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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중편을 엮으면서
주인공을 통하여 인간사의 갈등과 고뇌를 통하여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 인생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보았다
도봉산 칼바위를 돌아 거북샘 옆 연습바위에서 이대장과 헤어져 혼자 내려오던 이안이 계곡
에 흐르는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면서 울창한 수림사이로 우뚝 솟아오른 도봉산의 봉우리를 올려
다 본다 흔적은 없지만 그 옛날 어느 세월에 이곳을 다녀 갔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체취는
이렇게 말을 하는 것도 같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인간의 꿈만 헛되
도다 하는 말처럼 말처럼 들린다
우리 역사만 보더라도 몆천 년은 족히 흘렀을 이곳도 그때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 옛
조선의 발자취가 숲 속 어디선가 아직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는 허공으로 내달리듯 조선의 용맹스러운기상도, 기백도, 꿈처럼 흘렀는가 바람처럼
사라졌는가 허망의 세월인가 야망의 세월이었나를 묻는 것만 같다
내가 지금 발을 담고 있는 이 계곡의 물에 천년 고찰을 찾던 어느 고승이 잠시 머물었을지도
모른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무성한 수림사이로 고승의 그림자가 있는 듯 없는 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라지는 것만 같다 고전과 현대를 오고 가며 말없이 항상 그 자리에서 억하심정의
인간들을 보듬는 자연의 원대함이 무한한 애정의 눈빛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다
이안의 발밑으로 스며드는 시원한 냉기가 온몸으로 채워진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김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며 도봉산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하늘 높이 마음껏 나는
새들의 자유 분방함이 이안의 가슴으로 날아드는 것만 같다 도봉산 오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라보고 있을 미국의 하늘을 떠올려 본다 김포공항을
떠나던 그날,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며 비행기 안을 둘러보니 미국행이라서 그런지 외국 사람들이 먼저
눈에 띄며 넓은 좌석이 꽉 차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안내양이 마스크
착용의 설명이 진행 중이다 이중에 나처럼 황급히 고국을 떠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
이지만 일일이 그 표정이야 읽을 수야 없지 않겠나 그러나 누군가 나의 표정을 본다면
어쩌면 내 얼굴에 드러나 있는 그 사연을 얼추 짐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회사일로 3박 4일 제주도로 갔을 때 비행기를 타게 되면서 어떻게 이런 큰 쇳덩이가
하늘을 날수날 수 있을까 설레던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쩌면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긴장이
되어온다 어둑 컴컴한 조국의 하늘빛처럼 이안의 마음도 그렇게 어둡다 조국의 마지막 하늘을
내려다보며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가올 다음의 순간들의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한 번도 집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이안의 가슴 한켠한편으로는 아쉬움과 막연한 불안감이
함께 교차하며 밀려드는 슬픔을 끝내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이안은 오랜 날을 기다려 왔다 그렇게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자은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세상으로의 이상과 꿈의 욕망은 이안이 오랫동안 갈구하고
한이 맺혔던 것이 아닌가 막연하지만 무언가 이루어 내리란 결심이 마음 한구석에서 뜨겁게
뜨겁게 치밀어 오른다
갑자기 기내가 분주해지며 안내양들이 바쁘게 오고 가며 아침식사를 내려놓는다 한참 후
곧 로스엔젤리스 공항에 당도한다는 기장의 멘트가 나의 심장에 꽂히듯 들려온다 하루 만에
당도해서 이렇게 쉽게 미국을 올 수 있는 것을 7년을 기다려서야 왔다
이런 날이 오기까지 이안은 오랜 날들을 고진감래 하며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비행기만 타면
하루 만에 당도하는 미국을 어렵게 왔다는 자신이 한편으로는 자존심은 상했지만 모든 사람
들이 열망하는 미국이라는 곳과 사랑하는 자은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슴이
뛰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며칠 전 자은이에게는 편지를 했던 터라 아마도 지금쯤 자은이는 공항 라비
에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반가운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해후는 정말 감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너무도 어렵게 이루어진 미국행이라 그런지 당시의 느낌은 대기업에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던
날 자은이가 한달음에 달려왔을 때처럼 내 생애 두 번째로 감격적인 날이었던 것 같았다 한층
성숙해진 모습인 것 같았지만 하얀 얼굴의 예전 모습은 자은이의 조약돌처럼 그대로였다
당시 자은이의 보라색 재킷의 윗옷이 매우 인상 적이었던 것이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주변이 매우 환하게 보였섰던 것 같았다
기내에서 안내양의 지시에 따라 패스포트 외 기재사항을 체크하며 일러주는 대로 적어놓고
출국장으로 향하는데 긴장감이 순간 가슴 한편으로 스쳐간다 김포공항을 어렵게 통과해서
그런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은 이안을 더욱 움츠려 들게도 하지만
출국장으로 향하는 이안의 발걸음만은 그런대로 힘차 보이기까지 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 칸막이로 되어있는 여권 심사대가 눈에
뜨인다 한국에 있을 때 외국 영화에서 보았던 여권 심사대를 이안이 지금 영화의 주인공처럼
그것도 불안한 마음으로 통과하는 중이다 의정부에서 미국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던 터라
낯설지는 않아 보였지만 웬일인지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안이 한국을
비정상적으로 나오다시피 했으니 어쩌면 마음이 내내 불안한 것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얼핏 들은 이야기로는 부정한 방법이 적발되어 가끔은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발각이 되어
추방되는 일도 종종 생기는 일이라고 들었다 또 영화에서도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 사이로 밀려서 줄을 섰는데 먼발치로 보이는 심사대가 높게 보인다 심사원들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스파이라도 걸러낼 기세처럼 등등한 것이 이안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이안의 마음이 다시 한번 두근거린다 혹시 나에게도 무슨 일이라는 불안감이 심사대가 점점
더 가까워 올수록 가슴은 퉁당 거리기 시작한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선진국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그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기능
공들 다시 말해 인재들을 초청하는 사례가 있었는데 후진국에서는 공직자들이 초청이라는
상례를 숨기고 중개인을 이용해 돈을 받고 장사를 했던 것이다 일반인들은 그런 것을 알턱이
없었다 돈을 받는것이 불법이었지만 그들은 선진국과의 정식 계약을 이용해 일반인들에게는
불법으로 주선하는것처럼 꾸며 그것도 서민들을 상대로 많은 돈을 갈취했던 것이다
기내에서 열심히 연습한 인사말을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좋은 표정을 지어내려
하지만 이안의 굳어져 버린 표정은 풀릴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안의 손끝을 떠난 패스
포트가 눈 위로올려다 보이는 심사대 위에서 심사원의 번뜩이는 눈빛을 의식하는 순간
기내에서 열심히 연습한 인사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용기를 내어서 다시 한번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심사대 위에서 쿵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가슴이 털컥 내려앉는 것같았다 겁먹은 표정으로 위를 쳐다보니 심사원이 무어라
하며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보고 빨리 나가라는 손짓을 하는 것이다
쿵 소리는 심사대위에서 통과 스탬프를 찍는 소리였는데 그렇게 놀란 것이다 가끔 지난
일을 생각할 때마다 그 순간들이 떠올려 지곤 하는데 70년대 말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를
경험하게 되면서 내 조국의 실상과 허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런 것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미국에 입국당시 마음을 무척 졸인 것 같았다 계엄 같은 국내 상황에서 중개인
들에 의해 출국을 했던했던 터라 더욱 그랬던 것 같았지만 입국장 심사대에서 후진국이라는
현실을 온몸으로 느끼며 지존심이 상했던 이안의 마음이였섰다 이안은 미국에 입국당시의
생각을 잠시 멈추고 도봉산의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덧없이 흘러가 버린 세월에 격세지감
을 느껴본다
훗날에 있었던 미국생활에서 안정을 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미국
생활을 시작하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나라에서도 잘할 수 없다면 타국에서는 더욱
잘할 수 없다는 더 군다 나 선진국에서의 적응은 두 배 이상의 노력을 경주
하여야만 가능한 것도 후진국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어느 곳
이든 적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적응이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특성상 다국적 형태로 구성이 되어있는 국가이긴 하지만 백인이 선도하며 백인 우월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자유민주주의의 원산이라 고도 할 수 있는 나라
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백인 우월주의가 선도하며 유색 인종들의 차별이 극심한 사회
이기도 하다. 허지만, 능력위주로의 사회이기도 한 것이 누구를 막론하고 능력이 있다면
우대를 받는 사회이기도 하다
먼 나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종횡하던 시절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안의
조국이 아니었던가 이안의 발밑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과 이 강산의 푸르름을 내었지
이렇게 마음대로 안을 수 있겠는가 지금에 와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조국에 대한
값을 그 값을 아직도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1965년 9월 23일 월남에 파병이 됐을 때 전쟁터에서 두려움도 없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던
전우들이 생각이 난다 함께 참전했던 전우들은 죽거나 살아서 돌아와서도 전쟁 후유증으로
시달리며 병치례를 하다 죽거나 지긋지긋한 고엽제란 병에 지금껏 시달리고 있겠지. 월남
전쟁터에 참전했을 때 전쟁터란 막연한 불안감은 도착하는 첫날부터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도착한 곳이 캄란이라는 곳이었는데 미국 해병대가 교전 중인 것 같았다 밤인데도 헬기에서
퍼붓는 로켓탄이 대낮같이 환하게 보이는데 쿵쾅 거리는 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온다
도착한 첫날부터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이 마치 외국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광경들이었는데
조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내 공포심에 시달려야만 했다 때론 적개심에 타오르는 분노를 누르기 힘들 때도 있었는데 전우가 옆에서 쓰러지는 것을 볼 때는 내정신이 아닐 때도 많았다
지난 일이었지만 참전했던 명분이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월남전쟁을 경험하는 동안나의 조국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내 가족보다도 전우와 조국을 먼저 생각하게 되면서 애국심이 무엇인지는 이때부터 알게 된 것 같았다
월남에서 돌아와 7년 복무를 다시 시작하던 중 만기 1년을 앞두고 전쟁터의 후유증으로 군생
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7년 만기제대를 1년 앞두고 6년 여만에 군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군에서는 전쟁터의 후유증을 배려하는 시스템이 전혀 없었다
근자에 알게 된 일이지만 월남전쟁에 파병된 34만 명 중 6천여 명의 전우의 산화는 너무도 가슴
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월남전쟁과 미국이라는 나라를 경유하며 인생의 전반을 보내면서도 고엽제란 치유되지
않는 질병을 안고 인생의 끝을 다산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도 아쉬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조국에 대한 값을 치루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제 와서 드는 것에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도 없는 것 같다 15년여를 외국으로 떠돌며 보냈던 생활들과
지금 이안의 생활에서 보듯 조국이 지금껏 이안을 보듬는 값에 비해 이안은 조국을 위해
무슨 값을 하였나다
이안은 미국생활에 익숙해 지면서 또 돈을 조금씩 모으게 되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있을곳은 내가살던 조국뿐이라는것을, 아이러니 한것은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떠나온
사람들이 타향에서 성공을 하면 대부분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나역시도 서울을 떠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던것도 사실이지만
미국생활을 하다보니 그들의 사회에 녹아들기는 했으나 그들과의 동조화만은 이루어 질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하루빨리 돌아가 선진국의 모든 것을 조국의 동포
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패스포트를 받아든 이안은 퉁당거리는 가슴을 쓸어안고 북적대는 사람들과 함께 라비쪽으로
밀려가면서도 누가 제지라도 할까봐 두리번 거리는데 공항의 규모가 어마어마함에 다시한번
놀란다 그도 그럴것이 엊그저께 떠나온 김포공항과는 너무도 비교가 되질 않는다 두리번
거리면서 라비쪽으로 가면서도 혹시 누군가 제지라도 할것같은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는것은
어쩔수가 없는것만 같다 보이지않게 옥죄오는듯한 느낌을 같는것은 후진국 사람들이라면
일상적으로 느끼며 살아왔던 생활의 일부분 같은것이 아니였겠나
말로만 그리고 영화에서나 보았던 자유의 나라 미국에 와서 이렇게 기가 죽는것이 아마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안은 당당히 맞서리라 이제부터다, 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러나 퉁당거리는 가슴은 진정이 않되는것 같다 라비쪽을 기웃거리는데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로 보라색 자켓의 여성이 등잔같이 환하게 보인다 하얗게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자은이가 아닌가 7년만의 감격적 해후를 그렇게 공항 라비에서 자은이를 만난 것이다
자은이의 유창한 영어구사에 내심 놀라면서 공항을 나왔는데 밖에서 보는 공항의 규모에
다시한번 놀라고 LA 에 있는 다운타운을 돌아보고 시내의 고층 빌딩을 보고 또한번 놀랐다
잘 정돈된듯한 타운을 보면서 도대체 내가 설자리는 없을것만같은 불안감도 동시에 들었다
자은이는 자상하리만치 나를 안정시켜 주었지만 당시의 마음 한편으로는 미국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마음이 펀하지 못했던것 같았다
LA에서 이틀밤을 함께 보냈는데 자은이가 제일 먼저 권유 한것이 운전 면허증이였다 당장
움직이자면 차를 운전을 하여야 하는 미국의 특성상 면허증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서울
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던터라 자은이가 가르쳐 주는대로 면허에 응시하게 되였는데 한국에서
가져온 국제 면허증은 인정이 안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하여야만 했다
전세계의 표본인 자유의 나라 미국이였지만 자신들의 나라에서 인정한 모든것들은 통용이
안되는 것이다 미국이 인정을 안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모든것을 미국의 규격에 맞추어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백인우월주의의 면면이 잘 들어나 보이는것도
같지만 세계 죄강의 자부심다운 모습도 보여지는것도 같다
처음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3일만에 운전면허증에 도전하려니 마음이 뛰지만 무엇인가 시작
한다는 뿌듯함으로 자신감이 생기는것 같았다 하룻밤에 걸쳐 자은이에게 상세한 설명과
영문으로 된 시험지의 내용을 입지하고 우선 학과시험에 응시했는데 한번에 합격이 되었다
미국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생기는것도 같았다 오전에 학과시험이 합격이 되면 오후에는 실기
시험도 바로 연결이 되는것은 응시자들의 편의를 배려하기 위한것 같았다 나역시도 곧바로
응시하여 합격이 되었는데 면허증을 받아든 순간은 무어라 형용할수없는 그런 기쁨이었다
이안이 더욱 놀란것은 학과시험과 실기시험이 시험자들의 편의에 맞춰져 있는 그들의 행정
서비스를 체감하고 마음속으로 또 놀란 것이다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하여 처음 신청을 하는 단계에서부터 학과시험과 실기시험을 통과하게
되기까지 마지막 면허를 발급받는 전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경험한 그들은 하나같이 시민을
위해서만이 존재 하는 것처럼 친절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운전 면허증을 (Driver's License) 내기 위해서는 지역마다 우리나라의 동사무소같은 곳에서
접수를하고 날자에 맞추어 본인의 차를 사무실 옆에 지정한 장소에 대기 시켜 놓으면 사무소
직원이 옆에 동승하여 규정에 있는 순서대로 출발과 주행 차선 진입 멈춤 그리고 후진을
명령하면서 체크를 하는데 시험관이 진행 한대로 수행하면 합격과 불합격이 그자리에서 결정이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정도인것 같았다 당락이 결정되면 그자리에서 사진을 찍고 사진을
면허증에 부착하여 그자리에서 면허증을 (Driver's License) 내어 주는데 본인이 부담하는
비용은 없다
미국에 온지 며칠도 안되어서 면허증을 내기위해 오고가며 눈여겨 본 미국의 일사분란한 행정
체계에 놀랐는데 직원들은 하나같이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간결하고 물흐르듯 막힘이 없는
서비스는 불필요한 시간 소모를 줄이는것 같았다 좀더 큰 차원에서 들여다 본다면 모든 자원의
낭비를 막는다는 원대함이 숨어 있는 것이다 만나게 되는 직원마다 한결같이 친절하며 한차원
높은 선진 미국의 위대함이 직원들의 가슴속에 꼭꼭 숨어 있는듯했다 왜,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 인지를 이들을 통해 엿보는 순간 인지도 모른다
자은이의 배려로 면허증을 취득했지만 자은이는 오빠의 실력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며칠도 안되여 면허증까지 발급을 받게 된것은 행운이 아닐수 없지만 말로만 듣던 능력위주
의 세상에서 이안의 실력이 첫 검증을 거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날밤 자은이의 축하 파티는
평생 잊을수 없는 그날처럼 너무도 행복했던 밤인것 같았다
어젯밤의 환희의 기쁨이 채가시기도 전에 자은이의 몸놀림이 예사롭지가 않다 아니 미국
생활에 익숙해져서인지 예전에 보던 앳된 모습은 찿아보기 힘들정도로 변해있었다 운전
면허에 한껏 고무되어 있던 미국에 대한 호의적인 어젯밤 환상이 이안의 심장으로 꺼꾸로
달음박질을 하고 있는것 같았다 이안은 자은이가 시키는대로 짐을 싸면서 자은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 부근으로 우선 옮기기로 했다
LA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차량으로는 4시간쯤 걸리는것 같았다 당시 자은이가 운행
하던 차는 빨강색의 무스탕이라는 차였는데 미국에서 운전을 해본것도 이때가 처음
이었다 당시에는 보는것 마다 생소했지만 모든것이 좋아보였던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동안 짧은 시일이였지만 미국에 와서 이안이 보고 느낀것은 도대체 부족한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나라인것 같고 모든것이 풍족함으로 넘쳐 나는것만 같았는데 순간 대한민국
의 하늘이 갑자기 떠오른다 마지막 떠나오던 어둑컴컴한 김포공항이 눈에 보일듯
스치며 사라진다
자은이는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는중이라고 했다 자은이가 있는 학교 부근에 있으면서
앞으로의 일을 논의 하기로 했는데 금방 두달이 지나가 버렸다 2개월이 흐르는동안 내가
할수있는 일은 자은이가 일주일에 두서너차례 올때가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부근 이라도 차가 있어야 다닐수있는 넓은곳이라는것도 실감할수 있었는데 본인의 차가
없다면 집밖으로는 어디로든지 갈수가 없는 미국 인것만은 들은대로 분명 한것 같았다
자은이의 부모님은 샌프라시스코에서 사업을 하시고 있다고 하였는데 웬지 자은이의
부모님을 생각하니 긴장감이 먼저 스쳐간다 한국에서의 인연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던터라 내심 불안한 마음은 놓을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만남을 숨길수도
없는 일인지라 언젠가는 만나 뵌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쉬운일은
아니었다
당시 자은이가 밟고있는 박사 과정은 1년여 정도가 남았다고 하는데 자은이의 성숙해진
모습에서 이안은 반대편에 서있는듯한 자신을 남몰래 발견하곤 했는데 왠일인지 마음이
움츠려 드는것을 감출수가 없었다 자은이의 변함없는 애정은 그대로인것 같았지만 3개
월을 함께 있는동안 이안의 행동 반경이 더욱 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때가 많아지는
것 같았다
당장 무엇인가는 해야 하였지만 어떻게 무엇부터 먼저 해야할지 엄두가 않나고 우선
영어가 소통이 않되는것이 문제 였는데 영어는 빨리 익혀지지가 않을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당장먹고 자는 문제도 자은이에 의존할수밖에 없는것이 영어의 소통이 안되니
매사가 부자연 스러운 나날을 보낼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자은이와 만나고 있던즈음 그날도 자은이를 평소처럼 기다리고 있었
는데 왠 낯선 미국사람들이 별안간 들이닥치면서 패스포트를 보여달라고 하며 이민
그레이션이라고 하는 증명을 꺼내 보이는것이 아닌가 이민국의 사법 경찰인것을 나중
에야 알았지만 별안간 수갑을 꺼내 손목에 채울때에는 정말 놀랐다
미국을 체류하기 위해서는 미국 시민을 제외하고는 이민자들은 거기에 맞는 합법적인 체류
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안은 어느새 자신의 패스포트의 여권 기일이 지난것을 모르고
깜짝 놀랬지만 이미 때는 늦은것 같았다 자은이가 없는사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
이라 제대로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당시의 상황은 난감 그 자체였다 영화에서나 있을법한 일이 지금 이안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안으로서는 그저 묵묵히 그사람들이 하라는대로 따를수밖에 없는 것이다 순식간에 어느
곳으로 끌려간곳이 유치장 같은 곳이였는데 나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불안한 눈빛들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간수가 부르길래 나가보니 자은이가 놀란 얼굴로 찿아온 것이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아무 걱정하지말고 기다리고 있으라 하면서 재차
안심의 당부를 잊지 않는다 자은이를 보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는것 같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는지 알수가 없는것이 더욱 답답할 뿐이지만 자은
이를 보고는 일단 안심은 되였지만 그날 그렇게 자은이를 본것이 우리의 마지막 운명
인것을 그때는 알길이 전혀 없었다
나중에야 짐작으로 안 일이지만 누군가 이민그레이션에 수상한 동양사람이라고 신고를
했다고 들었는데 지금껏 신고한 사람을 알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자은이를 미행한
부모님 일수도 있었지만 거기까지는 차마 단정을 짓기가 어려운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국에 와서까지 부모님이 그렇게 했을리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나의 예측이 빗나갈수도 있겠구나 생각한것이 이민그레이션 유치장에
수감된 직후부터 걱정하지 말라던 자은이로부터 연락이 두절 된것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납득이 가지않는 부분인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의 강압에 의해 자은이의 행동이 제약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맞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벼랑으로 내몰려져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몆개월만에 미국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서울로 송환 된다고 생각하니 모든게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도대체 나에게 이런일
들이 일어 날수 있다는것이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쩜 영화에서나 나올 범직한 일들이
지금 당장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임시 수감된 유치장이라서 그런지 복잡한것 같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유치장에서의 식사는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나왔는데 그리
나쁜편은 아닌것 같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둑 컴컴해지면서 분간은 안됐는데
철창 틈으로 내려다 뵈는곳이 타운빌딩 같은것들이 뜸뜸이 보이는것이 도시 외곽인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창틈으로 조금 보이는 밤하늘에는 별들이 보이는데 서울의
하늘처럼 느껴지기도 한것이 정말 꿈을 꾸고 있는것만 같았다
갑자기 봇물처럼 터져나온 애수의 강물이 이안의 마음으로 마음껏 흘러든다 철장틈으로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별빛들이 걷잡을수 없는 이안의 마음속으로 쏟아져 내린다
그렇게 2주가 흐를즈음 임시 유치장에서 송환 수속이 끝난는지 다른지역으로 이동 수감
되었는데 규모의 수용정도를 보니 정식 유치장인것 같았다 외국 영화에서 보던 교도소
장면이 떠올려 졌는데 영화에서 본것과 거의 똑같았다
거칠게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뒤석혀지기 시작했는데 내심 걱정도 되였지만 그렇게
두려움은 없었다
당시에 이민법으로 저촉되면 가차없이 송환 절차를 밟는것이 정석이였다 그렇게 실의의
몆일이 아무 생각없이 흐를즈음 유치장에 수감되어있는 동양사람은 이안밖에 없었다
유치장에 입소할때 소지품 검사를 하는데 간수가 영문으로 표기한 국제 태권도 단증을
보고 놀라워 하게 되면서 유치장 안에 태권도 마스터가 있다고 금방 소문이 난 것이다
동양무술 을 어떻게 알았는지 유치장안에서도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들은 정중히 무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알아들을수가 없었지만 무술의 동작을
보고 대충 짐작을 하고 가르쳐 주면 무척 좋아하고 그랬는데 감방에서도 낙천적인 그들을
바라 보면서 좌불안석의 나를 비교하곤 했는데 나의 마음은 하루하루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기분을 그들은 알턱이 없었다
자은이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3개월을 만나면서 우리를
갈라놓았던 7년이라는 세월이 원망스러웠을 따름이었다 자은이의 부모님을 생각해
보아도 잊고 있었던 씁슬한 과거로의 회귀는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아무런 잘못도없이 체류기간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철창으로 된
감옥에 있게된 황당한 사유는 통탄할 노릇이지만 무엇하나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쩌면
이것 또한 나의 운명인것 같았다 더욱 가슴이 찢어질듯 괴로웠던 것은 자은이를 더이상은
볼수가 없었던것이었고 여러가지 의문들로 가득했던 당시의 상황을 도대체 정리할수가
없었다
당장 송환을 앞두고 있는 분위기는 이안의 마음을 더욱 옥죄고 있었다 얼마후 유치장안에서
도움을 받아 자은이에게 몆차례 전화 연락을 시도하여 보았지만 전화도 두절된 상태였다
7년만에 만나 3개월의 짧은 만남이 전부였었지만 그 3개월을 평생토록 가슴에 안고 살았던
이안으로서는 운명이라 하기에는 어쩌면 자신을 단죄하는듯한 아집속에서 평생을 그렇게
살아 온것 같았다
송환을 앞두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몆차례 이동을 하며 불법자들만 모아두는 수용소로
보내지고 그렇게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던 어느날 간수가 밖으로 나오라는
손짖을 하는데 간수뒤에 동양사람이 서있는것을 보고 순간 놀라면서도 반가웠다
불안한 마음은 또 잡혀 왔나 하고 불길한 마음이 스치면서 혹시 하는데 첫마디가 안녕하
세요 한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한국말에 왈칵 눈물이 나오려는것을 간신히 참는데 김창휘
목사입니다, 하고, 두번째 인사를 하는데 갑자기 한줄기 빛과 같은것이 눈앞으로 스쳐가는
것 같았다
목사님을 통해서 이안이 수용되어 있는곳이 이민자들만 전문으로 수용하는 텍사스라는것도
이때 처음 알았지만 그곳이 어디엔가는 이안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단지 혈혈 단신으로 이역만리 낯선곳에서 복바쳐오는 설움을 밤낮없이 견디는것이 괴로
웠을 따름이었다 광대가 날이선 칼날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공연하는것처럼 하루하루를
어렵게 보내고 있던 나날들이었다
미국 전역 순회 목회를 하던중 텍사스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유치장에 한국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얼핏 듣고 목사님도 혹시나 하고 와 보았다고 한다 미국생활이 오래됐는지 영어도
유창하고 무척 세련미가 있어 보인다
짧은 순간이였지만 그렇게 상견례를 하고 목사님은 돌아갔는데 이튿날 목사님이 왠 중년
여성 한분과 함께 찿아왔는데 하룻 사이에 목사님이 두번씩이나 찿아온것이 고맙기도 하고
너무도 믿기지 않는 일이라 이안은 또 꿈을 꾸는것 같았다
너무도 반가워 손이라도 부여잡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자존심만은 잃지않으려고
애쓰면서 목사님을 보고 이안이 먼저 인사를 했다 목사님. 다시뵈니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하니 목사님은 웃으면서 별일 없었죠, 하는데 옆의 여성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쳐다본다 목사님이 다시 찿아온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안의 석방을 위해서 보증을
해주실분을 모셔왔다고 하면서 그 중년 여성을 소개한다
여성은 휴스톤에서 양식 요식업 사업을 하고있는 이숙희씨라고 하는데 미국법은 누군가
사람에 대해 책임보증을 하고 보석금을 내면 석방이 된다고 하면서 이여사가 대리인을
자처하고 나서겠다고 하지 않는가 이안은 흐트러지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벌어지는 기적같은 일에 순간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것을 멈출수가 없었다
성경책에서만 보아오던 모세의 기적이 지금 당장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같은 동향인을 만났지만 이런 도움을 받는다는것은 기적이 아닐수가
없었다 목사님도 그랬다 자신도 무엇엔가 이끌리어 우연히 방문하게 되어 나를 만나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다 하느님의 인도라고 하심을 이야기 했을때는 정말 하느님이 보고
있는것도 같았다
목사님도 미국에 처음와서 무척 힘들었다고 이야기 하면서 누구나 다 이안같은 시련을
겪는다는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면서 상심이 컸었을 나의 마음을 붇돋아주는 말을 할때에는
하느님이 환생해서 내앞에 있는듯 했다
신기한것은 이런 곳에서 동향인 그것도 목사란 성직자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한 일 이였었는데 한국사람으로서 정말 자랑스러워 보였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minister) 목사의 신분은 미국에서도 신망과 더불어 존경을 받는 신분이라는 것이다
무엇엔가 이끌리어 이안을 만나게 됐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지금껏 이렇게 가슴에 남는
것은 너무도 기적적인 만남인것도 그랬지만 선뜻 거금의 보석금을 주저없이 내어주던
그사람들의 호의는 이렇게 평생토록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이다 항시 그날의 어려웠던
일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 왔던것 같다 언제서부터인가 오른쪽을 비워두는 습성은 아마
그후서부터 였던것도같다 평생토록 정의의 마음 가짐으로 살아온것도 이때의 감동들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섰던것 같았다
며칠후 목사님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나와 이여사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이여사의 사업을
자연스럽게 돕게 되었다 잭스미스란 미국 사람인 남편과도 가까워 지기 시작했는데
이여사에게는 (Eleméntary schòol)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남자애와 ( míddle schòol )
중학교에 다니는 여자 아이로 자녀가 두명인데 시간제 보모가 돌보고 있었다
이여사는 휴스턴이라는 곳과 다운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서 사업체 몆곳을 운영
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넓은 곳 이기도 하지만 조금 떨어진 곳도 차량으로 두세시간씩
소요 되곤 했는데 이안이 처음 시작한 일은 아이들의 등교를 맡아 근교의 지리를 익히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자은이를 수소문 하고 싶었지만 당장 이동을 제약받고 있던터라 어떻게 해볼
수단이 없는것 같았다 자은이의 이야기는 할수가 없었는데 마음 한켠으로 찿아드는 슬픔은
그렇게 남몰래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시간 틈틈히 영어를 익히기 시작 하던중 이여사의 도움으로 지역에 있는 2년제 대학에
편입하게 되면서 (Eng·lish)영어가 일취월장으로 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업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하였다
모든 사업체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손볼데가 한두군데가 아닌것이 한눈에 들어나 보인다
흥미로웠던것은 마침 한국에 있을때 홍보과에 있었던 경험이 아주 중요하게 연결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적인 디자인과 디스플레이며 조명의 배치및 시각적 분위기
연출의 전문성을 갖출수 있었던 그때의 경험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서 보답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여사의 사업장의 일을 도우면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 했는데 미국의 학교에서는 입학
자격은 누구나 자유롭게 주어지지만 졸업은 학교에서 정해져있는 학점을 취득하여야만
가능하도록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처음 입학할때 능력순위로 크라스를 나뉘어 간단한
시험을 보기는 하지만 대개는 그기준을 능력대로 통과하는데 수업하는 도중이라도
미달이 되는사람은 중도하차를 할수도 있다
한국처럼 학비도 4기분으로 나누어 내는데 미국시민이면 250불 영주권이 없는사람은
500불을 내야했다 특이한것은 능력위주로의 교육이 흥미로웠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교육을 이끌어 갈려는 노력이 대단한것 같았다
처음 랭귀지( lan·guage)코스를 6개월을 밟으며 시작한 수업이 귀에 들어오기시작
하면서 아침 8시에 오전 수업을 마치면 오후에는 이여사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는데
이여사의 따뜻한 배려는 항상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도 되는
것이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수 없을것만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것은 자은이를 영영
만날수 없을것만 같았다
그동안 자은이의 주소지로 여러번 편지도 하여 보았지만 소식은 오지 않았다 전화역시
연결이 안되어 마음은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이곳을 떠날수 없는것은 보석금으로 나오긴
했어도 거취 이동 제한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이동을 할수가 없었다
밤이면 자은이의 영상을 부벼안고 외로움에 몸을 떠는날들이 많아졌지만 이여사에게는
내색을 할수가 없었다
아이들 등교로 시작해서 오전 수업이 끝나면 이여사의 사업장으로 뛰어 다니다 싶이
바쁜 나날이 계속되면서 나를 돌아볼 시간도 없었지만 자은이의 영상을 하루도 놓아
본적은 없는것 같았다 어떤 날은 정말 보고싶은 생각에 남몰래 울고싶은 날들도 많았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는 없었다
사업장들의 시설이 오래 된 것들이 많아서 일은 끝이 없었지만 성심을 다해 일을 하고
있을무렵 이여사에게 차도 한대 선물을 받았는데 훠드에서 나오는 왜건이었다
미국에서는 지엠과 훠드로 대표되는 두개의 자동차 회사가 있었는데 (Gèneral Mótors)
지엠에서 아이콘과 같은 ( Lincoln Continental)링컨 콘티넨탈이 있다면 (Ford Motor)
미국 생활을 하면서부터 미국이라는 나라를 알게되면서 더욱 놀란것은 부족한 것이
라고는 없는 것도 같고 끝도없이 넓다는 것이다 텍사스만 보더라도 목축업이 잘 발달된
주 소재지로서 우리나라의 광역시주의 한곳같은 주로서 남북한을 합쳐도 7배이상의
면적을 가졌는데 석유 까스를 비롯하여 무한히 묻혀있는 자원역시 미래의 앞날을
위하여 개발을 않하고 있다는 것이다
텍사스 주(State of Texas)는 미국 남부에 있는 주이다. 면적은 알래스카 다음으로 넓고,
인구는캘리포니아주 다음으로 많다 1836년 멕시코로부터 독립하여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가 1845년 12 월 29일 미국의 28번째 주로 흡수되었다한다
미국 생활에 여유를 갖게 되면서 한국을 가끔 생각할때가 많았는데 너무도 풍족한것에
부러운것도 많았지만 너무도 없는것이 많은 조국으로 가져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때가
정말 많았다
이여사는 항시 간결한 움직임으로 행동하는 나를 보고 내심 놀라워 하는 눈치였는데
나중에 이여사의 한 말씀이 생각이난다 당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것을 알았다
웬 한국사람이 송환위기에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여사님도 그사람을 보면 당장 무언가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것이라고 말했다고한다 그길로 목사님을 따라 당장 나를 보게
되었는데 별말없이 그냥 미소만 지은것은 목사님의 말씀이 빈말씀은아니였구나를 생각
했었다한다 함께 일을 하면서 매사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것을 보면서 이여사는 처음
보았을때처럼 늘 칭찬을 하면서도 고마워 했다
이여사의 집에는 작은 풀장이 있었는데 한달에 한번 정도는 풀장에 모여 가까운 사람
들과 모여 바베큐 파티를 하곤 했는데 목사님도 늘 오셔서 함께 해후를 하며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눈깜짝할 사이 일년이 흐른 어느날 레스토랑에 머물고
있을때의 일이다
가게안에는 당구를 치고 있는 두사람과 몆몆은 바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누군가
들어오며 별안간 권총을 꺼내들고 그것도 바로 내옆에서 (cashier counter)금고 앞에
서있던 가운터 아가씨에게 돈을 끄내라고 소리를 지르는것이 아닌가 당시 가게안에는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강도는 개의치 않았는데 나중에야 안일이지만 마리화나에
잔뜩 취해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미국 생활을 하며 뉴스에서 간혹 보긴 했어도 내가 있는 곳에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것도 백인 강도를 목격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터라 당황하는 순간 카운터의
아가씨는 나를 쳐다보는것이 아닌가 그순간 나도 모르게 옆에있던 재떨이(Ashtray) 를
집어 들어 권총을 들고 있는 강도의 손목을 향해 던지면서 비호같이 다가가서 일격을 가해
쓰러 트렸다
전광석화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강도는 급소에 맞았는지 일어나질 못하고 누워
있었는데 홀안의 사람들이 달려와 놀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것이 아닌가 경찰이 오고
이여사도 달려왔는데 내심 놀라는 눈치였다
경찰조사에서 강도는 마리화나에 취해 있었다고는 하나 나의 행동을 두고는 찬사반 우려반
으로 걱정을 한다 만약 강도의 일행들이 있었다면 아마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
라고 하면서도 태권도의 위력을 그들은 높히 평가하는것 같았다
그후 맨손으로 권총을 든 강도를 잡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안을 만나러 일부러 찿아오는
사람들도 생겨 나면서 그지역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급기야 지역 방송에서도 취재가 오기
까지 했는데 어떤이들은 이안의 주먹을 만져보는사람들도 있었다
그사건이 지난 얼마후 이여사의 사업이 날로 번창하는 가운데 좋은( Relátion·shìp)
릴레이션쉽은 계속 유지되고 있던중 이여사의 도움으로 사업장 부근에 태권도장을
개업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동양무도관으로 이름을 걸었다 소문이 나있던터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 했는데 아이들도 많았지만 어른들도 많았다 특이한 것은
한국과 달리 다양한 신분들이 많은것에 놀랐는데 의사 변호사 들도 있었다
도장을 개설할무렵 당시 텍사스 오스틴에 계시는 선배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행정적 지원과 함께 모든것을 미국식으로 처리하여야 하는방법을 터득하는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은것은 운동하는 방법은 어디를 가나 다를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80년대초 미국 각 지역에는 태권도 선배님들이 여러 경로로 활동하고 계셨는데 당시 미국
에서 이름이 나있으신분은 동양사람으로는 이준구 사범님이셨다 태권도의 보급을 위해서
미국을 개척하신분으로 한국사람으로서는 정말 자랑스러운 분이기도하다 선배님들 덕분에
이렇게 도장을 쉽게 열수 있는것도 태권도의 이름을 알린 선배님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선배님의 도움으로 도장을 열었으나 처음에는 어려움도 많았는데 미국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무엇이던지 눈으로 보고 자신이 직접 체험해야만 했다 무엇인가는 그들에게 보여
주는 태권도를 해야만했다 처음에는 다소 어려웠던것은 체격이 워낙 크고 건강해서
그런지 웬만큼 급소를 타격해도 쓰러지지가 않을때는 당황스러울때가 많았는데 호신술을
할때에는 연습이라 해도 있는힘을 다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당시만 해도 백인들이 드나드는 업소가 따로 있을만큼 유색인종들의 차별이 극심할 때
였지만 태권도 도장을 찿을때만큼은 그를의 태도는 예외였다 도장에서의 규칙을 엄숙
하게 정했는데 미국사람들의 특징은 그것이 무엇이던지 자신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것
이상의 유용성이고 가치가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인정을 하고 따르는 편이었다
미국법도 그랬다 법은 차별은 두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허지만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재고를 해보는 관대함도 있는 나라였다 미국사람들의 개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
분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승복을 확실히 하는것에는 놀라운점도 있었다 비겁함이란
조금도 묻어 나오지 않는것처럼 태도가 분명한것은 아마도 대륙적 기질의 영향과 지향
하고자하는 그사회의 관념이 습관처럼 몸에 배인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도장내에서 태권도의 모든 동작을 한국어로 가르쳤는데 그들에게 생소하고 어려운
발음 이였지만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 국기와 태극기를 양편에
걸어놓고 운동을 시작 하기전 태극기에 인사를 시킬때마다 마음속으로는 무언지 모를
뿌듯한 감회를 느끼곤 했는데 어쩌면 타향에서의 향수 때문이였는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들과(child) 성인을 (a·dult )나누어 가르쳤는데 일주일에 3회씩 미국식으로
편제를 하여 가르쳤다 몆개월동안은 모든것을 선배님의 도움을 받았는데 미국에서는
특히 세금 문제를 엄격하게 관리한다는 말도 이때 처음 들었다
당시에는 일인당 주단위로 70불씩 받았는데 미국사람들의 평범한 근로자들이 한달
수입이 평균 1200에서1500딸라 였으니까 월 300불정도는 이들에게는 적지않은 돈이
였지만 미국사람들의 태권도 열기는 대단한것 같았다 심지어 어떤 가정에서는 자녀와
함께 와서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줄도 모르고 바쁜 나날속에서도 자은이를 한시도 잊어본적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연락이 두절된것인지가 정말 궁금했고 자은이의 마음을 알고 싶었지만 소식을
전혀 알수가 없는것이 답답할 뿐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내모습을 본다면 자은이도 무척 기뻐
했을텐데 너무도 아쉬운 생각이든다 처음공항에서 만나던 순간들과 자동차 면허를 땄을때처럼
그날 그리고 그날밤 기억들을 내내 지울수 없고 떨쳐 버릴수가 없는것이 정말 괴로웠다
한동안 태권도 도장일로 사업장일을 소훌히 할수밖에 없었는데 이여사는 오히려 도장에 상주
하다싶이 서류정리며 시청에 등록하는 일이며 세금관계의 전반을 일일히 체크하며 이안을
돕고있었다 당시 태권도 도장을 개설하자 몰려든 사람들이 3백명이 넘었는데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태권도가 신비한 동양무술처럼 여겨졌기 때문인것 같았다 그도그럴것이 맨손으로 권총
강도를 제압 했다는 소문이 나있던터라 주먹속에 철판을 넣었다는둥 손을 직접 만져보는사람들
까지 있었다
개설하자마자 몰려든 사람들로 서류정리며 도복이며 모든것은 선배님이 챙겨주셨는데 선배
님의 도장에서 발급하는 증명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선배님은 무덕관 출신으로 초창기에
미국에 오신분으로서 태권도로 텍사스에서 성공을 하신 분이기도 하다 당시에 선배님의 제자
서너명이 상주하며 돕기도 하였는데 선배님이 지도한 (bláck bèlt )블랙벨트 유단자들이였다
선배님은 텍사스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신 분으로서 주지사 다음으로 유명하셨던 분이시기도
했는데 선배님의 제자들역시 선배님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다시한번 놀랐는데 한국사람으
로서 제자들의 상관 관계쯤 떠올리는데 미국 제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이상으로 깍듯했다
텍사스 전역에 선배님의 태권도장이 20여개가 넘을 정도로 유단자 제자들을 그렇게 많이 배출
하신 분이셨다
미국 제자들이 선배님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처음엔 마음속으로 그렇게 자랑스러울수가 없었
는데 그들 또한 나를 대하는 태도역시 무술인답게 정중했다
도장을 개설하자마자 미국돈으로 몆만불이 순식간에 들어오는것을 보며 마음속으로는 금방
성공할것같은 기분이었다 이여사가 놀라워 하면서도 너무도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뿌듯해지며 이제 은혜를 갚을수 있는날이 다가왔구나 생각하니 마음 한곳으로는
샘솟듯 눈물이 나올려 한다
이여사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인가 해내었다는 자신감도 들었지만 마음 한편
으로는 왠일인지 허전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이안은 도장을 개설하고 눈코 뜰새없는 바쁜 날들이 지나가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자은이를 떨쳐버릴수가 없는것이 자은이를 잊기에는 지난 시절들에 있었던 가슴아린
추억들이 이안의 몸 구석구석 너무도 깊게 박혀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이여사의 클럽
일을 도왔는데 이여사가 도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서 함께있는 시간도
많아지면 질수록 밤마다 자은이의 영상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시 이여사와 이안과의 나이차이는 13년이나 났지만 이여사는 항시 이안을 친동생
처럼 잘 대해 주고 있었다 도장일이 성황을 이루면서 보석금을 반환하려 했지만 이여
사는 극구 사양한다 그러고보니 벌써 이여사의 집에 머문지가 3년이 되여가는것 같았다
3년전 이민그레이션 유치장에서 자은이와 마지막 헤여지던 그날이 생각이 난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가슴이 아픈 날이었지 아마도 자은이도 그때의 영상들을 떠올린다면 언제나 마음이
아프겠지 자은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이안이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던 지난날들의 필연적 운명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그세월속의 감성의 순간들..그누구도 우리들의 순수했던 열정만큼은 막을수 없엇던것처럼
그 기억들에서 멀어질수는 있어도 결코 잊을수도 없는 것이다
이안은 지난일을 떠올리며 착찹한 마음으로 생각한다 그 마지막 있었던 그날들을 확인하고
싶은것이다 자은이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런날은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흐르는
강물을 거스를수 없듯 흐른 세월을 뒤로 돌릴수야 없는것이 아닌가
연민으로 얼룩진 자은이의 영상을 끌어안고 클럽일이며 도장일을 바쁘게 오고 가면서도
텍사스를 벗어날수있는 방법을 물색하던중 방법은 미국 시민과 걸혼을 하는 방법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영주권을 취득하기로 마음을 먹고 은밀히 미국 사람을 탐색하고
있을즈음 선배님의 주선으로 미국 여성과 위장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안이 미국에 온지
3년째가 될 무렵 인 듯했다
도장도 차츰 안정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미국에서는 미국(cit·i·zen) 시민과 유색인종
들의 결혼(mar·riage)에 대해서는 감시가 심했는데 종종 들통이 나서 취소가 되는일이
빈번 하다고도 이야기를 들은터라 조심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6개월동안은 부부 행세를
해야만 했는데 양해를얻어 불편함을 감수하고 함께 있어야만 되었다
결국 이여사에게도 미국여성과의 결혼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미묘한 감정같은것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별로 탐탁해하는 눈치는 아닌것 같았다
그렇게 결혼한지 일년이 지나서야 소시알 세크리트 카드 (sócial sáfety card)번호와같이
영주권이 (gréen càrd ) 나왔는데 4년째가 접어들어서야 자유의 몸이 되는듯했다
미국에서 시민으로 인정이 되면 그린카드와 소시알 세큐리트 번호를 부여 받게되는데
그린카드는 우리나라 주민증 같은 것이고 소시알 세큐리트 번호는 죽을때까지 갖고 다니는
사회로부터 보호를 받을수있는 안전망같은 번호 즉 군인으로 말하면 군번같은것이기도
하다
모든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진것만은 아니었다 결혼을 해주었던 미국여성이 이혼을 거절하는
바람에 한동안은 너무도 힘들었던 순간들이 있었는데 설득을 하는데에만 2년이 또 걸렸다
우여곡절끝에 영주권을 받고 미국생활 6년만에 완전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는 적지않은 시간이
그렇게 또 걸려야만 되었다
이여사에게 도장을 넘겨 주기로 하고 그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는데 매사가 그렇게
마음대로 이루어 지지가 않았다 수용소에서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6년이라는 긴시간이 걸린
듯 하였지만 어떻게 보면 모든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이는 오늘을 이야기 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안은 몆번이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그순간을 이정표삼아 정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올곶은 정신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 가겠노라고 .
텍사스를 떠나기 마지막날 목사님과 이여사의 가족 그리고 도장 선배님과 지인 몆사람이
함께 모여 환송겸 바베큐 파티를 했는데 목사님의 짧은 말씀중에 어디를 가나 가족처럼
잊지말라는 당부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참을수가 없었다 특히 이여사의 친절은 이안이
죽을때까지잊어버릴수 없는것은 인간으로 태여나서 이렇게 인간적인 감동과 사랑을 받은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여사에게 연민의 정을 더욱 느끼는것은 송환 위기에서 이여사의 확신과 판단은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인간적인 휴머니즘은 이안의 가슴속에 언제나 이정표가 되여 남아
있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목사님과 이여사의 첫 만남처럼 변함없는 우정을 간직하며 이안은
남아일생을 그렇게 깨우듯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할것을 몆번이고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또
되뇌여 본다
회식이 끝나고 이안은 도장에 혼자남아 자신의 땀이 흠뻑 배인 도장안을 둘러보며 떠나는 아쉬움과 마음 한구석을 늘 차지하고 있던 자은이의 영상이 한데 교차하며 슬픔이 빗물처럼 마음으로 젖어든다 자은이와 이민그레이션 유치장에서 헤여질때가 마지막으로 그뒤로는 소식을 알길이 없었던것이 6년이란 세월이 또 지나갔다 그렇게 미국에 와서 3개월만에 자은이와 헤여진것이 이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6년이 지나간 것이다
어느날 오빠는 나의 분신이야 하고 말하던 자은이의 모습이 이안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20대에 자은이를 만나 15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지만 한날 한시도 마음속에서 자은이를 놓아 본적은 없는것 같았다 이민그레이션에서 마지막 이후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자은이가 나를 잊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할수가 없었다 다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님의 간절한 바램을 저버릴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여 보았지만 그것역시 이안의 마음을 헤쳐 놓기에는 부족한것 같았다
7년이라는 긴시간을 떨어져 있다가 극적인 해후에서 3개월만에 또다시 헤여지게 된것이 우리의 운명이란 말인가 오직 자은이를 가슴에 묻고 달려왔던 지난날들이 일순간 떠오르며 걷잡을수없는 슬픔과 또다른 마음 밑바닥에서는 굴절되어오는 비열한 슬픔이 남몰래 교차한다
자은이가 부대 탐방을 와서 처음 만났던 군 식당이 생각이난다 눈망울이 유난히도 커보이는듯한 모습으로 맞은편 식탁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그순간이 떠오른다
그렇게 잊은듯 스쳐간 학생이 어느날 탁구장에서 또다시 만나게 될줄은 몰랐섰지만 자은이와 나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섰지 지금껏 자은이를 놓을수 없는것은 아마도 나의 이기적인 위선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무엇인가 어휘로는 설명할수없는 그무엇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생활 6년만에 영주권을 취득하고 어느정도 돈도 벌었지만 웬일인지 마음은 그렇게 즐겁지가 못한것 같다 물론 고생이야 했지만 이국만리 떨어진 타향살이라는것이 원래 고생길이 아닌가 남들이 어렵다는 영주권 취득도 했지만 이안의 마음은 착찹하기만하다 내일이면 자은이가 있는곳으로 갈 것이긴 하다만 그보다 걱정이 앞서는 것은 자은이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을까 가 궁금하면서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나의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것은 맞지만 그보다 6년동안 일언반구도 없었던 자은이의 속사정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더군다나 마음만 먹는다면 나를 찿을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할수 없었던 그 이면이 궁금한 것이다 어쩌면 내일 당장 만나서 자은이의 진짜 속마음을 알아 보아야지 이안은 마음속으로 몆번이고 다짐해 본다 그래 내일이면 어쩌면 내일이면 모든것이 알게 되겠지. 이안은 당당한 미국시민으로서의 첫발을 이제 새로히 딛을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켠으로는 벅찬 희열 감이 꿈틀거리며 솟아오른다
체육관 창넘어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빛이 유난히도 밝아 보인다 수원에서 연탄공장에 다닐때가 생각이 난다 한달을 채우고 급여를 받아들고 집으로 향하던 내어깨위로 쏟아지던 그 밤하늘에 별빛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듯 하늘위에서 빛나고 있다 이민그레이션 유치장 창밖으로 보이던 밤하늘의 그별빛도 어쩌면 오늘밤 함께 빛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이면 휴스톤을 떠난다 내가 머물던 고향 같은 곳 이였지만 더이상 머물수 없는것은 자은이를 찿고싶은 생각 때문이다 아무래도 내눈으로 직접 자은이를 만나 그 진심을 확인해볼 작정이다
그동안 자은이의 박사과정이 끝났다면 아마도 소재지라도 있을것이 아닌가
이숙희 여사님에게는 체육관과 8만불에 구입하여 살고있던 저택을 함께 드렸지만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한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무엇을 다드려도 아까울것이 없을만큼 그은혜는 잊을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간절한 순간의 휴머니즘(humanism)
오스틴에 계시는 선배님의 중재로 결혼했던 미국여성과 이혼( divorce ) 절차를 밟는데에만 이년이란 시일이 걸렸다 미국에서는 결혼하게되면 그자리에서 결혼(marriage license)증명을 받게 되는데 6개월동안은 이민국에서 3번 정도 검사를 나온다 3번 나오는 동안 결격 사유가 발견이 안되면 1년정도 지나면 그린카드 (green card)가 나오면서 소시알세큐리티카드( social security card )가 함께 나오면 그날부터 미국시민으로 인정이 되는 것이다
결혼하고 바로 이혼을 하게되면 이민국의 의심을 받게되기 때문에 어느정도 세월이 흘러야 가능한데 그게 약 일년이상이 지나야 가능한 것이다
이모든 과정을 선배님의 말씀대로 이행을 하면서 조심을 해야만 했는데 조금이라도 이민국의 의심을 받는다면 당장 무효가 되면서 추방도 될수있기 때문이다
미국 여성에게는 당시 위자료로 이만불을 지불했는데 선배님의 제자였기에 모든것이 원만하게 해결이 된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도 (道)의 정신을 이완하는 행동이기도 한것이 무도 (武道) 의 길로 나선 사람들의 적절치 못한 행위 였던것만큼은 분명하지만 당시의 절박했던 이안으로서는 모든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지금껏 가슴에 두고두고 남는것은 선배님의 배려는 너무도 감격적이었다
6년을 하루같이 함께 있어준 사람들 목사님 그리고 이숙희 여사님과 선배님의 배려가 없었다면 이안은 결코 오늘같은 날은 없었을 것이다
6년이란 결코 짧지않은 세월이였지만 극심한 변화의 소용돌이는 이안으로서 감당하기조차 힘들었던 날들이 많았섰다 어려울때마다 목사님과 이숙희 여사님 오스틴 선배님 세분의 멘토가 있었기에 그렇게 어렵다는 영주권도 만든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오늘이 있기까지 이안이 견딜수있었던것은 아마도 자은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은이와 석연치 않게 헤여진 뒤로는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수없는 우리 두사람만의 숙제를 풀어야 겠다는 의지가 이안을 이렇게 이끈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무언가 형용할수없는 마음 끝에 매어달린 미련과 아쉬움 그리고 비굴함이 교차하지만 자존심의 한계를 곧추 세워야 되겠다는 의지가 이안을 지금껏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게 만든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에 첫발을 딛고 자은이와 3개월만에 헤여질때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자은이는 미국 시민권자였던것을 참으로 아이러니 한것은 당시 이민그레이션으로 들어갔을때 자은이의 마음만 있었다면 이안을 구제할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보건대 모멸감을 넘어 배신감에 몸을 떨어야만 했던 지난 날들이기도 한것이 이안을 이렇게 이끌어 준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됐던 내일은 텍사스를 떠나 이제 제2의 인생을 헤쳐 나아가야 된다 물론 자은이의 주소지를 확인을 해볼 생각이지만 은근히 마음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서는 것 같다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하지만 자은이를 생각하니 기쁨반 걱정반 오늘밤 이안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는 자은이의 영상은 절대 지울수 없을것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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