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섭리
우연(偶然).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일. 흔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있어났을 때,
우리는 우연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저도 우연처럼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때는 9살 무렵이었습니다.
정말 우연한 계기로 성당에 가게 되었고, 우연하게도 미사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처음 참여한 미사에서,
저는 문득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연히 접한 성당, 우연히 참여하게 된 미사, 그리고 그런 우연 속에서
저의 사제 성소의 씨앗은 심어졌습니다. 우연히 신부님이 되고 싶었다는 마음이 들었던 소년은,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고,
신앙을 배우며 조금씩 그 성소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영양분 삼아,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연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리되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저의 성소는 조금씩 자라났고, 어느새 싹이
터서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되었습니다. 아주 작고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된, 겨자씨만 한 신앙의 씨앗은 큰 가지들을
뻗어 그 끝에 새들이 머물 수 있는 사제 성소의 나무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이 모든 시간들이 그저 한 소년의 우연한 사건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하 느님의 섭리라고
이야기한다면, 저의 인생은 하느님 섭리에 초대되는 기적이었음을, 참으로 오묘한 그 분의 초대였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그리되었는지 잘 모를 경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역시도 우연을 경험했습니다.
우연처럼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교회를 만나고, 신앙을 만났습니다. 이제는 그 우연과 같은 시간을 돌이켜보며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참으로 거룩하고 복된 시간이었음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였음을'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네 인생에 심겨진 신앙의 씨앗을 우리가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오묘한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는 싹을 틔워 주십니다.
자고 일어나며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나는 그 여정의 씨앗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자라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 이야기는 결코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섭리일 것입니다.
비록 어떻게 그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싹이 터서 자라고, 줄기에 이삭이 영글게 되는 우리의 신앙이 더욱 큰 열매 맺는
나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언제나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감사드리며,
이번 한 주간도 그분께 의탁하는 나날이 되기를 청해봅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 26-27)
(20240616연중제11주일)
목성동 주교좌본당 보좌
서동호 베드로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