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재향군인회여성회(회장 이숙종)는 도회 및 시.군회 임원 20여명이 함께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6월11일부터 6월14일까지 3박4일의 여정으로 중국 항일 독립운동 사적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찾아서 헌신하신 선열들의 독립정신과 애국심을 배우고 추모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첫날 여성회 임원들은 윤봉길기념관 매헌을 찾아 일제 침략자들을 응징한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 의거내용등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과 영상물 보고 기념관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고 만세삼창으로 23세의 젊은나이로 일본에서 순국한 윤봉길 의사를 추모했다.
이틀째날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계기로 상해임시정부에서 항주, 가흥 해염등으로 이동한 임시정부 및 유적지 기념관을 돌아보며, 김구선생님을 비롯 임시정부 요인들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보며 한국인들의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시간을 가졌다.
이중 가흥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숙소 및 김구피난처는 한국독립운동사에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김구선생님은 홍구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의거를 지휘하였고 일제는 김구선생님을 체포하기 위해 당시 현상금 60만원을 걸고 강력한 수색작업을 하였기에 일제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김구선생님은 가흥 애국지사 저보성의 도움을 받아 가흥으로 이동하여 2년여간의 피난생활을 하였다. 김구선생님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도운 저보성은 자녀, 며느리 등에게 지시하여 김구선생님을 안전하게 피신시키고 임시정부요인 및 가족들의 생활과 안전을 헌신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김구선생님은 가흥에서 광동인 장진구로 위장하여 피신생활하던중 처녀뱃사공(주애보)의 배를 타고 인근 운하를 다니며 소일을 하며 만난 당시 20세의 주애보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부부같이 근 5년을 지냈고 주애보는 김구선생님을 광동인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피난지에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별을 하면서도 김구선생님은 뒷날을 염두하였기에 주애보에게 당시 100원을 주고 헤어졌으나 그 후 만날 수 없었기에 돈을 넉넉히 돕지 못한것을 유감스러워 하는 마음이 기록 되어 있는 백범일지 자료 등과 김구선생님께서 사용하던 식탁, 침대 등 요인숙소 내부 모습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성회 임원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중국상해 사범대학교 안에 마련된 위안부자료전시관 이였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과 참상을 보여주는 중국 위안부자료전시관에는 일본군이 위안소에서 사용했던 물품과 중국측 피해자 할머니들의 사진, 증언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인간 존엄성을 말살하는 범죄행위와 당시 피해당하신 분들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진심으로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할 것이며, 시대를 달리하여 비꼈을뿐 현재의 우리들 에게 피해자들의 모습이 투영되는 점을 느낄수있는 가슴아픈 역사를 체험하는 시간이였다.
이번 3박4일의 일정을 통해 이숙종 회장을 비롯 여성회 임원들은 치열했던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 시대의 중요한 발자취로써 역경과 시련을 이겨낸 한국인의 힘과 의지를 드높일 수 있는 소중한 계기였다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