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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읽는 단편 교리]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오늘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1914년 제정된 이날은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 대한 교회공동체의 지지와 관심을 드러냅니다. 한국 천주교회 역시 전 세계 가톨릭교회와 더불어 9월 마지막 주일을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로 정해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궁핍, 종교 박해와 기후 위기 등 여러 이유로 고국을 떠나는 이주민들과 난민들을 기억합니다.
2023년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주제였던 <이주할지 또는 머무를지 선택할 자유>가 이주민들이 고국에 머물 수 있는 권리에 주목했다면, 올해의 주제인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함께 걸어가십니다>는 ‘이주하는 이들의 여정에 함께하는 분이 누구이신지’ ‘하느님께서 어떻게 교회와 동행하시는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에덴동산을 떠나야 했던 아담부터 새로운 소명을 위해 고향과 친지를 떠난 아브라함,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에 하느님께서 보호자로 동행해 주셨음을 강조합니다. 성경 속 하느님의 백성이 체험한 역사는 오늘날 이주민의 삶과 맞닿아있으며, 지상 나그네로 살아가는 ‘교회의 순례자적 차원’을 묵상하게 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37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한국전쟁 때의 피난민 숫자를 넘어서는 수치입니다. UN 난민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현대사회의 이주민을 3억 명으로 추산합니다. 그중 1억 2천만 명이 난민인데, 전 세계 80명 중 한 사람이 난민인 셈입니다. 폭력과 박해, 기후 위기와 빈곤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난민들에게 더 비참한 사실은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하고 인간의 기본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지난 2018년 제주에 유입된 예멘 난민들을 향한 냉담한 여론에서도 볼 수 있듯, 문화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선주민과의 갈등,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그들을 ‘세금을 축내는 존재’로, 특정 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여기게 하였습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으니, 이방인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탈출 23,9) 이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건네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한때 종의 신분, 이방인으로 겪었던 서러움과 아픔을 기억하며 새롭게 만나는 이방인의 처지에 공감하고 따뜻하게 맞아줄 것을 강조하십니다. 우리 한국인 역시 한두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났던 피난민 처지였음을 기억합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동파견 노동자, 실향민, 전쟁고아, 피란민 등 우리 세대에 익숙하게 남아있는 이 말들은 이주노동자와 난민을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그들이 타향에서 마주했던 추위와 배고픔, 온갖 차별과 무시당함은, 오늘날 우리 곁에 살아가는 이주민과 난민들을 어떻게 환대해야 할지 가르쳐 줍니다. 이주민과 난민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학]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추기경 김수환 스테파노’ 세 단어 모두 의미 깊습니다. ‘추기경’은 가톨릭교회의 중요 책임자를 의미하고, ‘김수환’이란 이름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한국 사회에도 중요합니다. ‘스테파노’ 성인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예수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초기 교회 공동체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리기 위해 증언과 선교를 했고, 이에 반대하던 유다인들과 충돌합니다. 초기 교회 일곱 봉사자 중 하나로 추정되는 스테파노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였고, 큰 이적과 표징을 일으켰습니다.(사도 6,8 참조) 천사의 얼굴을 하였던 스테파노는 최고 의회 연설로 유다인들과 논쟁을 벌였고, 결국 신성 모독으로 고발당한 후 성 밖으로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고, 제자들은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리스도교 첫 순교자의 죽음에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찬동하였고, 그는 교회를 없애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와 여자를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습니다.(사도 8,1-3 참조) 사울은 어린 시절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유다교 교육을 받았고,(사도 22,3 참조)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 율법을 중시하고 종교적으로 충실한 골수 바리사이였습니다.(필리 3,5 참조)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믿음이나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가르침은 그에게 가당치 않은 주장이었기에, 박해의 선봉에 나섰습니다. 박해자 사울은 더 큰 박해를 위해 떠나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극적인 회심을 합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 9,5) 사흘 동안 보지 못했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후 사울은 사도들과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을 선포합니다. 이후 1차 선교여행 때부터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사도 13,9 참조) 사도 바오로라는 이름은 후대에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학자, 이방인들의 사도, 열정적인 선교자, 불굴의 증거자로 기억됩니다.
김수환 추기경, 첫 순교자 스테파노, 사도 바오로. 이 세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 사람은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보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생각과 마음은 결코 인간에 대한 하느님 마음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하느님 뜻이 언제나 먼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우리에게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 겟세마니에서도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non mea, sed Tua)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이 위대한 이유는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이 가난했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따를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리 1,21 공동번역)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독서와 복음 – 평일
지난주에는 주일에 봉독되는 독서와 복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주는 ‘평일’에 봉독되는 독서와 복음에 대해 살펴봅니다. 우선, 평일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일반적으로 주일과 (대)축일에 들어가지 않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따라서 주일과 축일의 독서와 복음을 보완하는 성격을 지닙니다.
평일 미사에서는 1개의 독서와 1개의 복음이 읽힙니다. 독서는 구약성경과 사도들의 저서 및 묵시록 중에 선택됩니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부활 시기에는 주일처럼 사도행전이 봉독됩니다. 연중 시기의 평일 독서는 2년 주기, 홀수해와 짝수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대림, 성탄, 사순, 부활 시기의 평일 독서는 시기의 중요한 특성에 따라 1년 주기로 매해 반복됩니다.
평일 미사의 복음 역시 1년 주기로 매해 반복됩니다. 연중 시기의 평일 미사 복음을 보면, 연중 제1~9주간에는 마르코복음, 제10~21주간은 마태오복음, 제22~34주간은 루카복음이 봉독됩니다. 평일이라도 고유한 특성이 있는 대림, 성탄, 사순, 부활 시기에는 그 시기에 맞는 복음이 선택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독서와 복음의 봉독은 항상 “주님의 말씀입니다.”라는 말로 끝납니다. 이는 ‘지금까지 들은 독서와 복음은 바로 주님께서 바로 이 자리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이미 예전 과거에 하셨던 말씀이 아니라, 지금 성경을 경청하는 이에게 생생히 들려주시는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미사 경본 총지침」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이 봉독될 때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말씀 안에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신다”(29항; 전례헌장 7.33항 참조).
한편, 전체 신자가 독서나 복음을 함께 소리내어 봉독하는 공동 독서는 전례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자 교육을 위해 효과적일 수 있겠으나, 전례 정신에는 맞지 않습니다. 말씀 전례는 공동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에 화답하는 전례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례의 성격을 무시하고 모두가 함께 봉독한다면, 듣는 사람은 없고 말하는 사람만 있는 독백 형식의 전례가 되어 버립니다.
또한 미사 중에 봉독하는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 말씀인 ‘성경’ 본문이어야 합니다. 성경 이외의 어떠한 책과 글도 성경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성인의 저서이든 공의회 문헌이든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인 독서와 복음을 성경 이외의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건 불가합니다.
[가톨릭 신학]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기억’은 인간의 삶에서 꼭 필요한 인지 과정입니다. 기억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행동을 선택하거나, 미래지향적인 행동을 계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억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심리학에서는 우리의 기억이 정보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여 선택적으로 저장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유익한 것들을 우선적으로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관계를 명확하게 정립하기는 쉽지 않지만) 보상이 주어지는 결과에 따라 과거를 기억해 내는 패턴이 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고도 합니다.
오늘 ‘기억’이라는 주제를 꺼낸 이유는,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고자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세례자 요한이 태어난 후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바로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구약의 구원 역사를 요약하는 앞부분(68-75절)과 예수님의 오심으로 완성될 신약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뒷부분(76-79절)입니다. 구약의 구원 역사에 관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 한평생 당신 앞에서 …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자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해주시고, 그들이 당신의 백성으로서 당신을 섬기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자비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 모세와 맺으신 계약, 이스라엘을 영원히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계약(창세 17,2; 탈출 19,5 참조)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구원의 약속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아 구원되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지요.
우리를 향한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해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기억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나의 삶에 유익한 분 혹은 어떤 보상과 연관된 분으로만 하느님을 기억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떠한 필요에 의해서 선택적으로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죄의 용서를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이심을 기억하고 그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18) 성모님에 관한 4대 믿을 교리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나자렛 산골 소녀 마리아
성모 마리아는 우리와 다른 일상생활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마리아도 우리와 같은 일상생활을 했습니다. 다른 것은 불편한 일·이해하지 못한 일·속상한 일이 있을 때 바로 표현하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기도하시면서 주님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묵상하셨다는 점입니다.
성모님은 깊은 신앙으로 거룩한 동정성을 평생 간직할 수 있었고, 제자들과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으며 영광스럽게 승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에 관한 4대 믿을 교리
1.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하느님의 총애를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놀랍게도 원죄 없이 잉태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위해 마리아의 영혼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할 수 있도록 가꿔진 순결하고도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였습니다.
1845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교리 앞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고, 1858년 성모님께서는 프랑스 루르드에 직접 발현하셔서 원죄 없이 잉태된 교리를 직접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차례 베르나데트 성녀에게 발현하시면서 마지막에 “사랑하는 내 딸 베르나데트야,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평생 동정
성모님은 성령의 힘에 의해 동정의 몸으로 아들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을 출산하신 이후에도 평생 동정의 몸으로 사셨습니다. ‘동정’은 한 인간으로 자신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온전히 하느님께만 봉헌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신교는 성경에 나온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요셉·시몬·유다가 아닌가?”(마태 13,55-56 참조)를 언급하며 ‘예수님에게 형제자매가 있는데 평생 동정일 수 있느냐?’고 부정합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 문화 안에서 형제라는 말은 포괄적이었으며, 이들은 예수님의 사촌들입니다.
3. 하느님의 어머니
3세기부터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기도문에 사용하였습니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마리아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다. 성모님의 자유로운 신앙과 순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여 생명을 세상에 낳아주셨기에 우리 교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예고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천주의 성모로 또 구세주의 참 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받으시는 것이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구원되고 아드님과 불가분 관계로 긴밀히 결합되었으며, 천주 성자의 모친이 되는 직무와 품위를 갖추시었다”(「교회 헌장」 53항)라고 설명합니다.
4. 성모 승천
1950년 11월 1일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현세의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함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며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교회는 오랜 전승에 따라 마리아가 “천상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표현하는 것과 비교가 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24)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 ①
단군 신화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이 세상에 내려오면서 시작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이 세상에 내려와 이런저런 사고(?)를 일으키곤 합니다. 반대로 인간들 중 누군가가 신의 선택을 받아 신적인 능력을 얻는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또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신선들은 원래는 인간이었으나 수양을 통해 신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세상으로 내려오는 신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올 뿐이고, 신이 되는 인간도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지 모든 면에서 신과 동일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참 하느님이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참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 속 존재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삼위일체 교리처럼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는 깊게 들어가면 갈수록 무척이나 어려운 교리입니다. 이런 어려운 교리는 무엇이 맞는 가르침인지에 대해 알아가는 방식보다 무엇이 틀린 내용인지, 곧 이단으로 단죄된 주장들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방식이 조금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앞서 언급한 신화나 전설 속 주인공들과 같이 겉모습만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왔거나 성부 하느님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고 어딘가 모자란 부분이 있는 ‘신적’이지만 신은 아닌 분이 아니십니다. 부분적으로 하느님이시고 부분적으로 인간이시거나, 하느님과 인간의 불분명한 혼합의 결과도 아닙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4항).
초기의 이단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부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자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그러하듯 세상에 내려오며 잠시 인간의 모습을 취한 것일 뿐, 우리와 똑같은 참된 인간으로 오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전해 준 예수님의 모습은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저 인간의 모습만을 취할 것이라면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시어 성장의 시간을 보낸다든지, 죽음 앞에서 고뇌하며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도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3세기부터의 이단은 성자를 성부와 동일한 하느님으로 보지 않는, 그분의 신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애초에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인간 예수였으나 그 이후 성부께 입양되어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입양설에 맞서 교회는 원래부터 하느님이심을(정확한 표현으로는 본성으로 하느님)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 이후에는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하느님이 아니라는 주장들도 나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긴 하나 성부께로부터 창조된 존재, 그러니까 창조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결국 그분께서 신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결국 우리처럼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하느님은 아니시라고 말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 안에 담긴 놀라운 사랑의 의미를 축소시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5항).(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가르침은 내용이 많아 다음 주에도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25)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 ②
최근엔 뮤지컬로 유명한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작품에는 인간 본성을 둘로 나누는 실험을 하다 지킬과 하이드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격으로 나뉘게 된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소설 속 이야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해리성 정체감 장애(흔히 다중인격으로 부르는 정신질환)라는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며 다중 인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이단으로 단죄된 틀린 주장들을 통해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단들 가운데에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라는 예수님에 대하여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체성(또는 인격)을 지닌 사람처럼 하느님으로서의 위격과 인간으로서의 인격, 서로 다른 두 개의 위격(원어로는 같은 말이나 우리말에선 하느님께 쓸 때는 위격, 사람에게 쓸 때는 인격으로 씁니다)이 결합된 존재로 예수님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6항). 이러한 설명은 사실상 예수님을 마치 서로 다른 두 존재가 한 몸 안에 잠시 함께할 뿐이었던 분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되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삼위일체 사랑의 일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놀라운 신비의 의미가 그 힘을 잃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로서의 한 위격 안에 참 하느님으로서의 본성과 참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함께 지니신 분이십니다. 신성과 인성의 결합과 관련해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사라진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사라지지 않고 혼합되지 않으며 참 하느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참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간직하고 계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7항).
강생이라는 용어를 우리는 예수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에서 육화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마치 참 하느님이신 성자께서 오직 인간의 육신만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은 없으셨던 분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의미는 영혼과 육신의 결합체인, 우리와 똑같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 인간의 조건을 모두 취하셨다는 의미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70항).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육신이나 영혼이 사라지고 원래대로 하느님으로서의 본성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끝날 우리가 마주하게 될 부활과 동일하게 육신이 부활하여 영혼과 함께하게 된 부활이며 승천으로 예수님의 인성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 인간으로서의 예수님도 여전히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함께 하시기에 예수님 안에서 서로 다른 하느님으로서의 본성과 인간으로서의 본성이 함께 하듯 우리들도 하느님과 완전히 함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셔. 이 한마디로 끝날 것을, 몰랐어도 크게 상관이 없었을 수도 있을 내용을 2주에 걸쳐 하나하나 이단들의 잘못된 주장과 함께 따져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위격, 인격, 본성, 영혼과 육신 같은 어려운 개념들을 함께 보다 보니 오히려 머리가 아파지고 그동안 내가 잘못 믿고 있었나 혼란스러우신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주장들은 참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참 인간이 되셨다는 놀라운 신비의 의미를, 그 안에 담긴 크나큰 사랑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놀라운 희망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이 신비로운 사건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신비인지를 깊이 있게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독서와 복음 – 주일
주일 미사에서는 2개의 독서와 1개의 복음이 봉독(奉讀)됩니다. 제1독서는 언제나 구약성경 중 한 대목이 읽히는데, 예외적으로 부활 시기에만 사도행전이 봉독됩니다. 제2독서는 신약성경의 서간들과 묵시록 중 한 대목이 선정됩니다. 세 번째 독서인 복음에선 네 복음서, 곧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복음의 한 대목이 봉독됩니다. 이러한 구성은 구약에서 예고된 구원이 신약에서 실현되고 그리스도께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보여줍니다.
주일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3년 주기로 반복됩니다. 복음의 경우, 첫 번째 해(가해)는 마태오복음, 두 번째 해(나해)는 마르코복음, 세 번째 해(다해)는 루카복음이 봉독됩니다. 참고로, 가해, 나해, 다해는 해당 연도를 3으로 나누어 남는 숫자가 1이면 가해, 2면 나해, 남는 숫자가 없으면 다해로 정합니다. 2024년은 3으로 나누었을 때, 남는 숫자가 2이기 때문에 나해입니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전례력은 매년 11월 30일 전후인 대림 제1주일부터 시작하기에 일반 달력보다 언제나 한 달 정도 빠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공관복음(마태오, 마르코, 루카)이 아닌 요한복음은 언제 읽힐까요? 우선,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처럼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을 전하면서도 그 내용, 구조, 순서, 문체, 사상이 크게 다릅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요한복음은 가해, 나해, 다해 같은 주기에 속하지 않고, 특별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배치됩니다. 바로 사순 제3, 4, 5주일과 부활 제2, 3, 4, 5, 6주일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6장은, 전체 분량이 적은 마르코복음이 읽히는 나해의 연중 제16주일부터 제21주일까지 나뉘어 봉독됩니다. 올해 7월 21일(주일)부터 8월 25일(주일)까지가 그랬습니다.
제1독서와 제2독서 그리고 복음은 그 주제들이 조화를 이룰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은 때도 있습니다. 제1독서는 언제나 복음에 맞춰 선정되기에, 이 둘은 주제상 서로 연결됩니다. 다만, 부활 시기의 제1독서는 사도행전이 순차적으로 봉독되기에, 복음과의 연관성이 약한 편입니다. 한편, 제2독서는 복음과의 연관성 없이 독자적으로 정해질 때가 대부분입니다. 여기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덕목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지 교훈적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물론 전례적으로 특별한 주일(대축일)에는 2개의 독서와 1개의 복음이 모두 연결되어 조화를 이룹니다.
「매일미사」 책을 보면, 독서와 복음의 타이틀 옆에 작은 꺾쇠표시 < >가 있습니다. 거기엔 해당 독서와 복음의 핵심 내용이 한 줄로 담겨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듣는다면, 미사 전례 중에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순교는 조선시대나 가능한 이야기 아닌가요? 아직도 교회가 순교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전에 어느 본당을 찾아갈 일이 있었습니다. 교우들이 없는 평일 낮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자매님 한 분이 남녀 화장실 전체를 정말 정성껏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화장실 청소를 부탁드리려고 고용한 분이신가 싶어서, 보수를 드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해 일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고 주임 신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청소를 위해 고용한 사람이 아니라 본당 교우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봉사하고 싶다며 오래전부터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매번 남들이 보지 않는 시간에 그토록 정성을 다하신다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순교하기는 어려운 이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순교의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순교에 도달하도록 이끄는 신앙의 마음가짐이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된 이후, 목숨을 내어놓는 방식의 순교가 흔하지 않게 되자, 그레고리오 1세 교황님은 세 가지 종류의 서로 다른 순교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적색 순교, 백색 순교, 녹색 순교가 그것입니다. 적색 순교는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순교를 의미합니다. 교황님은 여기에 두 가지 종류의 순교를 더하신 것입니다. 이는 피를 흘리지 않더라도 순교의 정신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식별의 결과입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도 이에 대해 설명하신 바 있는데, 백색 순교는 “엄격한 고행을 통해 순교의 정신을 따르려고 했던 사막의 은수자”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속을 등지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으로 살아내고자 애쓰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받는 멸시와 고통을 순교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청빈, 정결, 순명’을 서원하고, 세속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삶을 미리 살기 위해 애쓰는 수도자들이 백색 순교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녹색 순교가 있습니다. 성인께서는 녹색 순교에 대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등지는 것은 아니지만, 참회의 의미를 담은 노동이나 단식 등을 통해 욕망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녹색 순교의 개념은 의미심장합니다. 불의한 것은 견뎌도 불편한 것은 견디지 못하고, 많은 것을 배려가 아니라 민원으로 해결하려는 세속적인 흐름이 우리를 휘감습니다. 이러한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사랑과 희생의 가치를 실천하는 ‘역류의 삶’을 살자는 호소가 ‘녹색 순교’ 안에 담겨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더러운 화장실에 불편을 호소하고 민원을 제기할 때, 아무도 없는 시간에 몰래 나타나 정성껏 화장실 청소를 하던 교우분을 떠올리며, 이 시대의 순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히려 이 시대는 더 많은 순교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아닐까요?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조건(은총론)
외국 성지나 성당을 방문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낯선 풍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엑스보토’(Ex-voto)도 그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벽면 가득, 간단하게 적은 문구와 함께 은색으로된 금속 패치 등을 만들어 걸어둡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재난과 사고에서 벗어났다는 등 각각의 ‘엑스보토’에는 교우들의 애절한 신앙 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은총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왜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고통만을 주시는가?’ 하고 원망의 마음을 품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원하는 바가 있다면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야지, 종교적 신비에 기대어 은총을 청하는 건 미개한 행동이라며 꾸짖기도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은총은 가장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가장 잘못 사용되는 용어 중 하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은총은 무엇일까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습성’(habitus)이라는 개념을 통해 은총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습성이란 말은 익숙해진 성향이나 몸에 밴 습관을 말하는데, 어떤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나오는 자연스러운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날마다 훈련을 하다 보면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성인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습성이 노력과 훈련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조건이자 원리라는 것입니다.
토마스 성인은, 인간에게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습성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보기에 습성은 마치 인간이 그리운 고향을 본능적으로 찾듯 본성적인 원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최종 목적인 참행복을 향해 응답하고 나아간다면 그것 자체가 바로 습성인 것입니다. 이렇듯 은총은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지는 기적이기 이전에 인간이 갖고 태어난 선험적 조건입니다. 이 원리 덕분에 참행복을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이를 강화시켜 실제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은 언제나 우리 삶에 닥쳐옵니다. 그때마다 신앙인들은 은총을 청하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태도를 지니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성지나 성당에 가면 기도 지향을 적어놓는 책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기쁨 뿐만 아니라 고통과 두려움 안에서도 하느님께 매달리는 신앙인의 걷잡을 수 없는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이 모든 행위들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capax gratiae)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미리 심어놓은 경이로운 습성 때문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