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뜨겁게 달궜던 유로 2004가 끝나고 두 달만인 지난 9월 8일,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는 2006 독일 월드컵 유럽 예선 1조 1라운드 네덜란드와 체코의 경기가 열렸다. 공격 위주의 재밌는 경기를 펼쳐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양팀은 유로 2000 토너먼트, 유로 2004 예선과 토너먼트에서 격돌하며 21세기의 신흥 라이벌로 자리 잡은 것으로도 모자라 독일 월드컵 예선에서도 다시 한 조에 속하는 질긴 인연을 보여줬다.
양팀의 인기와 실력을 반영하듯 이날 경기는 월드컵 공식 홈페이지(fifaworldcup.com)에서 문자중계를 해줄 정도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유로 2004에서 팀을 준결승으로 이끌었던 디크 아드보카트 감독이 물러나고 90년대 세계적인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던 마르코 반바스텐에게 지휘봉을 맡긴 네덜란드는 측면 공격수 자리에 신인들이 홈팬들에게 선을 보였고 이에 맞서는 원정팀 체코는 부상자들을 제외하고는 유로 2004 본선에 출전했던 선수 대부분이 선발 출장하며 서전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이날 대결에는 유로 2004에서 양팀을 대표했던 두 명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부상 중이던 네덜란드의 공격수인 공격수 뤼트 반니스텔루이와 유로 2004 이후 국가대표 은퇴 여부를 놓고 고심하던 2003 유럽 올해의 선수인 체코 대표 미드필더 파벨 네드베드(32, 유벤투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단순 부상이었던 반니스텔루이와 달리 네드베드는 결국 10월 초 국가대표 은퇴를 공식 선언하고 9일 있었던 루마니아와의 월드컵 유럽 예선 1조 2라운드 경기에 불참하면서 이를 팬들에게 확인시켰다.
네드베드: "나의 몸 상태는 더는 국가대표와 유벤투스, 두 팀의 경기를 모두 소화하긴 벅차다. 이제부터는 현 소속팀인 유벤투스를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유로 2004 조별리그 D조 첫 경기 라트비아전에서 2-1로 승리하긴 했지만 상대의 밀집 수비에 고전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던 체코는 2라운드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먼저 두 골을 내준 후 연달아 세 골을 넣으며 3-2로 역전승을 거두며 분위기를 탔고 이후 2진으로 임한 독일전에서도 2-1로 승리, 3전 전승으로 준준결승에 올랐다. 준준결승에서 북유럽의 강호 덴마크에 3-0의 대승을 거두며 우승후보 0순위로 부각된 체코는 준결승에서 돌풍의 주인공 그리스와 만나게 된다. 1980년 본선 진출 이후 24년 만에 본선 진출에 성공한 그리스는 대회 참가팀 중 최약체에 속한다는 애초 예상을 뒤엎고 준준결승에 올라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를 1-0으로 꺾고 준결승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그리스와 체코의 대결이 성사되자 많은 이들은 그리스의 돌풍도 여기서 끝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수비에 장점을 보인 그리스라고 하나 아쉽게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한 스페인과 더불어 대회 최고의 공격력을 보여준 체코를 감당하긴 어려워 보였다. 공격과 수비를 막론하고 선수 전원의 수비 가담이 인상적이었던 그리스지만 중앙과 왼쪽을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며 공수에 공헌하는 2003 유럽 올해의 선수, 네드베드가 버티고 있는 체코의 미드필드를 상대로는 그런 장점도 상쇄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뚜껑을 열자 경기는 예상대로 체코의 우세로 흘러갔다. 경기 시작 2분 만에 미드필더 토마시 로시츠키의 20미터짜리 발리슛이 골대를 맞고 나오며 아쉽게 선제 득점에 실패한 체코는 이후에도 경기를 주도한다. 그러나 40분 네드베드가 무릎 부상으로 끝내 경기를 포기하자 이후 체코의 공격은 눈에 띄게 무뎌지며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지 못했고 경기 내내 단 한 번의 유효 슛도 하지 못했던 그리스는 연장 전반 종료 직전 수비수 트라이아노스 델라스가 실버골을 넣으며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106분간의 경기에서 그리스가 기록한 처음이자 마지막 유효 슛이었다.
부상으로 경기를 포기한 후 팀의 패배를 하염없이 지켜봐야 했던 네드베드를 보며 팬들은 2002/03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을 떠올렸다. 시즌 내내 맹활약하며 팀의 결승행에 지대한 공헌을 한 네드베드는 준결승 2차전에서 받은 경고로 인해 정작 결승전에는 출전할 수 없었고 대중들이 보기에도 눈에 띄게 공격력이 약해진 유벤투스가 AC 밀란을 상대로 끝내 득점하지 못하고 승부차기로 우승을 내주는 동안 네드베드가 할 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네드베드가 도중에 빠진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그리스는 결승에서 홈팀 포르투갈마저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네드베드에겐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
네드베드에게서 유로 2004 우승 기회를 앗아간 그리스는 그의 대표 생활마저 위협했다. 그리스전에서 입은 무릎 부상은 쉽사리 낫지 않고 발뒤꿈치 통증으로 옮겨가고 있었고 9월 14일 네드베드는 언론에 대표팀 은퇴 가능성을 시사한다.
네드베드: "건강 문제가 지금처럼 나를 계속 괴롭힌다면 나는 당분간 국가대표팀 차출을 응하지 않고 유벤투스에서만 선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네드베드의 대표팀 은퇴 시사는 그의 조국 체코에는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언론과 대중들도 동요했다. 그러나 네드베드는 얼마 후 대표팀 은퇴를 기정사실로 하는 발언으로 이들을 경악시킨다.
네드베드: "대중들의 반응과 무관하게 나의 지난 발언은 아직도 유효하다. 건강 문제로 인해 나는 더는 체코 대표팀에서 뛸 수가 없게 됐다. 국가대표에서 은퇴하겠다."
83경기의 A매치에서 17골을 넣었으며 득점수로 표현할 수 없는 높은 팀공헌도를 보여준 대표팀 네드베드의 은퇴 의사를 번복하기 위해 카렐 브뤼크너 감독이 직접 유벤투스의 연고지인 투린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설득했지만 끝내 그의 맘을 돌리지 못했고 체코는 네드베드가 빠진 가운데 10월 9일 루마니아, 13일 아르메니아와 월드컵 예선 두 경기를 연이어 치렀다.
이제는 더는 금발을 휘날리며 경기장 곳곳을 역동적으로 누비는 네드베드의 모습을 체코 대표팀에서 볼 수 없게 됐다. 이번 시즌부터 세상에 둘도 없는 이 선수는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명문팀 유벤투스의 경기에만 출전한다. 다년간 유벤투스에서 네드베드를 지도했으며 유로 2004 이후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마르첼로 리피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
리피: "네드베드는 유럽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이다. 이 한마디로도 충분하겠지만 사족을 덧붙이자면 그는 인간적으로도 결점이 없는 완벽한 남자이다."
현대 축구에서 기술보다 체력이 중시된다는 것은 더는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기술은 있으나 체력과 수비가 부족한 선수를 두고 선발 출전 여부를 고민하기보다는 아예 이러한 선수를 제외하는 지도자가 더 많은 것이 세계 축구의 현주소이다. 이러한 체력 중시의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선수 중 한 명이 바로 네드베드이다.
당신은 네드베드를 어떤 유형의 선수로 분류할 것인가? 플레이메이커 혹은 측면 미드필더? 네드베드는 흔히 플레이메이커들이 많이 포진하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나 윙으로 불리는 측면 미드필더를 모두 소화할 수 있지만 두 포지션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을 네드베드에게 찾기란 쉽지 않다. 경기를 운영하는 능력은 있지만 체력과 수비력이 부족한 대부분의 플레이메이커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자신이 뛰는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 뒤에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배치되는 전술적인 배려를 받지만 네드베드가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뛴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작고 민첩하지만 힘에서는 약한 윙의 이미지도 네드베드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그가 경기장에서 윙과 플레이메이커, 측면과 중앙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선수라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의 네드베드를 만든 것은 선천적인 재능이나 기술이 아닌 후천적인 노력과 체력이었다.
경기 중 피곤한 기색도 없이 달리고 상대를 괴롭히는 그는 스스로에게도 한시의 틈을 주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다. 오죽하면 리피가 "네드베드는 잘때도 꿈속에서 달리고 있을지 모른다."라고 했을까. 작년 그는 비록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유럽 올해의 선수라는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네드베드는 이 상의 수상자가 흔히 그렇듯 매끈한 기술로 대표되는 선수라기보다는 팀을 가장 우선으로 하는 성실한 선수에 가깝고 이는 네드베드 본인도 인정한다.
네드베드: "사실 나는 그다지 볼 것이 없는 선수이다. 라울이나 피구, 지단과 베컴처럼 우아한 경기를 하지도 못한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열정을 가지고 남보다 더 많이 뛰고 싸워야 했다."
"팬들의 성원이 고마운 이유? 때론 지치고 힘들어 최고가 되고자 하는 내 마음 속 열망이 꺼지려 할 때 내게 힘이 돼주기 때문이다."
팬들의 성원마저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고맙다는 이 선수는 경기장 밖에서도 그의 걸맞은 생활을 하고 있다. 21살에 결혼한 부인 이바나 사이에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딴 파벨과 이바나라는 아들과 딸이 있는 네드베드의 사생활은 흔히 화려한 생활로 구설에 오르는 유럽 축구스타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검소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1996년 세리에 A에 첫 발을 디딘 후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는 이탈리아에서도 그는 오직 축구와 관련된 이야기로 화제에 오를 뿐이다. 이탈리아의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네드베드의 꿈을 알고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그의 축구 사랑은 축구라면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이탈리아에서도 유별난 모양이다. 대표팀에서 은퇴한 그의 마지막 꿈은 바로 지난해 문턱에서 아쉽게 좌절한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다.
네드베드: "국가대표로 뛰며 단 한 번의 우승도 못했으며 특히 본선무대조차 밟지 못한 월드컵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은퇴하기 전까지 내가 이루지 못한 또 다른 대회의 우승에 도전할 것이다. 유벤투스 선수로 챔피언스리그에 우승하는 것, 그게 바로 지금 나의 소망이다."
지난 시즌 선두 AC 밀란과 승점 13점 차의 3위에 머물며 다소 부진했던 유벤투스는 네드베드의 소속팀 전념과 함께 명장으로 정평이 난 이탈리아 출신 감독 파비오 카펠로, 리그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꼽히는 브라질 대표 에메르손을 동리그의 AS 로마로부터 영입하며 전열을 정비한 이번 시즌 쾌조의 출발을 보이고 있다. 지난 6일 레지나에게 덜미를 잡히며 무패행진이 끝나긴 했지만 리그 10경기와 챔피언스리그 4경기를 치르며 25점을 넣고 단 네 점만을 내주는 안정된 전력으로 세리에 A와 챔피언스리그에서 모두 우승 후보로 거론 중이다. 주득점원 중 한 명인 프랑스 대표 공격수 다비 트레제게의 장기 부상이 악재이긴 하지만 지난여름 영입된 스웨덴 대표 공격수 슬라탄 이브라히모빅이 빠른 리그 적응을 보이고 있으며 내년 1월 겨울 이적 시장에서 주전급 공격수 한 명을 임대나 이적으로 데려온다면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네드베드는 15년의 프로 생활동안 많은 영광을 얻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좌절도 겪었다. 94년 A매치에 데뷔한 이래 10년을 대표로 뛰었지만 끝내 유럽선수권이나 월드컵 우승을 하지 못한 채 은퇴를 선언한 그가 2006년 6월까지로 되어 있는 유벤투스와의 계약기간 동안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마지막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네드베드에게는 한 시즌 반밖에 남지 않았다.
파벨 네드베드 (Pavel Nedved)
176cm 70kg (국제축구연맹 자료)
포지션: 왼쪽/중앙 미드필더
1972년 8월 30일 구 체코슬로바키아 헤브 출생. 현재 만 32세
국적: 체코공화국
현소속팀: 유벤투스. 2006년 6월 30일까지 계약.
국가대표: A매치 83경기 17골. 1994년 6월 5일 아일랜드전(1-3패)에 데뷔, 유로 2004 후 은퇴.
소속팀
1990-91 스코다 필센 (체코)
1991-92 두클라 프라하 (체코) 리그 19경기 3골
1992-96 스파르타 프라하 (체코) 리그 97경기 23골
1996-01 라치오 로마 (이탈리아) 리그 138경기 33골
2001-현재 유벤투스 (이탈리아)
주요 경력
체코 감부리누스리가 (1부리그) 우승 3회 (1993-95)
체코 FA컵 우승 1996년
유럽선수권 본선 출전 3회 (1996-2004), 준우승 1996년, 준결승 진출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