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 천성진(天城鎭) 기문(記文) 3.> 총3편 中 / 해암 고영화
1) 천성 정원관 기[天城定遠舘記] / 홍세태(洪世泰 1653~1725) 1714년 作.
나의 아우 공원(洪公遠)이 천성진 만호(天城鎭萬戶)가 된지 두서너 달 되었는데 문득 서울로 사람들을 보내 나에게 와서 말하길, “천성진(天城鎭)은 온전하고 참으로 유구하다.”라며 객관을 둘러보고 편액이 없다하면서, 감히 명칭을 청하여 걸려고 한다기에 나는 이에 응하였다. 그리고 명칭을 아직도 가히 정하지 않고 지금까지 답습하니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기록하고자 나는 예전에 일찍이 ‘천성 정원루기‘가 있어 간단하고 쉽게 집중해서 보았다. 아마 가정(嘉靖)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에 김해부사 권겸(權㻩), 만호가 된 최수인(崔守仁)이 기록했는데, 몇 십 년 지나 만호 박경신(朴慶新)이 이 누각을 중수하였으니 편지에 쉽게 최공(崔守仁)에 대해 기록한다. 가정(1546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러 거의 200년이 되어서야 두 분을 기록하는 바, 모두 잃어버리고 전하지 아니했다. 이야말로 아직도 그 누각을 알지 못했다. 지금은 객관이 아니지만 특별히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 어찌하여 병란 속에 잿더미가 되었는가? 누각을 객사로 고쳐야한다. 세월 탓만 하리오. 토졸(土卒)이 미련하여 기록할 수 없고 또한 그러하다. 누각과 객사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정원(定遠)이라 하니 예전대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정원(定遠)의 의(義)이다.
실로 여러 무인을 뽑았는데 공원(公遠)도 반초(班超)를 사모하여 젊어서 붓을 던지고 말과 활을 잘 쏘았다. 벼슬길로 들어서 오랜 수고 7년이 지난 후에 겨우 한 곳의 승장(乘障)의 직임을 맡게 되었는데 그 또한 늦은 나이었다. 천성은 바다 섬 가운데 있어 남쪽으로 대마도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거제도와 서로 응하며 적을 견제하니 동남쪽 바다 입구를 움켜진 요충지이다. 돌연히 여러 진영의 수장들이 영남의 봉화에 불을 올리는 일이, 실로 여기에서 처음 시작 하는 곳이다. 일본을 향해 병졸 서너 명이 적의 동정을 살피려고 높이 올라, 오랑캐 선박이 남쪽에서 오는 것을 살핀다. 그리하여 큰 풍랑에 문득 작은 배가 거꾸로 달려가는데 그 상황이 모두 보였다. 곧 통제사로부터 불시에 거듭, 역참을 통해 임기가 끝났다고 우연히 들려온다. 이런 연유로 보통 때는 일이 없는 것이 드물다. 이전에 이 섬사람이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다가 죽었다. 10여 년 전부터 물고기가 생산되지 않아 기근이 들어, 섬이 큰 곤란에 빠졌는데 흙이 무너지는 기세로 아주 위급하였다. 공원(公遠)이 이즈음 적당한 시기에 그 임무를 맡아, 세심히 청렴결백하게 더욱 극진히 일에 임하였고, 어짊으로 대중을 위로하였다. 이제야 한 진영이 아무 탈 없이 편안할 수 있었다. 비단 옷을 입고 다스리니 임금께도 소식이 들렸다. 공원(公遠)이 이로부터 장차 세상에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으리다. 그런 연유로 세상에서 군사를 부림에 뛰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재능을 펼쳐서 만 리 밖에서 공(功)을 세우니 이제 공원(公遠)이 태평한 세상에 살면서 아무리 반생(班生)의 뜻이 있다 해도 그 땅이 아니었지만, 돌아보면 어찌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 새끼를 찾으리오. 이로써 만호에 임명된 것이다. 흔쾌하도다. 1714년 갑오년 8월 일 어느 날 기록한다.
[吾弟公遠 爲天城萬戶數月 輒走人京師 謁余而言曰 天城之設 厥惟久矣 而客舘顧無扁額 敢請名而揭之 余則應之而未得其可以名者 因循至今 瓜已熟矣 記余昔年嘗見簡易集中有天城定遠樓記 盖嘉靖丙午間 金海府使權㻩 爲萬戶崔守仁記之 歷幾十年 萬戶朴慶新重修此樓 而簡易崔公爲之記 自嘉靖抵今幾二百年 而兩公所記 皆失不傳 未知其所謂樓 非今之客舘 而別有所建者歟 抑豈兵燹之後 樓變爲舘 而歲月悠漫 土卒頑不能記而然歟 然樓與舘 不必分之 今以定遠 仍舊可也 定遠之義 實取諸班超 公遠卽慕超者 少而投筆 善騎射 屈跡行間 積勞七年而後 僅得一乘障 其亦晩矣 天城在海島中 南指對馬 西與巨濟掎角 扼東南海口要衝之地 突然爲諸鎭首 嶺南候烽之擧 實始於此 日使卒數人升高候望 見有蠻舶自南來 雖大風浪 輒走小舸逆之 得其狀 卽申于統帥而若稍不時則驛聞罷 以故居常鮮不生事 先是島中人卒捕魚爲生 而十餘年來 魚不産 歲且荐飢 島中大困 土崩之勢 岌岌如也 公遠受任 適當此際 小心廉潔 莅事甚謹 撫衆以仁 於是一鎭得以安集無事 繡衣以其治能上聞 公遠自此若將有爲於世矣 然超生用武之世 故能展布其才 立功萬里之外 今公遠生乎平世 雖有班生之志而無其地矣 顧何能入虎穴探虎子 以取封侯也哉 是可慨也 歲甲午八月日某記]
[주1] 반초투필(班超投筆) : 한나라의 반초(班超)가 관리 노릇을 하면서 글씨를 쓰다가 붓을 던지며, “대장부가 마땅히 만 리 밖에 나가서 공(功)을 세울 것이지 어찌 이런 것이나 쓰고 앉았으랴.” 하고 서역(西域)에 가서 공을 세웠다.
[주2] 반생(班生) : 반생은 서역(西域)을 30년 동안이나 진수(鎭守)하여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진 한(漢) 나라의 장군 반초(班超)를 가리킨다.
[주3] 토붕와해(土崩瓦解) :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산산이 깨어진다는 뜻으로, 사물(事物)이 여지없이 무너져 나가 손댈 수 없이 됨을 가리키는 말.
● 공원장행 야음서회[公遠將行 夜飮叙懷] 천성진 만호(天城鎭萬戶) 공원(洪公遠)이 순행하다 밤에 술을 마시며 회포를 늘어놓다. / 홍세태(洪世泰 1653~1725)
駿馬赤茸鞦 화려하게 장식된 준마를 타고서
金鞭橫遠道 금빛 채찍 휘두르며 먼 길을 가로지르네.
柳條繫不得 버들가지로 고정시킬 수 없으니
去齕熊川草 가면서 웅천(熊川)의 풀을 깨문다.
其二
氣勁消炎瘴 갯벌의 독하고 강한 기운이 사라지니
心雄眇巨洋 웅장한 마음에 넓은 바다를 곁눈질하며
角弓看在手 손에 쥔 각궁(角弓)을 움켜지는데
東去掛扶桑 동쪽 수평선에 부상(일본)이 걸려있네.
其三
願見此行久 이 순행이 오래되어 그대를 만나길 바라나
臨分情反傷 이별에 임하면 도리어 마음이 상한다네.
衰年豈堪別 늙은 나이에 어찌 이별을 견디랴만
吾鬢不勝霜 나의 머리털이 서리에도 견디지 못하네.
其四
浪泊舟中老 풍랑에 배를 노련하게 정박하며
當時憶少游 당시에 마음껏 노닐었던 일이 생각난다.
君須賣寶劍 그대는 반드시 보검(寶劍)을 팔아
歸買一田牛 돌아와 한 살림 차리시게.
[주] 소유(少游) : ‘한때 마음껏 노닐고 떠도는 삶‘을 의미하는데, ‘후한서’에 마원이 “내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단지 옷과 밥을 해결할 수 있으면 부모님의 분묘나 잘 모시고 향리에서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나 들으면 그만이지 차고 넘치는 것을 구하면 단지 괴로울 뿐’이라고 했다”면서 “내 누워서 종제가 평시에 했던 말을 생각해보지만 이제는 어쩔 수가 없구나.”라고 한탄하며 죽었다고 전한다.
2) 천성진(天城鎭) 정원루(定遠樓)의 기문[天城鎭定遠樓記] / 최립(崔岦 1539∼1612) 1605년경.
천성진(天城鎭)이 설치되고 정원루(定遠樓)가 세워지게 된 내력에 대해서는,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1) 연간에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의 사문(斯文) 권연(權(王燕))이 당시 만호(萬戶)였던 장군(將軍) 최수인(崔守仁)을 위해 써 준 기문(記文)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지금의 만호(萬戶)인 박후 경신(朴侯慶新)은 내가 숙위(宿衛)하고 있을 당시의 낭료(郞僚)였는데, 진주(晉州)의 임소(任所)에 있는 나에게 보좌관 한 명을 급히 보내 새로 중수한 정원루의 기문(記文)을 써 달라고 요청해 왔다. 이에 내가 탄식을 하면서 혼자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천성진은 중요한 요새지인 만큼 이곳을 관할하는 만호 역시 선발하기가 어려운 자리라고 하겠다. 그런데 최 장군이 처음으로 이 요새지를 개척하였고 정원루 역시 그의 손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뒤에 실로 장단(將壇)에 올라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몇 세대를 지나 박후(朴慶新)가 이곳의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맡은 바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니 과연 그 자리에 부끄러운 점이 없게 되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나로 말하면 권 도호부사(權都護府事)에 비해서 실력이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박후의 훌륭한 점을 부각시키면서 당시의 기문보다 더 상세히 논할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내 나름대로 다시 생각되는 점이 있기는 하다.진장(鎭將)의 임무는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성을 높이 쌓고 못을 깊이 파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계를 수선하고 완비하는 것이 아니겠으며, 그리하여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밖으로는 관찰사(觀察使)와 절도사(節度使)의 감독을 받고 안으로는 조정에서 파견된 어사(御史)에 의해 항상 감시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포상(褒賞)과 주벌(誅罰)이 뒤따르게 마련이다.그렇기 때문에 진장들 역시 그렇게 심하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 일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서 자신의 모든 힘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가령 누대(樓臺)나 정자(亭子)를 높이 세우는 것 역시 경관(景觀)의 위엄을 드높이고 향음(鄕飮)과 향사(鄕射)를 베풀 적에 필수적인 만큼 또한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뜻을 두고 있는 이들이 드물기만 하니, 이는 그런 일을 잘한다고 해서 포상을 받는 것도 아니요 잘못한다고 해서 주벌이 뒤따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대저 포상을 바라고 주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마지못해 일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소인(小人)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흙과 나무로 누각의 건물을 세우고 희고 붉은 색칠을 하여 단장을 하는 그 일 자체야 별로 기이하게 여길 것도 못 될 것 같지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수준이 낮은 용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혹시 박후(朴侯)가 당장에 해야 할 일은 뒤로 미룬 채 이 누각을 중수하려고 급급해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으니 이는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내가 옛날에 성도(成都 성천도호부(成川都護府))를 맡아서 지키고 있을 적에는 그 고을이 외따로 떨어져 있고 해야 할 일도 간단했기 때문에 호령을 내린 지 몇 개월 만에 강선루(降仙樓)가 멋들어지게 이루어졌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 진주(晉州)에 와서는 반년이 다 되도록 번쇄하고 잡다한 업무를 백에 하나도 척결하지 못하였고 고쳐야 할 각종 폐해 역시 백에 하나도 제거하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자리에 앉아 있어도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찾을 수가 없으니, 그 밖의 일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촉석루(矗石樓)가 허물어져 비가 새는데도 그냥 방치해 두고만 있는데, 이는 내가 평소 바라던 바가 결코 아니었다.지금 가령 박후가 성을 높이 쌓아 놓지 못하고 못을 깊이 파 놓지 못하고 기계의 수선과 완비를 기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정원루 공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박후가 이미 자신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알 수가 있으니, 포상을 바라지 않아도 포상이 저절로 이를 것이요, 최 장군(崔將軍)의 명성과 지위도 장차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그런데 박후의 보좌관에게 물어본 바에 의하면, 박후(朴慶新)의 임기가 이미 만료된 상태에서 아직 교대를 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임하자마자 정원루의 공사를 급히 시작하여 완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또 알 수가 있으니, 내가 촉석루를 아직까지도 그냥 방치해 두고 있는 것 역시 조금은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다.이렇게 생각하고는 마침내 이를 글로 써서 정원루의 기문으로 삼게 하였는데, 그 형세가 얼마나 웅장한지 그리고 조망은 얼마나 툭 트였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조만간 한번 올라가 보아야만 알 수가 있을 것이니, 박후가 비록 떠난 뒤라 할지라도 그때에 가서 내가 다시 한 번 붓을 휘둘러 이 기문 대신 그 글로 새롭게 장식해 볼까 한다.
[天城之所爲鎭 定遠之所爲樓 嘉靖丙午間 金海都護權斯文㻩 爲萬戶崔將軍守仁記之 蓋詳矣 今萬戶朴侯慶新 余在宿衛時郞僚也 命一裨走馬來 謁余於晉之任所以定遠重新之文 余嘆曰 天城 要鎭也 其萬戶 難選也 崔將軍始爲之 實經始斯樓 迺後登將壇有名 凡幾更代 朴侯當是選而勤是事 其果無愧矣 顧余不逮權都護甚 曷能引侯美且於詳乎 加獨念鎭將之務 惡乎在 城池崇浚非乎 器械繕完非乎 外壓以觀察節度使 內遣之御史 常察視玆 以爲能擧職否而褒誅至焉 故守鎭者 非甚不才則致力焉 若麗譙嶢榭所以威觀贍具飮射者 亦豈可闕 而鮮加之意者 能不必褒 否不必誅也 夫慕賞畏刑而爲之者 小人而已 故土木之營 丹堊之治 爲事若不甚異 而爲之者 必非庸下人也 或疑朴侯毋乃後其當務 而汲汲於斯乎 則不然 以余驗之 余昔守成都 邑僻而事簡 修號令數月 而降仙亦輪奐矣 今于晉且半年 繁冗百不一剔 獘瘼百不一祛 坐席尙不暇整 況其外乎 任矗石壞漏 非余素也 使朴侯城不已崇 池不已浚 器械不已繕完 能及於定遠乎 於是 益見侯已擧職 不期褒而褒至 崔將軍名位 將在斯人矣 然詢于其裨 則侯之瓜已滿 特未代耳 是又見成之不遽也 余於矗石 亦可以免矣 遂書此歸之以文樓 若夫形勢之壯 眺望之快 則余早晩一登而得焉 侯雖已去矣 奮筆滌此而新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