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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히 쓰는 그릇(딤후 2:20-22)
사도 바울은 본문 20절에서 하나님 나라를 큰 집에 비유하였습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그릇 뿐만 아니라 나무와 질그릇이 있어서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이는 것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집집마다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의 그릇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잘 진열된 화려하고 좋게 보이는 그릇이 있는 반면에 부엌에서 평소에 유용하게 사용하는 꼭 필요한 그릇도 있습니다. 본문의 큰 집은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도 여러 성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참 많은 달란트를 받았지만 진열장의 그릇처럼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그릇은 진짜 주인이 필요해서 사용하기 위한 그릇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릇의 재질과 관계없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귀히 쓰임받는 그릇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의 은사나 역할의 다양함을 여러 종류의 그릇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어떤 그릇인가 살펴보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있겠습니까?
1. 귀히 쓰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입니다(21절).
본문 21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본래 그릇은 음식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금그릇, 은그릇이라도 그 안이 더러우면 귀히 쓰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그릇, 질그릇이라도 그 안이 깨끗하면 귀히 쓰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마음이 깨끗한 것입니다. 재능이나 지식, 재산이나 명예와 같은 외적인 조건보다도 내면에 복음의 순수함을 간직한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깨끗했습니까? 아닙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더러워진 죄인이었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더러운 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듣고 예수님앞에 나아와 죄인됨을 고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그큰 사랑으로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죄에서 깨끗함을 받은 길을 여셨습니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선포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여기서 다 이루셨다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셨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깨끗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자백한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지적으로 죄에 대해 동의하는 것입니다. 2)감정적으로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3)의지적으로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순결한 것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정하고 악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함으로 깨끗함을 받는 것입니다.
학식이 많은 어떤 사람이 생의 의미를 찾아 나섰습니다. 수년 동안 수만 마일을 헤매다가 아주 경건한 수도사를 만나게 되었고 진리를 물었습니다. 수도사가 차를 대접하는데 차가 잔에 가득 찼는데도 수도사는 계속 따라 붓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지식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잔이 가득 찼습니다. 더 이상 부을 수 없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수도사는 '이 잔처럼 당신은 이미 선입견과 당신의 지식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 내가 어찌 당신을 가르칠 수 있겠소?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당신의 잔을 비우시구려.'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비울 때에 쓰임에 합당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삶이 깨끗한 것입니다. (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빛가운데 사는 것은 삶이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주님과 사귐을 가지면 우리의 삶의 깨끗해집니다. 경건하고 성결한 삶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맞춰 나가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의 빛입니다. 빛은 그 행실을 통해 증거되는 것입니다. 빛이 빛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면 어둠은 도망갈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 주변에 어둠이 가득합니까? 우리의 빛의 사명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빛이 세상을 비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성결한 사명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안에 계신 하나님, 그분이 마음껏 일하시려면 우리가 깨끗해야 합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좀 더 적극적으로 말씀드리면 내 겉사람이 깨어져야 합니다. 죄의 몸이 십자가에 함께 못박아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내가 믿음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나를 주님앞에 다 내려놓고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 2:20절에서 고백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면 깨끗함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되신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랍비가 설교할 때마다 "죽기 전에 회개하십시오. 죽기 직전이라도 회개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교인이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랍비여, 우리는 죽는 날을 알지 못합니다. 언제 회개해야 합니까?"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지금 당장 회개하십시오. 만일에 회개하지 못하고 죽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되니까요. 모든 일은 뒤로 미룰 수가 있지만 회개는 절대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죽기 전에 회개하십시오. 오늘 회개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왜 지체하십니까? 지금 당장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여 성결의 은혜를 입어야 하나님께 사용해 주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쓰임받기 원하신다면 회개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기회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물질 분야에도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크게 쓰임 받으려면 물질에도 철저하게 깨끗해야 합니다. 물질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신앙의 시금석은 바로 물질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귀히 쓰는 그릇'의 특징이 "거룩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정결한 제물'과 관계된 것으로 자신을 구별시켜 하나님께 순수하고 온전하게 바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산 제사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고 성결함을 지켜나감으로 하나님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2. 귀히 쓰는 그릇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입니다(21하).
본문 21절 하반절에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음식에는 그것을 담을 합당한 그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밥그릇에는 밥이 담기고 국그릇에는 국이 담기고 간장은 간장 그릇에 담겨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담은 그릇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깨끗해야 합니다.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는 일꾼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을 쓰십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은 어떤 그릇일까? 여러분, 어떤 그릇이겠습니까?
1)깨끗한 사람, 2)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교훈하셨습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이 어떤 의미입니까? 온유하다는 말은 철저하게 주인의 말에 복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생마가 철저히 훈련되어져서 주인의 말에 복종하고 따를 때 온유하다라는 말을 씁니다. 또한 겸손하다는 말을 성경적으로 풀이하면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를 넘어서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종의 자리로 내려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내게 유익한 것을 선택해서 행동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여기에 온유와 겸손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앞에 자기를 다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온유와 겸손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해답이 내게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는 스가랴의 말씀처럼(슥 4:6) 내게는 행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성령충만할 때 비로소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따라가는 삶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셨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지체없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너의 본토, 진척 아버지집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 지체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그의 첩인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집에서 떠나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은 자기 친아들입니다. 그리고 하갈은 자기의 첩입니다. 그런데 지체없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또한 그의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준비하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위해 길을 떠납니다. 어떻게 그럴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절대 신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서라하면 서고 돌아서라하면 돌아서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브라함은 우리의 믿음의 모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죽은 자라도 살리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고 그분의 뜻앞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과 온유입니다. 이런 은혜를 어떻게 우리가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와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멍에는 하나의 멍에로 두 마리의 소가 등에 메고 밭을 일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가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주님안에 거하며 주님이 주신 말씀을 잘 듣고 믿고 순종하면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하나되어 멍에를 메면 주님의 마음,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금이나 은그릇이든지 나무나 질그릇이든 먼저는 온유와 겸손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이렇게 귀히 쓰는 사람은 언제나 주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시시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인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앞에 서는 날 (마 25:21)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과 함께 오늘 하나님이 귀히 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귀히 쓰는 그릇은 준비된 그릇입니다.
본문 2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란 1)깨끗함입니다. 더러우면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2)주인의 쓰심에 합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주님이 쓰시기에 적합하도록 준비된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교회안에서도 일을 맡길 때 어떤 분은 머뭇거리고 거절합니다. 물론 사정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딤후 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물론 환경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면 머뭇거리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이 나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주인에게 흡족한 마음으로 쓰이는 그릇인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합당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군들 중에서도 모세나 다윗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도 있었고, 사울이나 요나처럼 불순종한 일군들도 있었습니다. (행 13: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시기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 일군으로 세우셔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앗수르의 침공을 받은 유대가 큰 어려움과 혼란 속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이사야는 늘 성전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하며 영적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 때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의 뜻을 위해 준비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그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자원했습니다. 이렇게 준비되었기에 주님이 그를 위대한 선지자로 쓰신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될 수 없으며, 또한 훈련되지 않은 성도도 주님의 제자로 복음 사역에 사용될 수 없습니다.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직분을 가졌다 할 지라도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준비되어지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의 '산 제사'란 소나 양, 염소 등을 죽여서 드리는 구약의 제사와 달리 지금 살아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드리는 삶의 제사를 의미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갈 5:16-23).
그러므로 귀히 쓰는 그릇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처럼 말씀과 기도로 성령충만하여 준비된 성도입니다. 그런 준비된 그릇과 같은 성도를 하나님이 찾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 언제든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써 주소서”라고 헌신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일이라면 언제든지 자원하는 마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할 각오를 가진 준비된 자를 말합니다.
저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 일화를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가 어느날 선교 집회에 참석해서 큰 은혜를 받았는데, 아프리카인을 위한 선교와 의료사업을 위해 헌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헌금을 담는 그릇은 우리의 주머니 모양과는 달리 조금 작기는 하지만 보통은 마치 우리가 사용하는 세수대야처럼 생긴 것이어서 헌금을 넣으면 다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와같은 헌금 그릇이 쭉 돌아가면서 헌금을 담게 됩니다. 그러는 중 한 소년 앞에 이르자 이 소년이 대뜸 그 그릇위에 올라앉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슨 짓이냐며 놀라서 묻자 그 소년의 대답인즉 “저는 돈이 없으니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아이가 훗날 위대한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생을 하나님앞에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주저함없이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그릇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스시기에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라기는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귀히 쓰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도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깨뜻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달려 돌아가셧습니다. 그 은혜를 오늘도 우리가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다 내려놓으시고 죄사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뿐 만 아니라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어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이 쓰시기에 준비된 그릇입니다. 특별히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됨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귀히 쓰는 그릇은 선한 일을 행하며 모든 이에게 유익을 끼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릇이 된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무지개목장 목원들과 우리 모두는 쓰임받는 그릇, 깨끗한 그릇, 합당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손에 귀히 쓰임 받고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귀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