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과거의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과거에 대한 후회보다는 죄책감 또는 분노가 더 크게 자리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분노는 억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으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 자극을 받으면 마치 도화선에 불을 댕긴 것과도 같게 되지요. 과거의 사건에 따라서 그리고 당한 기간에 따라서 폭발력은 비례하여 나타날 것입니다. 본인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 폭발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잘 모르다가 사고가 일어나서 원인을 추적하면 그제야 본인도 깨닫게 됩니다.
성장하며 가족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는 평생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화기애애하고 좋은 관계였다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폭력관계입니다. 자녀에 대한 폭력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폭력도 문제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어떤 영향을 드러낼지는 당시로서는 모릅니다. 크게는 두 가지 방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아비의 행태를 그대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쪽이 많이 나타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쪽이든 저쪽이든 공통적으로 분노를 품게 되지요.
분노는 내재되어 있는 폭탄입니다. 공동체 속에서 사람을 만나 교제할 때는 숨겨져 있는 분노를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고 자신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느 쪽도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발견되고 깨닫게 되면 치유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될 테니까요. 남자와 여자 양쪽이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습니다. 여자는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애씁니다. 반면 남자는 이미 도망하여 나왔습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두 사람의 걸림돌이 됩니다. 떠나려는 여자와 남으려는 남자와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나 사랑이 승리하지요.
실연의 아픔을 잊으려 자학에 빠진 그 남자를 찾으려고 모아놓은 학자금을 날리며 찾아온 여자는 자기만큼의 희생을 청합니다. 떠나자. 같이 그곳을 떠나자는 것입니다. 여자의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 남자는 함께 할 것을 동의합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진다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니까요. 문제는 ‘어떻게?’입니다. 이동 수단은 경비행기뿐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비용을 써버렸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지요. 각자 가지고 있는 슬로모빌을 가지고 움직이기로 합니다. 알고 보면 무모한 짓입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자. 자유를 향해. 젊음과 사랑이 있으니 무엇이 두려우랴? 그 시절 누구나 가져볼 만한 용기요 오기이고 만용입니다. 그러나 떠나야 하겠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나는 여행입니다. 가장 행복한 여행,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 아닙니까? 눈으로 덮인 들판과 얼어있는 강물, 추위도 두 사람의 사랑의 열기를 식히지 못합니다. 어느 날 밤, 잠에서 깨어 텐트에서 나와 바라보는 하늘에는 오로라가 장관을 펼칩니다. 사진으로 담아 함께 보며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그들만의 세상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때로 세상이 위험하지만 그러나 그 세상을 벗어나는 것도 위험하지요. 이런 저런 위험도 헤쳐 가며 나아갑니다. 모래 세상이 아닌 눈 세상에서 때 아닌 사람의 도움도 받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니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각자 자기 길이 있으니까요.
어쩌다 나타나는 백곰은 청년의 자아라고 여겨집니다. 일종의 ‘자기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이서 대화를 합니다. 즉 스스로 생각해보는 겁니다. 때로는 상처 입은 자아이면서 때로는 되고 싶은 자아입니다. 그래도 그런 자아를 가지고 대화한다면 치유와 성장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곰이 여자에게 발견됩니다. 여자가 깜짝 놀라 총으로 사살하려 하지요. 청년이 극구 말립니다. 사실 상대방의 숨겨진 또 다른 속사람을 발견할 때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물론 때로는 경이로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두렵기도 하지요. 참모습을 확인한다는 일은 양극에 있습니다. 기대와 기쁨일 수도 있고 반대로 불안과 두려움일 수도 있으니까요.
위기와 위험을 벗어날 때의 환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고도 먼 여행을 감당하기에는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빈약합니다. 지나오면서 강물에 빠져 죽은 순록의 행렬을 보며 그들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불행하지는 않았던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하며 가는 길이었으니 말이지요. 그 누가 인생을 비교하며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나 바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은 시간입니다. 아름다운 설경 속에서 잠깐 동안 피워본 사랑입니다. 영화 ‘투 러버스 앤 베어’(Two Lovers and a Bear)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