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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식 목사
1963년 11월 22일 낮 12시 30분
미국 텍사스 달라스 시에서는 세계사를 뒤바꿔 놓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의 영웅이었던 당시 47세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시내 퍼레이드 중 한 괴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범인은 현장에서 즉시 채포되었는데, 오스왈드 라는 이름의 30대 청년이었습니다. 미 연방 수사국인 F.B.I.는 범행의 배후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수사의 결과는 단순범행이었다고 발표했고, 그의 책임은 범인의 불우한 가정환경 탓으로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봅니다.
범인 오스왈드는 아버지를 세 번 씩이나 바꿔야만 했습니다. 그는 또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자랐습니다. 갈등과 시새움과 혼란이 뒤범벅 된 가정 속에서 그는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자기를 낳지 않은 아버지에게 계속 야단을 맞고 소외되고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으며, 어머니조차 완전히 이 소년을 무시하고 방관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아픔 속에서 소년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 그는 자기가 가진 우수한 지능에도 불구하고 침구들과 싸움을 일삼고 마침내 고등학교 때는 자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고 군에 입대했지만 군에서도 동료 사병들과의 싸움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상관에게 폭행하고 그로인해 명령 불복종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고 결국 군대에서조차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 다시 새로운 결심을 하고는 외국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도 그런 오스왈드를 환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거절된 아픔을 안고 전전긍긍 떠돌아다니다가 배경이 확실치 못한 한 여인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내에게서도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짝혀 항상 경멸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미국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그날도 그의 아내는 놀러온 자기의 친구들 앞에서 그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과 경멸의 말을 퍼 부었습니다. 마침내 오스왈드는 자기의 인생에 대한 모든 꿈과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상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불행한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통해서 배운 사랑과 관심을 끄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모아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사건 당일, 그는 자기 집 창고 속에 숨겨 두었던 소총을 꺼내어 그가 가장 최근에 취직했던 직장의 서적 보관창고의 맨 꼭대기에 올라가 케네디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수사의 내용입니다.
이 보고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시 집안이 그랬었군”
“그래, 그래서 가정환경이 그렇게 중요한거야”
“우리 아이들은 잘 키워야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청년을 예정된 범죄자로 몰고 갑니다. 아니, 그 오스왈드라는 사람에게는 범죄 외에는 다다를 곳이 없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왜냐하면 ‘결손 가정은 곧 문제아를 낳는다’, ‘문제아 뒤엔 문제 부모가 있다’ 라고 하는 교육학적 확신을 불변하는 진리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아만 보면 “음 그래, 너도 그럴 수밖에 없구나” 라고 그렇게 규정짓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교육학의 기여도와 그 학문의 연구 결과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교육학의 이론과 접근방법을 좋아하고 또 교육학적 학습읗 신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반 교육학이증명할 수 없는 부분이 사람에게는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사람, 참으로 불우한 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의 소년기는 참으로 우울했습니다. 한 아버지와 네 어머니, 배 다른 형들이 10명. 형들의 학대와 따돌림 속에 그는 소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 소년에게 더 큰 짐이요 아픔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박탈당한 형들은 아버지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그 소년을 괴롭히고 따돌리곤 하였습니다. 결국 청소년기에 형들의 손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는 먼 나라로 팔려 가는 신세가 됩니다.
이 정도면 누구인지 다 아실 것입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소년의 나이에,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재롱을 떨어야 하는 그 나이에 그는 형들의 구박을 받아야 했고, 또 청소년기에는 그는 먼 나라로 팔려가 그곳에서 남의 집 종살이를 시작합니다. 목숨을 연명합니다. 여러분, 그를 요셉이라고 생각지 말고 여러분들의 자녀라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그곳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가 그 곳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그 모든 아픔을 극복하고는 보디발의 집에서 성실히 일 한 요셉에게 찾아 온 것은 무엇입니까? 그 성실의 결과는 바로 고난이었습니다. 더 큰 고통이 성실의 대가로 주어진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까지 참고 감옥에서 성실히 일 한 요셉에게 또다시 찾아 온 것도 고통이었습니다. 요셉의 꿈의 해몽대로 술 맡은 관원장이 복권이 될 때 요셉은 그에게 복권이 되면 죄 없이 감옥에 들어와 고생하고 있는 자신을 구해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고 말았습니다. 창40:23에서는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라고 표현합니다. 그것도 2년간 말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로부터의 미움, 학대, 진실이 오히려 고통 되어 돌아오는 현실, 그 상황에서 요셉은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어떤 성격이 형성되겠습니까? 형들로부터 팔려온 사실, 고생의 연속, 정직과 성실이 무시된 현실...... 일반 교육학적으로 보면 청년 요셉에게서 나올 수 있는 정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오직 ‘분노’입니다. 그의 과거의 경험들을 보면 요셉은 분노의 사람으로 성장했어야 맞는 것입니다.
요셉의 불행의 씨앗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이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남에게 지기 싫어 한 욕심꾸러기였습니다.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는 태어난 경력이 그의 성격이 됩니다. 결국 청년기 때,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는 축복의 유산을 가로채고는 도망을 갑니다. 그에게서 가정의 느낌은 거기까지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가족의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의 것을 챙기기 위해 가족과 친척이라도 속여야 했으며 결국 그 성격은 현실로 나타나 외삼촌을 속여 재산을 빼앗고, 아내를 넷씩 얻기에 이릅니다. 그에게서 사람의 냄새는 찾아볼 수 없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인생의 결과는 가히 짐작이 갈만합니다. 불우한 청소년기와 가정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요셉과 공통적이지만 한 가지 요셉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요셉과는 달리 본인의 성격 탓이 많이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아버지 야곱의 삶의 뿌리가 거짓이었기에 그의 10명의 아들도 아버지를 속이고는 동생 요셉을 팔아먹습니다. 말이 팔아먹은 것이지 그들은 정말 동생 요셉을 죽인 것입니다. 가족의 사랑이 깨어진 집안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 집안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막말로 표현하면 ‘콩가루 집안’ 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한 가정이 이렇게 망가질 수 있겠습니까? 위아래가 없고 형제는 형제를 죽이기까지 미워하고 팔아먹는 관계, 오늘날 이 가정의 모습은 성경에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의 사회면에 나와야 더 어울릴 듯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 집안은 신문의 사회면에서 소개가 되지 않고 바로 성경에 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범죄인이 되지 않으면 다행인 그런 환경을 안고 그들은 살아갔지만 그들은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스왈드의 가정과 비교했을 때, 무슨 차이입니까?
정답이야 바로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 교육학이 아닌 기독교교육학의 정답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세상의 학문으로 증명할 수 없는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저는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 - 그리하면 장수하고 평강을 누릴 것이다
3절)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 - 그리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5절)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라 -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지도해주신다
7절) 여호와를 경외하라 - 그리하면 몸이 윤택하게 될 것이다
9절)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창고가 가득 차고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
저는 잠언을 읽을 때마다 솔로몬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솔로몬의 그 안타까운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원래 솔로몬은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출생 자체가 죄의 뿌리였으며 수많은 형들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출생으로나 서열로 봤을 때 결코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왕이 된다 하더라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계속 통치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던 20살의 막내 왕자였습니다. 무서운 형들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현실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에게는 많은 부귀영화가 소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축복해 주셔서 송로몬의 통치기간이 40년 동안 전쟁이 한 번도 없었던 유일한 왕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잠언이 무엇입니까? 그 경험을 간증으로 갖고 있는 아버지 솔로몬의 자녀교육철학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라! 하나님을 믿어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 많이 가르쳐 주는 일,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게 해 주는 일, 물론 다 필요합니다만.....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이들의 삶을 행복하게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들을 자신의 교사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어느 교육기관에서 학생과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조사했습니다. 먼저 부모님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가 언제 당신보다 지적 수준이 나을 것이라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대체적인 대답은 물론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자녀가 대학을 다닐 때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녀들에게 물었을 때 의외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자녀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어머니 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중학생이 되면 아버지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의 현실과 아이들의 생각을 종합해 보면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이 반항하지 않고 말을 잘 듣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부모님 날을 들어 주는 것뿐입니다. 속아서는 안 됩니다. 교육효과의 극대화는 교육을 받는 자들이(피교육자) 교육자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인정 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인데, 학교 선생님도 존경하지 않는 아이들이 부모의 교육을 받을 것 같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교육을 할만한 본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의 자녀들도 우리를 그렇게 고상한 교사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극단적으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1992년도에 ‘New Kids on the Brork’ 이라는 미국의 인기 팝 그룹이 내한공연을 했습니다. 서울의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은 연일 몰리는 학생들 때문에 몸살을 앓다가 급기야 사고가 터졌습니다. 여학생 1명이 심장마비로 죽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각 매스컴에서는 이 현상을 크게 보도 하면서 “우리의 아이들은 목적이 없다. 한심스러운 일이다” 라고 논평을 했고, 학교에서는 “교육의 부재다” 라고 외치며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으며, 사회인사들은 “장래의 우리 나라가 걱정된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그저 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아이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부모님들이 당시 인기있었던 연속극인 ‘사랑이 뭐길래’ 라는 프로에 정신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그 프로는 아직도 기록을 깨지 못하는 엄청난 인기 프로였습니다. 그 연속극이 방송되는 시간에는 거리에 차가 한산했고, 수돗물의 사용량이 현격히 줄었으며, 그 시간에 집으로 전화하는 사람은 엄청난 결례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주일 저녁예배에 사람이 줄어 오후 예배로 전환한 교회가 많이 있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 부모된 자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 가면서 자녀를 교육한다 해도 아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란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교육은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부모의 역할은 좀 다릅니다. 무엇을 많이 가르쳐야 하고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철저히 가르치며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할 것 같지만 성경을 그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는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가르치기에는 우리 자녀들에게 너무 많은 실수와 잘못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여주는 부모의 역할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인 것입니다. 거창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만 힘을 쏟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가르치려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못합니다. 본을 보이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냥 교회에 데리고 나오십시오. 교회에 오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그 뒤에는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까지만 우리에게 원하고 게시는 것입니다.
모르드게 햄 이라고 하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미국 시골의 한 목회자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교회와 자신의 집회에 사람이 모이질 않아 고민을 하고 힘이 빠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그가 말하기를 어느 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 하면서 마음 속에 이런 음성이 들리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최선을 다 해라. 그 설교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것이 성공이다.” 그는 그 음성이 낙심하고 있는 자신에게 주신 성령님의 음성이라 획신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오늘 설교에 그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 날 집회가 끝난 후 한 학생이 자기에게 나오더니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름이 뭐냐?” 물었더니 그는 “예, 빌이라고 합니다.” 대답합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빌리 그레이엄’ 이었습니다.
모르드게 햄 이란 전도자는 그 후 가는 곳마다 부모님들과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당신은 3천명을 회개시키는 베드로는 될 수 없어도 베드로에게 주님을 만나게 해 주었던 안드레는 될 수 있습니다” 라고....
우리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자녀들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잘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미국은 경매문화가 많이 발달한 나라입니다. 꼭 유명한 사람들이 쓰던 물건이나 또 오래된 귀한 물건이 아니더라도 집에서 쓰지 않는 중고품들도 경매로 사고파는 일이 생활화 된 그런 나라입니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장이 열리게 되었는데 의례 그렇듯 마을 한 구석에서는 경매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한 상자에서 아주 낡은 바이얼린 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 바이얼린은 너무 먼지가 많이 쌓였고 낡아서 소리가 날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사회자가 집어 들고 살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군중들 중 한 사람이 손을 들고 가격을 부릅니다. “1달러요!”. 그러자 다른 사람이 “2달러요!” 말 합니다. 더 살 사람이 없느냐 묻는데 한 사람이 “3달러!” 말을 했습니다. 한참을 지나도 더 이상의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없어 낙찰이 되려는 순간 뒤쪽에 있던 한 노인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회자 내가 한 번 봐도 괜찮겠소?” 사회자로부터 허락을 받은 그 노인은 앞으로 나와 그 낡은 바이얼린을 이리 저리 보고는 먼지를 닦고 줄을 맞춰 소리를 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할아버지의 손길을 따라 그 바이얼린에서는 멘델스죤의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놀랬고 또 그 소리를 듣고는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경매장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음악을 듣고 있는데, 연주를 다 마친 노인은 그 바이얼린을 다시 사회자에게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한 번 해 보시지요.”
사회자가 다시 한 번 3달러 이상으로 살 사람이 있느냐고 군중들에게 묻자 어느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1000달러 내겠소!” 그러자 다른 사람이 질세라 외칩니다. “2000달러요!”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이 사겠다고 손을 높이 듭니다. “3000달러 내겠소!” 결국 그 바이얼린은 3000달러에 팔렸습니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한 꼬마가 손을 꼭 잡고 있더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빠, 참 이상해 아까는 3달러였는데 왜 3000달러가 됐어?” 그 때 아저지가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단다”
우리는 모두 으리 자녀들이 행복해 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소망을 갖고 있는 무든 부모님들께 여쭤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자녀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연주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능력의 한계가 있는 부모들이 아닌 천지를 창조하시고 능력 많으신 우리 하나님께 우리의 자녀들을 맡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녀’를 넣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자녀들에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자녀의 목에 매며 자녀의 마음 판에 새기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 자녀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너는 너희 자녀들이 마음을 다 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자신의 명철을 위지하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 자녀의 길을 지도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