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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사도행전 2,14.22-33
마태오 28,8-15
부활 팔일에 교회는 계속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아타나시오 성인이 말하였듯이, 연속적인 ‘큰 주일’, 곧
부활 50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의 한순간이 아니라 인간의 전 역사, 인간의 생명과 죽음의 정점을 이루고 이를 설명해 줍니다.
부활 팔일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독서들은 사도들의 첫 설교를 담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초기 여정을 반영해 줍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 부활에 관련된 두 이야기를 전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무덤을 보러 간 다른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천사의 말을 듣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마태 28,5-7).
그다음 예수님께서 친히 그 여자들을 만나 이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복음의 둘째 부분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다룹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궁리한 끝에 부활의 유일한 직접적인 증인들인 군사들을 매수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마태오의 특종 뉴스인 빈 무덤의 소문에 관한 이 논평은 회당과 사도 교회 간의 갈등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빈 무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살아나셨음도 증언해 줍니다.
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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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마르코 신부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사도행전 2,14.22-33
마태오 28,8-15
부활절 50일의 대장정
우리는 지난 3일 동안 예수님의 파스카 성삼일
(Triduum Paschalis: 최후의 만찬, 십자가 죽음, 무덤에 묻힘과 부활)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직접 펼치시는 인류구원사의 절정이자 최종적인 사건이 부활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앞서간 글들에서 거듭 강조하였지만, 예수부활에 대한 믿음이 단번에 주어지는 신앙이 아니다.
이는 부활 대축제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따라가 보면 더욱 확실해 진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우선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성야부터 시작하여 만 하루의 축제일로 지냈다.
이것이 서로 모여 빵을 나누며 기도하는 일을(사도 1,14; 2,12 참조) 빼고는 유일한 축제였다.
3세기 초엽 초대교회는 유다인들이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를 8일 동안 거행한 것을 본받아
하루의 부활대축일을 부활 팔일축제로 확장하여 기념하였고,
4세기 초엽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고, 연이어 국교(國敎)로 선포되면서
축제일은 50일로 최종 확정된다.
50일의 숫자는 이미 유다인들의 과월절(해방절) 축제이후 50일째 지내던 오순절 축제를 연상시키기에
우리에겐 전혀 낯설지 않다.
유다인들에게 과월절(해방절)은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물리적 해방을 의미하며,
오순절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야훼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을
기념함으로써 영적인 해방을 의미한다고 했다.
따라서 이미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후 유다인들의 오순절 날 한 곳에 모여 있던
12사도(마티아가 가리옷 유다의 자리를 채움)에게 성령이 내림으로써
본격적인 교회의 탄생이 시작된 것(사도 2장)을 감안한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사건,
그리고 성령강림사건을 하나로 묶은 축제일로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사상으로 자리잡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오늘부터 예수님의 기막힌 부활사건을 승천(40일째)을 포함하여 성령강림사건까지
50일간의 부활대축제 시기를 지내게 된다.
교회가 예수부활사건을 축제일로 50일을 지내든, 일년 내내 모든 일요일을 예수부활 기념일로 지내든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부활을 신앙(信仰)하느냐?'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부활신앙을 돕기 위하여 교회는 파스카의 성삼일뿐만 아니라, 부활 팔일축제도 준비하였다.
나아가 40일간의 부활준비시기(사순절)와 50일간의 부활축제일도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일년 내내 모든 일요일(52~53번)을 부활기념축일로 거행하지 않는가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오늘부터 부활 팔일축제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복음공동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부활신앙에 도달하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며,
이와 행보(行步)를 같이하여 우리의 부활신앙을 고무시켜야 할 것이다.
부활신앙을 고무시키는 방편으로 복음서가 보도하는 예수부활에 관한 기사를 주의 깊게 따라갈 필요가 있다.
마르코는 16.1-22에, 마태오는 28,1-20에, 루카는 24,1-53에, 요한은 20,1-25에
각각 부활(승천)기사와 복음의 에필로그(마무리)를 적고 있다.
부활기사의 분량은 마르코복음(70년경)과 마태오복음(70~80년경)보다
루카복음(80년경)과 요한복음(90-100년경)이 더 길다.
이는 복음서의 집필연대가 늦은 것일수록 비교적 많은 내용을 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복음서 모두가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 내용은 '안식일 다음날, 즉 일요일 이른 새벽에
일찍부터 예수를 따라 다니던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고, 이 순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사실상 부활신앙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를 토대로 각 복음서는 자기 나름의 부활신앙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오늘 미사의 마태오복음은 빈무덤 그곳에서 부활예수와 여인들의 첫 상봉을 보도하면서,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그리고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는 '경비병 매수설'(12절)과
'예수시신 도난설'(13절)을 들려준다.
이는 마태오복음의 독자(讀者)가 유다인들과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마태오는 이 대목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예수의 무덤을
경비해야 한다는 독자적인 '무덤 경비설'을 미리 덧붙여 놓았다.(마태 27,62-66)
아무튼 부활시기 50일 동안 듣게 되는 모든 복음은 비록 그것이 부활사건을 보도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활신앙을 향하여 읽혀져야 하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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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요셉 신부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사도행전 2,14.22-33
마태오 28,8-15
우리는 모두 부활의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보고 겪으면서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이 참 다르지요.
우리 속담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손바닥으로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하늘은 가려지지가 않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여인들과 제자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온 세상에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알리는 반면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수석사제들과 장로들은 그것을 막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그 전에도 유다를 뇌물로 매수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경비병들을 매수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저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란 저지한다고 해서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들의 그런 어리석은 일 처리 과정까지도 통째로 드러나서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더욱 증명해 주는 계기가 되었음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진리 편에 서지 않으면 끝없이 거짓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교묘한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세상 논리가 마치 그런 것처럼 여기지만 오늘 복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악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 사건을 접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인들, 또 그것을 막으려고 애쓰는
수석사제들과 장로들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 편에 서면 이익이 될 것 같고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사는
방법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혹일 뿐이지요.
우리는 진리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결국에는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또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첫 번째 사명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이천 년의 역사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그것을 온 세상에 전했던 부활 증언의 역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고
그것을 열심한 여인들과 함께 전했으며
그것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다시 이웃에게 전하며 그리스도교는 발전했습니다.
그 역사를 보며 부활 대축일을 맞는 신자들의 첫 번째 사명은
전해 받은 부활 체험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부활 체험을 기쁘게 잘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예수님을 전했듯이 우리 또한 잘 전하고 있는가
하고 물으면 '글쎄요'하는 생각이 듭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 둘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주일 아침에 또 한 친구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어이, 친구, 오늘 골프 치러 가지 않겠는가?”
친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고맙네만 나는 오늘 성당에 가야 한다네.”
그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런가?
나는 자네의 믿음에 정말 감탄사가 나오네.
내가 그 동안 자네에게 일곱 번이나 골프를 치자거나 낚시를 하자고 했는데
성당 때문에 모두 거절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런데 자네는 번번이 성당 때문에 내 청을 거절을 했는데 내 생각에는 성당이란 곳이
골프장이나 낚시터보다는 갈 만한 곳이 못되는 것 같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영문을 몰라 되물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성당이 골프장이나 낚시터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친한 자네의 청까지도
매번 거절하지 않았는가?”
그 친구가 대답했지요.
“정말 자네에게 성당이 중요한 곳이라면 왜 나에게 한 번도 같이 가자는 말을 안 했는가?
나는 낚시터와 골프장이 정말 좋아서 자네한테 가자고 그렇게 청했는데
자네는 그런 적이 없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정말 좋아서 다른 사람들의 청을 거절해가면서 성당에 다니고 있다면
왜 그 사람에게 같이 가자는 소리를 안 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이 중요한 일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우리는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전해 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정말 좋다고 체험했다면 가자고 청하고 또 권하고 자꾸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창피하다거나 또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하지 말아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지요.
정말 좋은 것이라면 제안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도 미사가 끝나면서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하고
저는 여러분들을 파견합니다.
우리는 바로 어제 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큰 소리로 노래하고 서로서로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활은 그것으로 끝인 것 같습니다.
잘못 되었지요.
정말 주님의 부활이 기쁘고 그 주님을 알게 된 체험이 너무나도 좋다면
담고만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그 기쁨은 전하면서 겪는 시련이나 창피함, 무안함을
밀쳐내고도 남을 만큼 크고 깊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고 그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것,
이것이 가장 복된 소식, 즉 복음(福音)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우리가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부활하신 주님, 복음을 전하고,
우리의 이웃 역시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또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진리 편에 서고 그 진리가 참된 행복임을 증언하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