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 변호사가 《월간천관》에 '이청준문학관 건립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故 이청준 작가의 인물과 문학세계를 심층적 소개 중이다.
2022년 8월호를 시작으로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2023년 1월호, 2월호, 3월, 4월호, 5월호, 6월호, 7월호, 9월호에 이어 이번이 10월호로 열네 번째 연재기고이다. 8월호는 쉬었다.
(편집자 주)
이청준과 '대흥, 대덕, 회진'
-이청준 문학관을 위하여(14)
1. 대덕초 개교100주년
먼저, 2024년에 있을 대덕초 개교 100주년 행사를 당겨 축하드린다. 그 대덕초 100년에는 근대 대덕의 시공간과 인물들이 온축되었을 터. 이에 몇 마디 보탠다. '대흥, 대덕, 회진' 명칭의 상관 관계이다. 기록상 최초 명칭은 '대흥방'이다. <장흥읍지 정묘지, 1747>에 '대흥방'으로 등장했다. 1753년에 <대흥방 향악서>가 있었다. '대흥'을 대덕과 장흥의 합성지명으로 간주함은 속단에 불과하다. 이청준 소설에도 종종 '대흥' 지명이 등장한다. '대흥산'도 나왔다. 현재 기준으로 말하면, '대덕읍+회진면' 영역이 되겠다. '대흥시옹(詩翁)'으로 지칭된 '간암 위세옥(1689~1766)도 계셨다. 그 '대흥방'에서 유래한 '대흥면'과 당시 '대덕면'을 합쳐 1914년에 '대덕면'이 되었고, 1980년에 '대덕읍'으로 승격하였다. '회진면'은 1986년에 대덕읍에서 분면 되었다. 이런 변천과정을 보면, 천관산의 남쪽 일대인 '대흥, 대덕, 회진, 덕도'가 서로 동떨어진 구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한 몸뚱이에 속했다. 호적기록 1939년생 이청준 선생도 '대덕면, 대덕사람'으로 출생하여, 1986년경 회진면 분면으로 2008년에 '회진사람'으로 타계하신 셈이다. 그리하여 이청준 소설 배경에 등장한 사건과 지명을 합쳐보면, 그것들이 곧 '대흥, 대덕, 회진'이란, 일심동체적 역사적 공간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개척교회들
미국 남장로교회의 선교 루트를 따라 남쪽 해안선으로 1894년 삭금교회, 1905년 도청교회, 1905년 진목교회, 1906년 명덕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청준은 마을에 있는 진목교회 신도는 아니었으나, 그 교회에서 한글습득을 하였다 한다. 1905년은 서울에서 보성전문학교와 이명래 고약이 등장한 시점이다.
3. 수산조합
1917년 11월경에 설립되었다. 1923년 11월경에 '해태조합'으로 개편되었다. 1936년에 전국 해태생산 1위를 하고서 <해태조합 창립20주년, 다수확기념비를 세웠다. 해방 후 1946에는 어업조합'이 되었는데, 이청준 소설에 나오는 '조합이다. 그 조합에 이청준의 큰 형이 한때 취업했으며, <흰옷> 등 소설에도 스쳐 지나간다. 1977년에는 '장흥군 수산업협동조합'으로 개편되었으며, 그 본사는 현재 회진항에 위치한다.
4. 학교들
1924년에 <대덕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천관산 남쪽에 드디어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1905년에 장흥읍 사립 명진학교, 1930년에 덕도 간이학교, 1948년에 대덕동국민학교(회진초등 학교)가 세워졌다.
5. 비행기와 여객선
일제기에 비행기 조종사, '이상태, 이상민' 형제가 있었으며, 1941년경에는 '비행기(보국전남 장흥 호) 헌납'도 있었다. 일제기 1938년경 기록에는 목포와 부산을 오가는 연안 여객선이 회진항에 들렸다. 이청준 소설 <여선생, 1967> <흰옷> 등에 여선생이 타고왔다가 타고 떠난 여객선이 등장한다.
6. 6.25좌우대립
이청준 소설 <개백정, 1969>에 6.25 당시 '백정시 대'가 묘사된다. 이청준과 그 집안은 치명적 내상 을 입었다. 외갓집 몰락으로 이청준의 가난과 고 행이 시작되었다 할 것.
7. 1960년대 난민정착사업, 외지인, 김형서 공덕비
6.25 전란 후 장흥해안 일대에 난민정착 간척사업이 추진되었다. 1957년 이후에 본격화된 '김형서'의 간척사업은 장흥지방 4곳에 <김형서 공덕비>를 남겼다. 1962년경 <국토건설단>의 강제노역도 합세하였으며, 장흥 해안선을 크게 바꾸어 버렸다. 1966. 5. 30.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간척 준공 농지분배식이 있었다. 주로 황해도 옹진사람들이 간척사업에 참여했다가 떠났는데, 5년간 연 126만명이 동원되었다. 이청준 소설 <바닷가 사 람들, 1966> <침몰선, 1968> <거인의 마을, 1970> <여름의 추상, 1982> 등에 간척사업이 지나간다. 양복바지 외지인의 거친 말투, 토차(흙차), 절강(絶江)제, 방조제 붕괴사건이 나온다. 그 간척사업은 대덕사람들의 내면적 풍경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파랑새 담배, 1955~1968)와 봉 草)를 피우던 시절에 장흥지방은 온통 간척사업으로 달아올랐다. 그 농지분배를 받은 1,057명 중에 장흥 땅에 과연 얼마나 정착하였을까?
8. 소설, 눈길(1977)
1986년경 회진면 분면이 되기 훨씬 전에 발표되었다. <눈길>은 이청준 모자가 함께 걸은, 어둠 속 새벽길이다. 진목리 '뒷산 잿길' 산길구간과 '대덕 면소 버스차부'로 이어지는 신작로 구간이 된다.
9. 소설, 살아있는 늪(1979)
1980년경 대덕읍 승격 전에 발표되었다. 그 <눈길 >은 대흥면소~장흥읍~영산포로 나가는 버스길의 대흥구간이다. 새벽 4시에 대흥을 출발한 버스를 탔다. 갱엿(핏엿)을 파는 오산마을 아낙들로 짐작되는 승객들도 등장한다. 그 수렁길에 빠진, 고장난 버스와 그 승객을 두고, 그 무렵 정치적 무질 서로 빠진 우리 사회의 무기력함과 혼돈에 빗댈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버스승객 이청준이 목격한 고향 체험담의 재구성일 수 있다. 그 고장 난 버스의 승객들이 보여준 깊은 인내심과 엿 행상 아낙이 핀엿을 권하며 보여주는 달관적 여유를 옮긴 것일 수 있다. 아낙의 따스한 한마디에 "시골버스의 늪길이 일순간 살아 오르며, 그 질기디 질긴 삶의
숨결과 따스한 온기가 조용히 파도쳐 오르고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덧붙이는 말>
1) 이청준 소설에 '갯엿'이라 표기했는데, 그 시절 장흥에서는 '핏엿(핀엿)' 또는 '갱엿'을 사용했던 것 아닐까?
2) 이청준 소설에 나온 천관산 남쪽 '대흥사람들'은 '인내심이 깊은 거인'과 '키 작은 자유인'이 혼재되어 있었다.
3) 돌이켜 대흥(대덕)지방의 역사적 해안선의 실상은 어떠했는가? 이제는 사라진 바다와 갯벌에 대해 어떤 감화가 있을 수 있는가?
4) 대덕양하에서 서쪽으로 가는 고갯길에서 국토 건설단 숙소를 오래전에 보았었는데, 약 10여년 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5) 자전소설, <버려진 소년의 꿈, 강호태, 2023> -필자 칼럼 <흥업회, 간척왕 김형서의 추억, 2018, 장흥신문>을 읽고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어머니를 찾으러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갔다가 고아로 처리되어 서울 갱생원에 붙들린 상태에서 18세이던 1962년경에 장흥지방 간척사업에 강제동원이 되었다는 것. '관산외동(수동)'과 '회진 진목(신선바위 아래)'에서 10개월 강제노역을 하다가 '회진항 탱자섬'에서 목선으로 '약산도 어두리 포구'를 거쳐 그곳 여객선으로 여수항으로 탈출하였다는 내용이다. '국토건설단, 난민정착 자조사업장이 혼재되고 있다. 저자는 "그간에 너무 변하지 아니했다. 아름답게 가꾸지 못했다"고 장흥해안을 안타까워 했다.
박형상 변호사 (前서울중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