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순종-사귐-사랑-상처 》
살후 3:14~15
〈 네 개의 ‘ㅅ’ 〉
영어권에서는 초성이 같은 단어를 묶어서 ‘3S’ 혹은 ‘4S’ 등으로 글을 쓰기도 합니다.
우리 한글에서는 많이 활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주제를 정리하다 보니 순종, 사귐, 사랑, 상처 네 가지입니다.
공교롭게도 네 단어 초성이 모두 ‘ㅅ’입니다.
‘4 ㅅ’(사 시옷)입니다. 그래서 아예 네 단어를 설교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순종하지 않거든 사귀지 말라!” “사랑은 하되 상처는 받지 말라!”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꼭 이렇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순종하면서 상처받지 않으면서 사귀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그 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무엇에 순종하며 삽니까? 〉
(14절)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 기독교인은 어떤 말에 순종하는 사람들인지 역설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측면에서 둘로 나뉩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과, 세상 풍조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순종’을 염두에 두고 사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나는 이 사람에게(이것에) 순종할 거야!’ 이렇게 작정하는 일은 드뭅니다.
결혼을 하면서도 “이제부터 나는 이 남자(여자)에게 순종해야지!”라고 다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 이 사람은 나에게 순종하겠지?” 합니다.
☞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사람은 무언가에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태어나 걷기 시작하면 어린이집, 유치원에 가고, 일곱 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갑니다.
열세 살이 되면 중학교, 열여섯에 고등학교, 열아홉에 대학을 갑니다.
남자는 군대에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립니다.
이 모든 것이 교육제도, 사회와 문화, 풍습, 국가시책 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무의식 중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인지하고 따르니, 순종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다 보면 ‘성공’과 ‘출세’가 중요한 가치관이 됩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의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다른 사람이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현실을 성경은 ‘세상풍조’라 말합니다.(엡 2:2)
☞ 세상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세상 풍조에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 복음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
이렇게 사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이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 하라!
“~ 이 편지에 한 우리 말~”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순종하는 일은 세상 풍조에 순종하는 것과 대립됩니다.
복음에 순종하는 일이 곧 크리스천,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세상 풍조에 이끌려 가다가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고, 평생 죄 가운데 숨을 쉽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예수 십자가 보혈의 공로뿐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사형 당하시었으니, 나는 예수님의 제자요, 종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아, 너희가 지금 잘 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의를 줍니다.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여전히 세상 풍조에만 순종하는 이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느냐?”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
“성경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이 말입니다.
〈 사귐 〉
“~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
간혹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했다고, 모든 사람과 사귀겠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기독교인의 사귐’에 대하여 분명히 선포합니다.
예수 믿기를 거부하거든, 그들을 “~ 지목하여 사귀지 말라 ~”
사귀지 말고 거리를 두라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 믿었다 하여 세상의 모든 제도를 다 거역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것들에는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제도’가 ‘세상 풍조’로 변질 된 것은 거부해야 합니다.
황금만능, 성공제일, 출세지향, 이기주의 등은 변질된 ‘세상 풍조’입니다.
복음은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이를 거부하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을 제대로 하면서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지목하여 사귀지 않아야 합니다.
사귀지 않는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 기독교인은 자기 삶의 모습으로써, 안 믿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 사랑 〉
첫째 순종, 둘째 사귐에 이어서 세 번째 주제는 ‘사랑’입니다.
(15절)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사귀지는 말되, “~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쉬운 길은 아닙니다.
예수 믿기를 끝내 거부하는 자들과 사귀지는 말되, 사랑의 끈은 놓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귀지는 말되, 사랑은 하라!”
어렵게 생각하면 “어불성설”이지만, 한편 지혜를 짜내면 “은혜의 말씀”입니다.
☞ 바울 사도께서 왜 이렇게 어려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원인이 있지 않겠습니까?
섣불리 사랑한다고 다가갔다가 상처 받을까봐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뜨거워져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나갔다가 상처받고 주저앉은 이들 많습니다.
상처받고 주저앉게 되면, 다가갔던 이들과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되면 해서는 안 될 저주를 서슴지 않습니다.
“저것들은 지옥의 땔감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보다 내가 상처받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
첫째 순종, 둘째 사귐, 셋째, 사랑에 이어서 네 번째 ‘ㅅ’ 상처입니다.
상처에는 둘이 있습니다. 몸의 상처, 마음의 상처입니다.
몸의 상처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평생을 가기도 합니다.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 평생을 따라다닙니다.
이웃 간에 주고받은 마음의 상처, 참 아픕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다스리고 계십니까?
주변에 보면 마음의 상처를 잘 받는 유형이 있고, 여간해서 안 받는 유형이 있습니다.
저는 저 스스로 진단해 볼 때, 상처를 매우 잘 받는 ‘유리그릇’스타일이 아닌가…
하여간 가만있으면 좋을 것을, 괜히 다가가서 상처를 받고 돌아서면서 씩씩거립니다.
자기 스스로 진단하여 ‘나는 상처를 잘 받는다’ 생각되면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여야 할까?’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제가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는 중에 뜻밖에도 핑클 출신 이효리의 한 마디가 다가왔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JTBC 예능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 6회를 보면서였습니다.
거기서 이효리가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야기를 털어놓고자 하는데, 엄마는 싫어합니다. 안 들으려 합니다.
그때 이효리가 하는 말,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한테 상처를 절대 줄 수 없어!”
이효리 씨는 아버지를 사랑했기에, 아버지가 주는 상처를 피해갈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엄마, 그러니 제발 지금이라도 내 얘기를 들어줘요! 그래야 상처가 치유됩니다!”
듣기 싫어하는 엄마에게 하소연합니다.
저는 이 말은 이효리의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페북에도 올렸습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사랑하지도 않는 이들로부터 상처를 받으며 삽니다.
전화 상담자들, 민원을 담당하는 공무원들, 상대의 폭언에 상처를 받고 괴로워합니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효리 씨의 이 말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들이 폭언했다고 상처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 상처의 치유 〉
순종하고, 사귀고, 사랑하면서,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결해야 할 것은 입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입니다.
오늘 제가 ‘ㅅ’으로 시작하는 네 단어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거든 사귀지 말라!” “사랑은 하되 상처는 받지 말라!”
《 순종 – 사귐 – 사랑 - 상처 》 네 개의 ‘ㅅ’입니다.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법이 이 네 단어 중에 있습니다.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는 첫 번째 ‘ㅅ’인 ‘순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쓴 편지 즉,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편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 해법입니다.
순종하면 우리가 입은 상처가 치유됩니다.
예수님은 상처받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구원하십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며, 예배로 인도하십니다.
믿는 이들은 예배하면서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가 “예배의 감격을 아는 온고을 성도”입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몸의 상처, 마음의 상처, 영혼의 상처까지 치유받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순종에서 시작합니다.
《 순종 – 사귐 – 사랑 - 상처 》 상처에서 다시 순종으로 되돌아가 순환합니다.
복음에 순종하면서,
순종하지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사랑은 하되 상처는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중에는 상처를 받게 됩니다.
한 교회 안, 성도 간의 교제에도 상처는 없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처는 처음 ‘ㅅ’으로 되돌아가 순종함으로써 치유 받게 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