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7 | < 오늘의 詩 > by 찬우물 | 2012-11-03 오전 4:53:05 |
이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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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詩 > by 찬우물
산벚나무가 왕벚나무에게
- 최두석
하산하여 저자로 간 지 오래인
나의 친척이여
요즘 그대 집안의 번창이 놀랍더군
일찌감치 화투장에
삼월의 모델이 될 때부터 알아보았네만
요즘은 사꾸라라고 욕하는 사람도 없이
지역과 거리의 자랑인 양 심어
축제를 열기에 바쁘더군
그대의 꽃소식 신문과 방송이 앞다투어 전하니
가문의 영광이 따로 없네
지상에 사람들이 번성하는 한
기꺼이 그대 화사한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세상의 곳곳에 전파할 걸세
나야 뭐 늘 굼뜨지 않나
새 잎 내밀 때 조촐하게 꽃피고
버찌는 새들이 먹어 새똥 속에서 싹트는
예전의 습성대로 살고 있네
일찍이 목판으로 책을 찍거나
팔만대장경 만들 때
세상에 출입한 적 있지만
아무래도 내 살 곳은 호젓한 산 속이네
<출처> 최두석,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통권 143호)
자화상
- 최승자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아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서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출처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시인선16, 1989
걸림돌
- 공광규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를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되 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출처 : 『황해문화』, 2009년 봄호(통권63호)
겁나게와 잉 사이
- 이원규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 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출처 : 『황해문화』, 2009년 봄호(통권63호)
비행운(飛行雲)
- 오세영
한낮 뇌우(雷雨)를 동반한 천둥번개로
하늘 한 모서리가 조금찢어진 모양
대기 중 산소가 샐라
긴급 발진제트기 한 대가 재빨리 날아오르더니
천을 덧 대 바늘로 정교히
박음질 한다.
노을에 비껴
하얀 실밥이 더 선명해 보이는
한줄기 긴비행운(飛行雲)
출처 : 『황해문화』, 2009년 봄호(통권63호)
우리의 멋진 10월은 숨가픈 추억을 만들고 물러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겨울의 옷을 입은 11월을 맞이해야 합니다
시간은 그렇게 가고 또 오는 것
그 속에서 우리는 야무지고 당찬 기억들을 쌓고 그리고 또 다음을 기약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살아있고
무시로 삶을 사랑하기에 의미있는 행동입니다
자연은 또 어떠한지요
매번 찾아오는 계절은 언제나 드라마틱합니다
똑같은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낮에는 땀이 흘렀고
참 이쁘기만 하늘이었지만
그보다 몇날이 지난 지금은 아침 저녁 겨울의 외투가 어울릴만한 그런 때가 되었습니다
작년과는 달라도 참 다른 모습입니다
지구의 온난화가 심해지면 질수록
중위도에 위치한 나라들은 겨울은 더욱 추운 혹한과 눈으로
여름에는 홍수와 무더위로 그 색깔을 더 짙게 한다 합니다
우리도 이런 계절의 모습을 닮아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성질을 같이 하면 어떻겠습니까
^^
무슨말이냐믄
멋있게 살아보자는 야그입니다
세월을 감당모하겠다 하지마시고
그 세월을 거슬러
젊고 패기 있었던 모습 그대로
또 그 세월을 고스란히 받아 안은 지혜로움을 다 갖춰보자는 야그지요
좀 모순이 있는가요
아닙니다
원래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는것이고
한없이 내려감은 바닥에 닿은것이며
그것은 다시 솟아 오르는 일만 남은것이 아닐런지요
함께 하입시더
좋은 공간이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왔고
우리의 삶이 곳곳에 배여있는 이 공간이 있지 않은지요
시간만큼 익숙한것이 없고
그 흐름이
이미 우리를 만들어 온 것이니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우리답게 해주는 곳에서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고
서로 다독임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늘 당신을 기다려주는 이곳이
가장 편안하고 좋은 곳은 아닐지요....
아무려나....
두레박 화이팅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들만 골라 모인 그곳 두레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