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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원인을 찾아 분석하고 해결해 나가는 방식을 ‘트리즈(TRIZ)이론’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난관에 부딪히는 상황속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을 어떻게 찾아내는 지를 연구하고 스스로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이 ‘트리즈(TRIZ)이론’에서 가장 중심적인 사고로 가르쳐주는 것이 ‘모순논리’라고 합니다. 모순을 인정하고 그 모순을 극복하는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대안을 만들어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라고 하네요. 어떤 문제든 일단 모순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토대로 생각의 프레임을 깨뜨리는 다양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적용하여 모순을 극복하게 될 때 문제가 해결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비행기는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비행중엔 바퀴가 있으면 안되죠. 하지만, 착륙시에는 반드시 바퀴가 있어야 합니다. 운항중에는 필요없지만 출발도착에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물 이것이 바로 비행기 바퀴의 모순입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비행기가 날고 있을 때는 바퀴가 동체에 접혀 들어가고 착륙할 때 바퀴를 꺼낼 수 있는 랜딩시스템을 비행기에 적용시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아주 간단한 해결법이지만 비행기의 고정식 바퀴에 대한 고정관념, 그 생각의 틀을 깨뜨릴 때까지 2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문제로 인해 대한민국 사회가 오랫동안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통일비용에 대한 문제입니다. 독일이 통일을 위해 쓴 금액은 1조 2,649억 유로라고 합니다. 한국 돈으로 약 1,902조원정도의 돈인데 올해 2024년 우리나라 예산이 656조원이니까 약 3년 정도 오로지 통일정책에 다 써야만 통일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바로 통일 당사자들의 경제 격차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지만 북한은 국가별 경제력으로 따져보면 세계 최빈국 중 한 곳입이죠. 독일 통일 당시 서독과 동독은 자유민주주의국가중 가장 잘사는 나라중 한 곳과 사회주의국가중 가장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통일비용이 이렇게 많이 들었는데 과연 이 한반도는 통일국가가 만들어지려면 얼마나 많은 통일비용이 들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경제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국회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국회를 진압해보려고 했던 대통령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했나 걱정하며 지금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비상계엄령에 놀란 국민들이 지금 용산과 여의도 국회, 광화문 세종로에서 시위를 벌이며 대통령 탄핵,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습니다. 정말 걱정거리가 많고 문제가 많은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문제뿐 아니라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우리 일상에서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고 은혜받은 사람들이 이제 저녁식사할 때가 되어 끼니를 해결해야겠는데 제자들 입장에서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에게 저녁을 먹일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문제해결책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해결책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우리가 흔히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찾는 문제해결책과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을 비교해 보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깨닫고 참 신앙적 문제해결을 통해 은혜가 충만한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식사 문제에 닥치자 생각해 낸 해결책, 첫째, 제자들은 “각자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자”고 합니다.
마태복음 14장 15절입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날이 저물게 되어 열두 제자가 예수님에게 요청합니다. 예수님에게 의견을 묻기보다 예수님께 자신들의 대안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대략 1만 5천 명에서 2만 명 정도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에서 사람 숫자를 계산할 때 그 당시에는 성인 남자만을 대상으로 숫자를 세었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인원수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규모의 사람들에게 한 끼 식사를 제공하려면 어마어마한 재정이 들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정이 들 것인지 제자들이 ‘이미 견적을 뽑고 예산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7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전체 인원의 한 끼 식비로 약 2백 데나리온정도 들 것을 이야기합니다. 2백 데나리온을 지금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2천만원 정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봤자 1인당 식비로 약 1,000원에서 1,500원 정도로만 계산될 정도록 작은 금액이지만 전체 식비로 계산하니 그 정도로 큰 금액이 되었습니다. 어디서 갑자기 2천만원정도의 돈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제자들은 이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었기에 그들의 머릿속에서 내어놓은 대책은 각자 해결, 즉 더치페이였습니다. 모두를 책임질 수 없으니 각자 더치페이로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각자 해결하면 되니 큰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제자들이 모두를 챙겨줄 책임도 없어지고 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해결방식은 지금 이 시대 사회조직나 교회, 일반적인 모임에서 무리없이 해결하려고 할 때 쓰는 방식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공동체적인 해결보다 각자 해결방식을 택합니다. 친구들끼리 함께 식사를 해도, 심지어 가족들끼리 식사를 해도 한 명이 돈 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더치페이를 하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고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좋은 해결책이라고 말합니다. 함께 여행을 떠나도, 어떤 행사를 함께 진행해도 식사나 간식, 준비물을 각자 준비해 오고 공동으로 써야 할 것도 각자 n분의 1로 나눠서 준비합니다. 이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한 명이 부담스럽지 않고 각자 조금씩 부담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물론 보편적인 경우에 그렇게 진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본문에서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예수님이 좋아서 계속 함께 지내다보니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고 은혜의 말씀을 듣다보니 저녁 먹어야할 시간조차 잊어버리고 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제 저녁식사 시간이라는 이유로 모여서 은혜받던 사람들이 흩어져야 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 흩어져서 각자 저녁을 먹어야하는 상황이라면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해결책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 듯이 주님께서는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장 합리적일 것 같은 이 해결책의 단점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돈있는 사람은 식사하고 돈없는 사람은 굶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모였는데 예수님의 말씀과 은혜사역을 경험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사모하며 따라다닌 이유로 식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해결책은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다 망가뜨리고 사랑조차 없는 비정한 예수님, 성도들의 배고픔을 모른 척 하는 매정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신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매정한 분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눠버리는 대안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주변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서 ‘니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며 서로 외면하게 만들고 서로 무관심한 상태로 만들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우열을 조장하고 빈부의 갈등을 만드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냥 현실에 맞게 당장 편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냥 ‘각자 해결하면 되지 굳이 함께 해야 돼? 굳이 다른 사람들까지 도와줘야 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생각, 이런 해결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절대 신앙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더치페이보다는 함께 쓰고 함께 나누는 복된 인생이 되어 주님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식사 문제에 닥치자 생각해 낸 해결책, 둘째, 가진 것을 나눠주는 방법입니다.
마태복음 14장 16,1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세상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우선적인 가르침은 바로 나눔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근본적 해결 방법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안에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주님의 주권안에서 서로 베풀어주며 나누어주며 가난한 자가 없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자들도 유대인으로서 분명 나누어 주고 베풀어주는 것이 상식적인 삶인 줄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어떻게 다 모아 본 것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효과를 낼 수 있을까요? 대략 계산해도 일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 식사가 되겠냐?’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의 뉘앙스를 보면 제자들의 마음에 ‘우리 먹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나눠줄 수 있냐?’라고 생각인 것을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9장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1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902년에 제임스 캐시 페니가 설립한 J.C. 페니 컴퍼니는 미국의 유명한 유통업체입니다. 백화점과 할인몰, 편의점까지 소매유통의 대표적 기업이었지만 미국에 경제공황이 닥치게 되었을 때 J.C.페니 컴퍼니는 파산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경제인들에 대한 평가를 할 때 기업파산한 상태에서 다시 기업을 살려 대기업을 일궈낸 대표적 인물로 제임스 캐시 페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갑자기 사업이 몰락하며 망하게 되었을 때 다시 새출발하면서 자신의 사업과 생활 철칙으로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는 성경말씀을 원칙으로 세웠습니다. 조금씩 다시 사업이 번성하게 되자 그는 교회와 사회복지단체에 많은 돈을 기부했습니다. 또한 은퇴 목회자들을 위해 플로리다에 백 가호의 주택을 지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의 삶을 마무리할 때쯤 ‘전에는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이니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다음부터는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기쁨이 움켜쥐고 있는 기쁨보다 훨씬 큰 것을 깨달았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입니다. 찾아서 함께 읽겠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 주변에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많이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이 서로 나누고 서로 협력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시면서 일단 근본적으로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시는 신앙은 바로 서로 섬기고 나눠주는 것이 참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고주리교회도 연말연시가 되면 아직도 너무나 어려운 교회형편이지만 마을 전체에 선물과 달력을 나눠주며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일단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함께 나누면서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두 각자 어렵겠지만 서로서로 함께 나누면 그래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잠언 22장 9절입니다.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공동체, 교회사역은 희생과 사랑과 섬김이 없이는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곳 고주리에서 사역하면서 우리도 많이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들어온 것과 우리가 가진 것을 다 나눠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항상 나누며 베풀어주면서 그리스도 신앙의 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하는 우리 고주리교회가 이런 베품과 나눔의 신앙공동체로 이 지역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나눔과 베품의 본이 되는 귀한 공동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식사 문제에 닥치자 생각해 낸 해결책, 마지막 셋째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 18~21절입니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더니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 4장 1절에서 7절에 보시면 선지자 엘리사와 선지생도의 아내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사의 제자는 이미 죽었고 아내 혼자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빚만 쌓여 이제 결국 두 아들을 남의 집 종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엘리사가 어느 날 이 집을 방문합니다. 그는 선지생도의 아내에게 집에 뭐가 있는 지 물었고 선지생도의 아내는 기름 한 그릇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이웃집에 가서 그릇이란 그릇은 있는대로 다 빌려오라고 말합니다. 선지생도의 아내와 아들은 많은 그릇을 빌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그릇에 기름을 붓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그릇까지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 뒷 말씀이 바로 열왕기상 4장 6절입니다.
열왕기하 4장 6절 같이 읽겠습니다.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단 한 그릇의 기름을 수 없이 많은 기름으로 만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부어도 부어도 기름이 계속 나오는 그릇은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축사하고 나눠주는 떡과 물고기가 나눠주었는데 나눠주면 떡 양이 줄어들고 물고기양이 줄어야 정상적인데 이상하게 떡이 그대로 물고기가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양이 열두 바구니였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오병이어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의 출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제자들이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오병이어의 기적 설교를 들으면서 혹 이 놀라운 기적은 어린 아이의 헌신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식으로 설교하는 내용을 들은 분이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혹은 신앙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인간의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어린 아이가 자신이 먹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으니 그제서야 사람들이 감동받아 자기자신을 위해 숨겨놨던 음식을 꺼내놓고 다 같이 먹게 되었고 그 후에 남은 음식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라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이렇게 보면 안됩니다. 이 오병이어 기적의 핵심은 아이의 헌신이 아닙니다. 분명 어린 아이의 헌신에 대해 귀하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은 헌신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놀라운 기적입니다. ‘오병이어기적’의 주제는 우리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자 우리의 것을 내어놓자는 것이 말씀이 아닙니다. 오병이어사건을 가지고 설교할 때 ‘헌신’, ‘나눔’을 강조하고 끝이 난다면 이건 정말 잘못된 성경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어놓음과 섬김을 강조하려고 했다면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시면서 너희들 스스로 잘 나눠 먹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주고 나눠주라고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로 가져오라고 명령하셨고 그것에 축사하시고 나눠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8, 19절을 찾아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설명하는 핵심은 우리의 가진 것이 아무런 쓸모도 없고 보잘 것 없어도 실제적으로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역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오늘 이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어놓고 헌신한 것이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정말 작은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도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면, 예수님께 가져와서 예수님께서 축사하시면 나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우리의 모든 어려움이 해결된다는 사실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시편 145편 15절입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문제를 가져오면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문제도 예수님께서 해결하십니다. 가진 것이 없고 해결할 수 있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보잘 것 없는 능력이라도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기적같은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같은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어떠한 문제라도 그것을 해결하시는 예수님만 믿고 주님께 맡길 때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갑자기 수 많은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려고 하니 제자들은 갑갑했습니다. 일단 먹을거리가 없고 먹을거리를 사 먹으려면 한 끼 식사로 수천만원의 돈이 들어갈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리들 각자 해결하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각자의 형편으로 먹을 수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문제 해결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우리 스스로 뭔가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정말 오만이고 불신앙이고 인간 중심의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제자들이 해결하려던 문제 해결의 방법은 인간의 노력이 강조되고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 뭔가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바로 불신앙입니다. 인간이 문제 해결의 주체라고 믿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특히 이렇게 인간이 내놓은 인간적 해결 방법은 대부분의 경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를 비교하게 만들고 결국 문제를 해결할 때 좌절감과 낙담을 주는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차별금지법이라고 내놓은 것을 보십시오. 차별금지라고 해놓고는 그것보다 더 큰 차별은 없습니다.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해놓고 결국은 더 큰 갈등과 대립, 불안과 다툼을 만들고 역차별을 만들어냅니다. 세상 사람들의 문제 해결 방법이 다 그렇습니다. 내 생각대로 해결해 보려고 내 스스로 채워보려고 할 때 우리는 더 큰 어려움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방법은 어느 한 사람 소외당하거나 차별받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 각자 먹을 양만큼 배불리 먹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궁극적으로 어디서 문제를 해결하며 우리의 갈급함, 우리의 배고픔, 우리의 갈등을 어디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 스스로 완전한 해결책을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 우리 삶의 위기를 하나님께 맡길 때 수 백만원, 수 천만원뿐 아니라 수백억, 수천억이 들어가는 엄청난 일마자도 기적적으로 역사하시며 해결하시는 하나님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할 수 없는 그 일이 우리 주 예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기적과 같이 우리에게 이뤄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