 서해에선 단연 가거도 독실산(犢實山)이 최고봉으로 우뚝하다. 울릉도가 72.56㎢로 가거도 9.18㎢보다 7배쯤 넓으며, 한반도는 동쪽이 융기하고 서쪽은 가라앉은 동고서저형의 지세임을 감안하면 울릉도 성인봉 984m에 비해 가거도 독실산의 높이 639m는 자못 놀라운 성취다. 신안군(목포 포함) 내 829개 섬뿐 아니라 서해상 섬을 통틀어 가장 높은 산이다. 강화도 마니산도 469m, 신안군 최대의 섬인 흑산도 최고봉 깃대봉도 377m로 독실산보다 한참 낮다.
-
- ▲ ‘일몰 조망대’에서 주등산로로 되돌아나오고 있는 일행. 태풍에 뿌리를 드러내고 구실잣밤나무 거목이 쓰러져 있다.
-
이럼에도 가거도 독실산이 그간 등산꾼들에게 외면당했던 큰 이유는 등산로다운 등산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4시간 반이나 걸리는 뱃길이 멀다지만, 실은 울릉도까지의 소요 시간과 비슷하다. 국가 시설물이 선 정상까지 물자 수송용으로 낸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곧 등산로의 모두였기에 등산동호인 1천만 명 시대에도 독실산을 찾는 이가 그간 드물었던 것이다.
-
- ▲ 항리 마을에서 독실산정으로 오르는 도중, 우측 샛길로 빠져 오른 암릉 위. 안개가 끼어 조망이 잠시 가렸다.
-
하지만 오래지 않아 독실산은 울릉도 성인봉과 더불어 한 번 가보지 않고서는 한국 산의 풍광을 논하는 자리에 끼기 어려운 등산꾼 필지(必知)의 명산 반열에 오를 것이다. 최근 가거도 주민들이 개설한 항리~독실산 정상~북서릉~해안길~항리 코스를 돌아본 소감이 그러하다. 등산로 곳곳에 조망처 역할을 하는 암봉이 섰고, 그곳에서 펼쳐지는 풍경들은 한결같이 뛰어났다.
-
- ▲ 일몰 조망대에서 뒤돌아본 독실산릉. 뒤에 480m봉 정상의 암부가 뵌다.
-
가거도는 워낙 산림이 짙어서 한때 숯가마터가 200개소가 넘었다고 한다. 6.25 전후해서는 중국으로 땔감이 수출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가거도 독실산은 푸른 숲으로 두툼한 외투를 입은 것 같다. 그 짙은 활엽수목으로 빈틈없이 메워진 독실산록은 한편 매우 가팔라서, 고개를 한껏 꺾어야 저 위에 솟은 기암봉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였다. 독실산 서사면은 해수면에서부터 수직 높이로만 600여m 곧장 치달아올랐다. 만약 저 수목들이 갑피로 뒤덮이지 않았다면 독실산은 이미 오래 전 풍우에 허물어져 내렸을 것이다.
-
- ▲ 두툼한 갑피처럼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인 독실산록의 숲길로 접어들고 있다.
-
짧고도 인상적인 드라이브 끝에 섬누리민박집 트럭은 가거도 서쪽으로 비죽이 팔을 내민 듯한 섬등반도의 목덜미 항리 마을에 다다라 멈추었다. 지형상의 생김 그대로 목 항(項) 자를 쓴 항리다.
항리에 내려 쳐다보니, 저 위 독실산정 바로 아래쯤 되어 뵈는 곳에 커다란 두 덩어리의 암괴가 보였다. 임씨는 그 두 암부를 아울러 ‘풍선(風船) ’이 바람이 없어 노를 저어야 할 때 노를 거는 걸이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노 젓는 산’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 노 젓는 산까지의 산비탈은 혹여 폭우시 사태가 나지나 않을까 걱정될 만큼 가팔라 보였다. 저런 가파른 산비탈 길을 곧장 오른다는 게 아무래도 미련한 짓만 같았다. 그래서 독실산 길라잡이를 자청하고 나선 항리 토박이 임수명씨(67)에게 “저기 완경사 등대쪽 능선으로 먼저 오르자”고 했지만 그는 “보기보다는 걸을 만하고, 저기 저 벼랑 위로만 올라서면 그 다음은 평평하니 걱정말라”며 길손들을 다독였다.
-
- ▲ 나무 줄기를 뒤덮은 콩난. / 독실산 숲속에 선혈처럼 떨어진 동백꽃들.
-
항리 서쪽 절벽 위에 자리잡은 섬누리민박집에 서둘러 짐을 부려놓고 점심을 든 다음 행장을 차려 나섰다. 내일 일기예보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임씨는 곧은 동백나무 가지를 잘라 만든 지팡이 하나를 휘적휘적 휘저으며 경로당 맞은편 샛길로 접어들었다가는 곧 오른쪽 산비탈을 향했다(‘110’번 팻말이 붙은 전봇대가 선 곳에서 오른쪽). 흑염소 울을 따르는 길은 곧 몸이 뒤로 당겨지듯 가팔라진다. 그러면서 바다 조망은 순식간에 대양으로 넓어졌다.
임씨의 재킷 뒤엔 ‘등산로 안내인’ 글자가 선명하다. 그는 하루에도 어떤 날은 세 번이나 등산객들을 안내해 독실산정을 오르내리기도 한다. 그렇게 단련해온 덕인지 그는 가파른 비탈을 오르면서도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는데 서울 길손들은 곧 한여름같이 얼굴이 뜨거워진다.
첫댓글 진짜 넘 멋진 곳이네요. 이번에 꼭 가야지...
가거도를 이토록 멋지고 자세히 알린덕택에 추진하고 있는 이몸..이번엔꼭 함께 동행합시다...
좋은곳 아쉬움이 가득할 뿐 기회는 있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