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어린애의 엄마가 죽었다.
어린애는 엄마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고 적응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아이에겐 우주의 붕괴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무너져내린 세계 한가운데 홀로 서있는 자신의 존재를 감내할 수 없어 아이는 울고 또 울었다.
그래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서 아이는 도망치고 싶었다.
밤에 꿈을 꾸면 어느새 엄마가 살아 돌아와 자기를 만지고 대화도 하는데,
그때마다 아이는 놀라운 기쁨에 꿈인가 생시인가 확인하기 위해 자기 살을 꼬집어보니 아팠다.
생시라는 증거. 하지만 아이는 곧 깨어나 꿈 속 감격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냉엄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엄마가 살아오기는커녕 지금 땅 속에서 부패의 과정을 지날 것이다.
죽음은 바꿀 수 없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고 그 아이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겪어야 할 운명인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확인한 것은 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열 네 살 그때까지 많이도 듣기만 했던 그 죽음이라는 것을,
치매에 걸린 몇 년 간의 어려움을 겪으시면서 할머니와 가족을 힘들게 하시던 할아버지를 통해 직접 본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노인이니까, 또 병도 있었으니까 그 죽음이 그리 큰 슬픔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일 년 후 형의 죽음은 달랐다. 그것은 심장 깊숙이 파고 들어온 칼이었다.
죽었다는 것, 돌아올 수 없다는 것, 그와는 끝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 후로 살아오는 동안 죽음이란 듣고 보고 인생과 함께 하는 무엇이라는 개념이 되었다.
한데 아무리 들어도 아무리 보아도 인간은 결코 죽음에 길들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있고 죽음은 죽어있기 때문이다.
인생과 동행하면서도 동행할 수 없는 죽음의 개념을 헤매던 중 나는 위대한 진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그 부활이 내게 의미하는 것을.
내가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라면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막다른 구석까지 다다랐을 때,
하나님은 내게 몸을 돌려 그 고양이의 눈을 정시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로 하여금
그 고양이의 눈을 정시할 뿐 아니라 그 눈을 뚫고 들어가 그 건너편으로 나가게 만들었고,
고양이도 호랑이도 없는 그 건너편에서 무한히 찬란한 생명의 빛을 보게 했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다. 이것은 착란이 아니며 신념이 아니며 실재다.
상상이나 착란이나 신념으로는 결코 죽음의 힘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톨스토이의 책 "부활"처럼 정신적 부활이 아니며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망상적 부활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보이신 대로 육체적 부활이다. 이제 죽음의 신랄한 가시는 부러졌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게 되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적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영적 부활이 아니라 의인의 부활인 육체의 부활을 기다린다.
주님께서 자기 약속을 따라(요14:3) 자기 신부들을 데리러 공중에 오실 때 그 일은 발생할 것이다(살전4:16-17).
밤이 깊고 불들이 꺼진다. 이 어두워진 마을에 인간의 피로가 쌓인다.
보라. 이 어둠이 덮은 마을 한 구석에 고개를 들고 피어나는 달맞이 꽃이 있다.
내가 배운 것이 이것이다. 엄마는 죽어 다시 돌아올 수 없지만
우리의 주님은 다시 돌아오신다는 것, 이 끝없는 소망으로 달맞이꽃은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2024. 11. 2
이 호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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