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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14) 「고도를 기다리며」 : 내용 없는 기다림의 공허함
현존하는 하느님이 계신데도, 우리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는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인류는 전례 없는 고통과 고립을 겪으면서 “신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질문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끔찍한 파괴를 가져온 전쟁과 자연재해 앞에서 항상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가?”
18세기, 30년 전쟁을 겪은 유럽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추구하는 이신론(Deism)이 대두되었다. 신이 세상을 창조는 하였으나, 그 이후로 인간과 자연법칙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보는 종교관이다. 정교한 시계공으로서의 신은 우주라는 완벽한 시계를 만든 후, 태엽을 감은 뒤 더 이상 시계의 작동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신론은 종교의 중요한 특징인 신비성을 지워버림으로써 인간 보편의 이성에 호소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유물론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조차도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신의 꼬리를 물어버린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계몽주의가 덮어버린 신화와 신비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0세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무엘 베케트는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신의 부재와 침묵의 중요성을 그려내고 있다. 비록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과 응답을 주지 않는 차가운 세계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신의 부재와 침묵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현존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 암시한다.
2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1막과 2막은 상황 설정과 대화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있는 길가, 두 남자 주인공인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전날 그랬던 것과 같이 비슷한 시간에 다시 만나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며 무의미하고 지루한 대화를 이어간다. 막이 내릴 때쯤에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의 소식을 전한다.
극에서 고도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단순한 물리적 부재가 아니라, 도착이 끊임없이 연기된다. 그는 언제나 곧 도착할 것만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각 막에서 소년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약속을 전한다. 두 주인공이 내일을 기약하며, 다시 막은 내린다.
비록 고도는 등장하지 않지만 언어를 통해 현존한다. 그는 고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의 도착에 대해서 논의되고, 기다림의 대상이며, 소년을 통해 그의 약속이 전달된다. 그의 부재는 언어 전반에 배어든다. 대화 대부분은 결국 고도로 귀결된다. 그는 누구이며 언제 올 것인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였는가?
고도의 부재는 언어적 현존을 통하여 의미를 형성하며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디디와 고고의 기다림은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적인 행위만 되풀이한다. “만일 안 온다면?” / “내일 다시 와야지.” / “그리고 또 모레도.” / “그래야겠지.” / “그 뒤에도 쭉.” 고도의 부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부재 ‘ 때문에’ 그들은 행동한다.
디디와 고고는 기다림을 중심으로 삶을 형성하고 이어간다. 만약 그가 나타난다면 그들의 기다리는 행위는 끝날 것이고, 연극도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작가는 고도의 도착하지 않음을, 즉 그의 부재를 의미 생성의 중심 동력으로 전환한다. 욕망은 소유가 아니라 반복되는 도착하지 않음에 의해서 지속되기 때문에, 고도의 부재는 욕망 그 자체의 구조를 형성한다. 그래서 그의 부재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닻이 되고, 기다림은 그들의 존재 양식이 된다.
동시에 고도의 부재는 그냥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조건이 된다. 기다림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진다. 디디와 고고는 그의 부재에 대한 언어들을 함께 공유하고,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확인한다. 고고는 디디에게 “내 곁을 떠나지 말아”라고 부탁한다.
디디는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라고 말한다. 고도의 정체성, 도착 여부, 이 모든 것들이 혼란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공동체적 확실성을 확인한다. 부재에 대한 공통의 언어는 공동체의 핵심 요소이다.
고도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절대자 혹은 신으로 해석되지만, 작가 자신도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규정하지 않는다. 열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두 주인공의 기다리는 행위는 그리스도교 신앙 행위와 그 맥을 같이한다.
일상 안에서 절대자 하느님은 육체적으로 현존하지 않으신다. 개인의 고통 앞에서, 사회적으로 끔찍한 사건 앞에서 하느님은 종종 침묵하신다. 그러나 부재와 침묵의 하느님은 말씀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그 말씀은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다. 동시에 그 말씀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지속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부재의 언어와 드라마에서 부재의 언어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미 하느님과의 계약과 육화 신비를 통하여, 기다림이 의미가 있음을 보증하는 서사가 있다. 하지만 극에서 드러나는 부재의 언어에서는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는 소식만 반복될 뿐 기다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기다리는 신앙적 행위만 있다.
내용이 없는 기다림은 부재 언어의 취약성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고도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나는데, 그에 관한 말들은 일관성이 없다. 소년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계속 바뀐다. 언어로 표현되는 고도의 정체성도 명확하지 않다. 두 주인공의 기억은 신뢰할 수 없다. 언어를 신뢰할 수 없기에, 그의 현존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고도는 언어를 통해서 현존하지만, 동시에 그 언어는 현실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또한 그의 부재는 독특한 시간의 역동성을 형성한다. 그의 도착은 계속해서 연기되기 때문에, 진전 없이 반복만 있을 뿐이다. 도착 없는 기다림은 서사를 정지 상태로 가두어 버린다. 두 인물은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을 경험한다. 항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기다림과, 같은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다.
두 주인공은 바로 성토요일의 경험 안에서 맴돌고 있다. 성토요일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경험이다.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절규, 즉 하느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며 세상이 멈춘 성토요일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성토요일은 일시적이며, 결국 부활로 나아간다. 그러나 고고와 디디는 부활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죽음과 부활 사이의 부재와 침묵의 상태를 끝없이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작가는 이 극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혹은 기다려야만 하는 인간의 실존에 관한 통찰력을 예리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하지만, 결코 죽지 못하는 고고와 디디의 모습은, 절대자의 부재와 침묵 앞에서 인간의 삶이란 곧 기다림이라는 인간 조건을 강조한다.
문제는 기다림의 대상이다. 육화 신비가 일어난 지 2000년이 지난 오늘날, 합리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과학 문명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조차도 육화 신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고고와 디디처럼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미 부활이 왔음에도, 여전히 성토요일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가정 안에서의 환대] 부부 관계 – 공감 부재의 결말
날씨가 부쩍 더워지고 있다. 올여름은 폭염이 될 거라 한다. 더위를 잠시 잊을 겸, 몹시 추운 이야기를 하나 꺼내볼까 한다.
모파상의 단편소설 「첫눈」에는 한 부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혹한 속에서 자란 남편과, 언제나 따뜻하게 겨울을 나는 것이 몸에 밴 아내가 신혼살림을 차린다. 뜨거운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맞추려 애쓰며 새로운 계절들을 함께 통과해 나간다. 봄과 여름은 무사히 지났다. 그러나 아내에게 겨울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내는 난로를 놓아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지만,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도 집 안에 난로를 들이지 않는 남편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혹한 속에서 단련된 남편에게는 이 정도 추위는 별것이 아니었고, 아내도 지내다 보면 자연히 적응하게 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아내의 귀에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당신의 고통은 별것 아니다.” 공감받지 못한다는 서운함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원망으로 굳어갔다.
그러던 어느 추운 밤, 아내는 결심했다. 말로 납득시킬 수 없다면, 몸으로 증명하겠다고. 그녀는 한겨울 밤 맨발로 집을 나서서 눈 덮인 정원을 걸었다. 차가운 눈을 맨살에 문지르며 스스로 감기에 걸리려 애썼다. 결국 감기는 폐렴으로 번졌고, 아내는 따뜻한 남쪽으로 요양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돌아온 집에는 여전히 난로가 없었다. 남편은 변하지 않았다. 아내 역시 멈추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그 힘겨루기를 이어갔다.
결국 남편은 마지못해 난로를 들였고, 아내는 내심 승리의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내의 폐렴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져, 그녀는 다시 휴양지로 떠나야 했다. 그때 남편이 편지를 보냈다. 추운 겨울이지만 자신은 난로 없이도 잘 지내고 있다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옳다는 것에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아내는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녀의 얼굴에는 희미한 행복의 미소가 번졌다.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옳았고 남편이 틀렸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닐까.
부부상담을 하다 보면 이와 닮은 장면들을 자주 마주친다. 결혼은 매일 서로의 다름을 마주치는 일이다. 출신도, 성장 환경도, 몸이 기억하는 감각도 다른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낯섦과의 동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다름’은 ‘다름’으로 머물지 않는다. ‘당신이 틀렸고, 내가 옳다’는 논리로 굳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때로 놀랍도록 파괴적인 방식을 택한다.
소설 속 아내는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남편의 잘못을 입증하려 했다. 남편 역시 아내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신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끝까지 고집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상대방을 납득시키려 했다. 공감 대신 증명을, 대화 대신 버팀을 선택했다.
슬픈 결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오래된 소설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 더 슬프다.
[프란치스코의 향기] (9) 카푸친, 지울 수 없는 프란치스칸 개혁의 영성
개혁은 하느님 뜻을 묻는 데서 시작됐다
1526년 어느 겨울, ‘마태오’라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서둘러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추위로 몸을 떨고 있던 한 거지와 마주쳤다. 그는 자기 외투를 그 거지에게 벗어 주면서 한편으로 거지와 달리 좋은 건물에서 걱정 없이 살고 있는 자신이 과연 아시시의 가난한 자, 성 프란치스코를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 되묻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마태오 형제뿐만 아니라 작은형제회의 역사 전반에 꾸준히 등장해 왔던 주제였다. 형제들의 폭발적인 증가로 지어진 큰 수도원 건물들, 특히 이런 형제회의 눈부신 성공은 형제들을 초기 이상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교회 쇄신의 주역들인 형제들은 점차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고, 교회가 요구하는 사목자를 양성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상을 현실에 적용하는 고민은 오늘날 교회가 그러하듯 프란치스칸들에게 쉽게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타협하며 살기에는 성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복음의 빛이 너무도 강렬했다. 카를로 카를레이 감독의 영화 ‘Padre Pio’에서 비오 성인은 말한다. “성 프란치스코의 가장 큰 기적은 700년이 지난 지금도 젊은이들을 수도회로 부른다는 거요.” 완전한 가난을 단순하게 실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 매료되어 일생을 건 이들에게 초기 이상을 향한 열망은 자신들의 꿈과 정체성에 지울 수 없는 유전자와도 같은 것이었다.
고민의 답을 얻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던 마태오 형제는 어느 날 꿈에 길고 뾰족한 후드 모자가 달린 수도복을 입은 성 프란치스코를 보았다. 그는 즉시 프란치스코를 닮으려는 열망을 표현하고자 자신의 수도복 모자를 그와 같이 고쳐 달았고, 이런 마태오 형제를 따라 하는 형제들이 급격히 늘면서 개혁의 불길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카푸친’이란 이름 역시 개혁의 상징이자 카푸친 수도복의 특징인 ‘모자’를 뜻하는 말 ‘카푸치오(cappuccio)’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지만 개혁의 여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작은형제회는 이미 한 차례 개혁 운동으로 꼰벤뚜알과 분리되는 갈등을 겪었다. 어떤 형제들은 가난에 대한 열의가 지나쳐 교회에 불순종했던 ‘발도파’ 이단과 같은 길을 걸었다. 개혁은 충분히 이루어졌으니, 이제는 순종 아래 형제회가 일치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이런 와중에 수도복을 고쳐 입는 형제들은 외적인 모습에 치중한 바리사이파들이나 또 다른 반동분자들로 여겨지고 있었다.
개혁과 일치, 양쪽 주장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형제들은 어디를 향할 것인가? 이처럼 공동체와 신앙인의 삶에서도 수많은 갈림길을 만난다. 사실 어느 쪽도 틀린 말은 없다. 문제는 그 속에서 본질을 식별하는 일이고, 이것이 개혁의 참된 의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합리적이지 않고, 처음의 순수한 열정이 자칫 상대를 잘못됐다고 비난만 하며 갈등과 상처로 끝날 때도 많다.
카푸친 형제들은 외부의 비난과 위협 속에서도 기도 안에서 평화를 잃지 않고 인내롭게 하느님의 뜻을 찾아갔다. 개혁은 잘못을 바로잡는 합리적 의사 결정이나 자기 열정을 관철하는 일이기 전에 우리를 바른길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귀 기울이는 데서 시작된다. 그렇게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본래 정신을 형제들 마음 안에 새롭게 일으키셨고, 마침내 1538년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칙서 「Religionis Zelus」를 통해 카푸친을 독립된 수도회로 공식 인준하였다. 그러나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였다.
[교부들의 삶과 신앙] “그리스도를 참된 스승으로 고백한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지난달에는 사도들에게서 이어져 내려온 믿음, 곧 교회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전승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자 노력했던 교부 히폴리투스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이번 달에는 그리스도를 참된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가고자 했던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클레멘스는 대략 150년경 태어나 215년경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고대 세계의 대표적인 학문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유대교 전통, 그리스 철학, 동방의 여러 종교와 사상, 로마 제국의 문화가 서로 만나고 충돌했습니다. 그러한 도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단순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믿음의 차원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그 믿음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복음은 세상의 지혜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이러한 물음 앞에서 신앙을 깊이 사유했던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입니다.
클레멘스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결코 무지의 자리가 아니라, 인간을 참된 지혜와 성숙으로 이끄는 길임을 보여 주고자 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 가운데 하나가 『교육자』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교육자’로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아닙니다. 클레멘스에게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만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육자』 첫머리에서 참으로 중요한 말을 남깁니다.
“그 목적은 영혼을 더 지혜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만드는 것이며, 학식 있는 삶이 아니라 절도 있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교육자』 제1권 1장 1,4.
이 한 문장은 클레멘스의 신앙 이해를 잘 보여 줍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지식을 쌓는 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 습관과 삶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먼저, 하느님 앞에서 더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교적 배움의 목적입니다. 클레멘스는 이성과 학문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철학과 배움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은 그 자체로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지식은 그리스도께 인도될 때 지혜가 되고, 지혜는 사랑과 선한 삶으로 열매 맺을 때 참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클레멘스에게 신앙의 배움은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회심의 과정이며, 삶 전체가 그리스도께 교육받는 여정입니다.
이 점은 몸이 아픈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영혼의 병을 앓는 인간에게는 참된 교육자가 필요하다는 그의 표현 안에서 더욱 잘 드러납니다. 클레멘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욕망을 고쳐 주시고,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아 주시며, 죄로 기울어진 삶을 다시 하느님께 향하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영혼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교육자』 제1권 1장 3,3; 2장 6,1-2 참조) 그래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단순한 훈계가 아니라 치유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교육자』에서 제시되는 그리스도의 얼굴은 엄격한 스승이면서 동시에 자비로운 의사로 드러납니다. 그분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우리를 깨우치시고, 약해질 때 붙드시며, 넘어질 때 다시 일으키십니다. 클레멘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이유는 우리를 억누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참으로 자유롭고 선한 인간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알고 싶은 것을 언제든 검색할 수 있고, 수많은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더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에게 더 절실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에게 배우고 있는가?”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우리에게 신앙의 배움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일깨워 줍니다. 그 배움의 목적은 단순히 더 많이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있습니다. 지식은 많지만 지혜가 부족한 시대, 말은 많지만 삶의 변화가 부족한 시대에 클레멘스는 우리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배우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더 선하게 하시는 참된 교육자이십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평생 계속되는 배움의 여정입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배우고, 기도 안에서 배우며,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배우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삶 안에서 배웁니다. 그 배움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스승이시며,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이시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참된 교육자이십니다.
[함께 읽는 시노드 최종문서] (14) 사명을 위하여 함께: 제2부(75~78항)
평신도·수도자의 참여 확대와 공동 책임
시노드 교회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핵심 조건으로서 ‘관계들의 회심’ 필요성과 구체적인 방향을 다루고 있는 「최종문서」 제2부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제2부에서 관계들의 회심은 현재까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져 왔다.
첫 번째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 곧 남녀, 세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관계의 쇄신이다.(50~56항)
두 번째는 은사, 성소, 직무들 사이의 관계로서 다양한 은사들이 어떻게 사명을 위해 함께 움직이는지 다루고 있다.(57~67항)
세 번째는 성품 직무자들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로서 성품 직무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조화에 봉사하는 직무라는 점이 강조된다.(68~74항) 이제
네 번째 부분은 관계들의 회심이 단지 태도와 마음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교회의 궁극적 목표인 선교 사명을 위해 평신도와 수도자가 성품 직무자들과 어떻게 함께 나아갈 수 있는지 말하고 있다.
먼저, 교회 역사 속에서 성품 직무와 구별돼 탄생한 몇몇 직무들의 가치를 상기시킨다.(75항) 이 직무들은 성령께서 주신 은사들이 공동체와 그 책임자들에게 공적으로 인정받고 사명에 봉사하도록 안정화될 때 생겨난다. 곧, 교회 안에서 어떤 특정한 은사들은 직무가 된다. 곧 독서직, 시종직, 교리 교사직과 같은 제정 직무는 준성사를 통해 수여되고 이것은 단순한 임무 부여를 넘어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제정 직무와 달리 일정한 예식 없이 권위 있는 이의 위임으로 수행되는 고정적인 직무들도 있다. 그 예로 작은 교회 공동체를 조정하는 직무, 공동체 기도를 인도하는 직무, 자선 활동을 조직하는 직무, 비정규 성체 분배자 등이 제시된다. 이것은 규정 예식이 없더라도 공동체 앞에서 이뤄지는 위임을 통해 공적으로 임무를 맡길 때 그 직무 수행이 더 효과적이 될 것임을 권고한다. 「최종문서」는 이런 평신도 위임 직무들을 지역의 필요에 따라 더욱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76항)
이 밖에 상호 협력과 분화된 공동 책임의 정신에 따라 평신도와 수도자들에게 더 많은 참여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크게 5가지 사항이 제기된다.(77항) 교회의 식별과 의사 결정 과정에 평신도들의 더욱 광범위한 참여 촉구는 제3부 ‘과정들의 회심’ 앞에 배치돼 선도하고 있다. 이어서 교회 안에서 더 책임 있는 직책에 평신도 임명, 수도자들의 삶과 은사를 인정하고 지지하며 교회의 책임 있는 직책에 임명, 교회법 절차에서 판사 역할에 더 많은 평신도들의 참여, 교회 기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존엄성과 권리 존중 등이 제시된다.
마지막으로는 ‘경청과 동반의 직무’를 신설하는 방안에 대해 시노드 총회에서 있었던 논의를 소개하며 각 지역 교회에서 더 적절한 방안을 모색할 것을 제안함으로써 열린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78항) 이것은 시노달리타스 문화가 교회 안에 정착되려면 경청이 바로 그 첫걸음이고, 이어지는 ‘과정들의 회심’ 역시 경청에서 시작됨을 말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