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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등산로를 따라 산행하는것이 아니라
길 없는 길을 뚫어 다니는 심마니의 산야초 산행과 같습니다.
넓고 험한 산의 8부 능선을 다니며 천종을 찾아다니는 열정은
산의 길을 개척하는 귀납법적 인생입니다.
대부분 카페의 글은 기고와 같은 정제되고 준비된 글이 아니라
대화를 하는 것과 같은 즉흥적이며 직관적인 묵상의 글입니다.
글을 쓰는 논리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묵상을 대화하듯 글로 쓰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카페의 엄청난 글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즉석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생각입니다.
표절 천국이라는 우리 나라는
논문이든 설교든 수채가 된 낙동강과 같습니다.
논문 표절 킬러인 미디어워치 변희재 대표의 분석에 따르면
각주까지도 표절하는 실태여서 창의적 지성은 학자의 조건에서 아주 멀어졌습니다.
지성의 도둑이 판치는 우리 나라는
창의적 학문의 지력이 떨어지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창의성이 없는 학문이 법학인 것을 보면
법학 출신의 직업은 거짓과 불의를 법치와 동일시하는 개쓰레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불법의 법치를 가진 썩은 검찰과 특검과 헌재의 정유팔적에 대한 분노는
거짓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 대한 성경의 모든 저주가 임할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거짓과 불의와 법치가 동일한 나라는
반드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요즘 자연밥상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는데
자연밥상의 대가들에 대한 추적과 탐색은 언젠가 완전한 자연밥상을 만들어내는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자취를 하면서 밥을 짓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건강한 밥상을 자원하여 차려 먹습니다.
요즘은 쌀과 찹쌀과 기장과 팥을 넣어 밥을 짓는데
팥은 물에 불려서 사용하고 물에 불린 팥물은 독성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건강을 위한 자연 밥상에 관한 끝없는 관심은
언젠가 산야초 밥상으로 보신을 할 것입니다.
건강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운동과 자연밥상과 규칙적인 생활 등 귀납법적 삶의 가치입니다.
야곱의 인생, 그 귀납법적 네러티브라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
먼저 카페의 글과 밥상과 운동 등 귀납법적인 삶의 가치를 어필하였습니다.
창세기의 동선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서술입니다.
천지창조와 에덴 동산과 노아 홍수와 아브라함의 이야기 등
창세기의 저자는 하나님의 시선과 동일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기술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과정은
그 말씀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순종의 길이 하나님의 뜻대로 열려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나안 여정은
그 믿음과 순종의 길을 따라 온전히 행하는 모습을 창세기 저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하였습니다.
이삭도 믿음의 순종이라는 그 열린 길을 갔지만
야곱의 인생은 도망자로 시작해서 그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길이 전혀 제시되지 않고
야곱의 인생길에는 백도화지가 그 앞에 놓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긴 여정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였지만
야곱의 인생은 그 가나안을 떠나 밧단아람이라는 약속의 땅이 아닌 곳에서 정처없는 나그네 삶을 살면서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을 다양하게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눈물의 인생으로 담았습니다.
야곱의 인생, 그 삶의 현장에 놓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제시된 것이 아니라
빈 의자에 하나님의 뜻을 채우는 귀납법적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나 이삭보다 야곱의 인생은
갈등의 현장이 있는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역동적 삶으로 엮어졌습니다.
도망자의 길에서 노숙을 하면서 꿈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방식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0-15)
야곱은 도망자의 길에서 하나님의 꿈을 꾸었고
하나님은 야곱의 꿈에서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하여 야곱에게 자신을 계시하였고
훗날 야곱의 아들 요셉도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며
하나님을 알기 시작하였습니다.
야곱은 그 자신과 함꼐 계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끝없는 도망자의 삶에서 어제와 오늘과 내일로 이어지는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을 귀납적으로 엮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 서원하는 신앙으로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찾아 볼 수 없는
오늘의 하나님을 내일의 하나님으로 만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신앙의 세계관을 가졌습니다.
야곱의 인생, 그 귀납법적 네러티브는
새로운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환경에 적응하고 삶을 엮어가면서 하나님의 계시 신앙을 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삶에는 창세기 저자의 전지작 작기 시점의 서술뿐이지만
야곱의 네러티브는 대화를 도입하여 빈 의자의 삶을 채우며 복잡한 삶의 동선을 그렸습니다.
야곱은 아내를 얻는 일에도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순탄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전쟁의 드라마요, 사랑의 눈높이와 그 사랑을 얻기 위한 수고의 댓가를 지불하였습니다.
부를 축적하는 것도
아브라함은 가뭄을 피해 애굽에 내려 갔다고 거부가 되었으며
이삭은 그 해 농사를 지었는데 100배의 결실이라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종이나 머슴처럼 일하면서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였습니다.
그나마 노동의 댓가를 보장받지 못하고
외삼촌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을 모함하였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고 하였습니다.(창31:1-12)
이로 인해 야곱의 시름은 감찰하신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의 체험 신앙이 되었고 야곱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원천의 힘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 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창31:4-5)
험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는 야곱의 말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굴레였습니다.
야곱은 장인과 처남들과의 재산 문제로 인한 갈등을 풀어가며
한편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 레아와 라헬을 설득시켜 함꼐 동망하는 일에 동의를 얻었습니다.
☞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고 하였습니다.(창31:6-16)
이렇게 하여 레아와 라헬과 야곱의 자식들은
외삼 라반의 집을 탈출하여 도망하였던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외삼촌에게 붙잡혀서 야곱이 하는 말은
도망 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창31:38-42)
야곱의 인생은 삶의 장벽을 만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삶의 양식은
하나님의 계시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귀납법적 네레티브로 전개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떠난 야곱의 정처없는 나그네 삶은 귀납법적 네레티브의 장르로 전개되어
야곱의 인생은 요셉의 삶과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투영되었습니다.
도망하는 라헬의 안장에 숨긴 드라빔은 야곱의 여정과 출애굽 및 이스라엘 역사에 드리워진.....
"우상과 다른 신"으로 인한 고난의 역정이라는 프레임으로 투영되었습니다.
가시와 올무가 된 라헬의 드라빔은
라헬의 통곡이라는 예레미야의 신탁과 마태의 영감적 통찰로 메시야 탄생의 베들레헴 어머니의 통곡으로
전체 성서지대의 귀납법적 네레티브 전개의 거치는 돌과 반석이 되었습니다.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15-16)
☞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2:16-18)
결국 라헬의 드라빔으로 세겜의 할례를 빙자한 살인극과 베냐민을 낳으면서 죽은 라헬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고
그로 인해 어머니를 잃은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 받아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라헬 사랑이 낳은 귀납법적 삶의 네러티브요,
역사적으로 전개된 야곱의 이스라엘은 광야의 금송아지 형상과 가나안 땅의 우상과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인하여 멸망의 심판을 받는 라헬의 통곡이라는 예레미야의 신탁이 되었고
이것을 마태는 메시야 탄생의 수난으로 적용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메시야의 탄생은 단순한 죄인을 구원하는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뿌리 깊은 역사의 내력을 가졌습니다.
오늘날 구약 성경에 대한 구원의 역사적 뿌리를 알지 못하고
죄인의 죄를 용서하는 십자가를 지신 나사렛 예수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는
성전이 도둑의 소굴이 되었듯이 결과적으로 교회는 예수 팔이를 하는 사이비와 이단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인생, 그 귀납법적 네러티브는 본질적인 계시 신앙의 배경이 된 성서지대의 가시와 올무라는
시온의 거치는 돌과 반석을 제거하는 메사야의 신탁과 그 약속을 성취하는 네거티브가 되었습니다.
메시야 앞에 놓인 뿌리깊은 네거티브는
귀납법적 네러티브로 구원의 완성이라는 시온의 통치와 그 대로를 완성하였습니다.
참으로 야곱의 인생, 그 귀납법적 네러티브는
하나님께서 계시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계시 신앙으로 말미암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고 지금도 함께 계시고 장차 함께 계시리라는
완전한 신앙으로 성숙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