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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을 이루는 물질
-제 5 장-
공덕(功德)
2001년
"공덕(功德)이 많으십니다."
"이목구비(耳目口鼻), 귀, 눈, 입, 코의 상이 뚜렷하면 운대(運臺)가 강하니, 뜻하는 바 노력하면 취하지 못할 것이 없겠습니다."
대한민국 정규 퇴근 시간 6시가 지난 종로 3가의 번잡한 거리를 지나가던 영어출강 세일즈맨 이호경은 난데없이 길거리 도인 두 사람이 불쑥 길을 막아서자 당황하고 불쾌한 듯 두 눈살을 찌푸리며 빠른 속도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한참 속보로 종로3가 전철역 앞에 도착한 그는 빠른 속도로 계단을 디딪다가 계단 반쯤 내려와서 뒤로 고개를 돌렸다. 길거리 도인 두 남녀는 계단 앞에서 멀뚱이 서서 사라지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가방에 넣어두었던 조간 신문을 펼치며 꼼꼼이 살피기 시작했다. 약간의 편집증 습관이 있는 그는 그의 노트를 꺼내 중요한 기사거리를 오려서 보기좋게 스크랩했다.
그리고 기사를 하나 하나 모을때마다 떠오르는 절친한 친구 한 명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도진, 그와 오래전에 나누던 대화들이 늘 그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군제대를 한 이호경은 주요기사들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1999년도에 가장 굵직한 사건과 그가 관심가지는 일련의 현상들을 연구하여 그의 만화에 소재로 삼기 위함이었다.
1월 1일 유로화 도입, 2월 12일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로 소 영롱이 탄생, 3월 16일 세계 최초로 삼성전자가 256M D램 양산체체 돌입, 4월20일 이순신 묘지에서 말뚝과 칼 발견, 그리고 8월 에볼라 바이러스가 독일에 출연한 일과 더불어 16일 대우그룹 해체소식, 그리고 8월 17일 오늘 터키에 진도 7.8의 도 발생, 3만여 명 사망 사건 기사들은 공통점이나 연관성은 크게 없지만 앞으로 찾아오는 새천년인 밀레니엄 21세기에 앞서 20세기 막바지에 벌어질 일들에 대한 궁금증을 향한 그의 열망 담고 있었다. 또한 일련의 사건에 대한 그의 의견을 사설로 작성한 뒤 일요일 마다 혜화동의 민들레영토카페에서 모이는 '작은 언론인 모임'에 참석해서 그의 사설을 발표자료로 쓰곤 했다.
1999년 8월 21일 토요일 민들레영토
민들레 영토는 주말마다 모임을 할 수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카페였다. 녹차나 커피를 시키면 셀프로 가져와야 하지만 커피값만 내면 장소는 무료로 제공되고 적절한 시간동안 클럽, 스터디,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넓직한 테이블에 녹차는 무한 리필이 가능했던 그 카페는 근 4년간 그들의 모임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호경의 작은 언론인 모임은 그가 성균관대학교 재학 시절 신문방송학과를 전공의 박도진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영어영문학과를 전공한 호경은 영어스터디를 병행하며 언론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주고 받으며 두 사람만의 특별한 모임을 몇년동안 연이어왔던 것이었다.
박도진은 대학시절부터 신방과 정규과목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의 관심분야에만 집중하여 군제대 후임에도 아직까지 졸업도 못하고 휴학생으로 남아서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물론 간혹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의 용돈을 벌고는 했지만 그는 매일 같이 신문에서 발행하는 기사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는데 열정을 다하곤 했다.
박도진은 그날역시 새로운 게스트를 모셔왔다.
오랜 만에 회원이 3명이 모였다.
"너는 학교도 안 다니면서 매일 학교 주변 얼쩡거리며 뭐하냐? 니 후배들 한테 너의 그 독특한 세계관을 세뇌 교육시키냐?"
호경이 농담반 진담반 섞어서 인사를 대신하자 박도진이 실실 웃으며 그의 질문에 맞섰다.
"얌마! 4년동안 한번도 빠짐없이 모여서 나한테 세뇌당했던 니가 그런말 할 자격이 있는거냐?"
"내가 무슨 세뇌를 당했다고?"
그때 약속시간에 약간 늦은 새로운 맴버가 나타났다.
갸름한 얼굴에 둥그런 눈망울을 가졌고, 키는 한 170미터 정도 되는 여학생이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호경은 웨이브 머릿결이 출렁이며 인사를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안녕하세요? 전 99학번 신방과 장영지라고 합니다."
호경은 가슴에 심장이 벌렁거리자 태연한 척하기 위해 그의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장영지가 당차게 자리에 서서 두 사람에게 뚜렷한 그녀의 가치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선배님의 모임의 목적이 언론까뒤집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선배님의 의견에 동의하며 오늘부터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제가 오늘 정한 주제가 며칠전 신문에 대우그룹이 완전 해체되었다는 소식에 대한 것이며 왜 대우그룹이 해체가 됐는지에 대한 집중탐구를 하려고 합니다."
박도진이 겨우 자세를 가다듬고 그녀의 발표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모임을 끝마친 세 명은 저녁에 혜화동 먹거리 호프집에서 다시 뭉쳐 뒷풀이를 위해 시원한 맥주를 시켰다. 토요일이라서 호프집은 만원장사에 왁자지껄 북새통이었다.
한참 골뱅이무침 안주와 함께 맥주를 마시던 그들은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그들이 몰입하던 언론 문제에 대한 이어달리기를 했다.
"아이엠에프가 터진건 그게 다국적 기업이 우리나라의 기업을 송두리째 거머쥐려고 한거라고. 이제 점점 한국인의 기업이 몰락하고 외국기업이 기승을 부리며 언젠간 우리나라를 송두리 째 집어 삼키려할 거라고... 이런 세상에 대학을 졸업해서 뭐하고, 직장을 다녀서 뭐하냐? 암울하기만 한데...""
약간 취기가 섞인 도진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지자 이호경은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그의 말을 되받아쳤다.
"얌마, 좀 긍정정으로 생각해봐 우리나라가 망할 나라냐? 한국인의 근성을 생각하고 그 놈들이 쳐들어와도 우리가 반드시 다시 내몰아 버리면 된단 말이야. 걱정하지 말고 대학이나 졸업해서 실력을 기를 생각을 좀 해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실력을 길러놓아서 그들에게 맞서면 되는게 아니겠냐?"
"호경, 선배말이 맞아요. 우리가 놈들을 이용하면되요. 우리나라에 와도 결국 한국인화 시켜버리면 되잖아요. 그들이 나쁜 의도로 들어와서 대우같은 좋은 기업을 몰살시켰다해도, 삼성은 건재하잖아요."
"그래, 삼성은 D램 반도체를 최초로 개발해서 한국 반도체 사업을 육성시켰어. 이제 한국이 세계의 중심에 서는 초석을 마련한 셈이라고."
도진은 약간 기분나쁜 듯 호경에게 손가락 질을 하며 말했다.
"이자식이, 삼성이 뭐 대단하다고, 그 매국 앞잽이 자슥들이... 니들이 기업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면 당장 회사 때려치고 대학교 그만둬야 할거다. 우리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세상에 살고 있는지 말면 말이다. 내가 말을 다 안 해서 그렇지 나도 다 생각하는게 있는 사람이야. 너희들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그것말이다."
호경은 수년동안 모임을 가지며 박도진으로부터 듣지 못한 어떤 비밀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술만 마시면 말하는 무서운 세상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왜 그가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그 이야기가 무엇일까, 그를 만날때마다 던지는 화두같은 말들이 그의 궁금증을 증폭시키곤 했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그가 말하는 위태로운 그 무엇을 꼭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술과 이야기가 흐르는 동한 벌써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 사람은 4호선 전철에 몸을 실었다. 장영지는 한성대입구에서 내리며 도진과 호경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영지가 내리자 마자 호경은 도진에게 그 동안 참았던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넌 왜 맨날 위험한 세상이니, 상상하지 못할 현실이니 하면서 늘 그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거냐?"
도진은 불현듯 호경의 질문에 놀랐고, 술로 취해 붉어진 얼굴에서 터질 듯한 흥분과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받아들이는 진실과 네가 받아들일 진실은 매우 다른 것인데, 궂이 알아야 할 이유가 있는거냐?"
"그래, 네가 받아들이는 심각한 세상이 뭔지 좀 말해봐라. 내가 눈씻고 찾아도 알수없는 세상에 대해서 말이야."
"좋다. 그동안 관심이 없이 방관했던 현실을 폭로하마."
그때 전철 역이 수유역을 가리키자 도진은 문이 열리는 동시에 호경의 등을 떠밀며 전철 밖으로 몸을 옮겼다.
놀란 호경은 자신이 수유역에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상계역이 집인 도진을 걱정했다.
"너는?"
"한잔 더해야지. 그리고 니네 집에서 재워줘."
한참 고민하던 호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수유역 밖으로 나와 도로옆에 있는 포장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도진과 호경이 내린 4호선 전철의 많은 빈 좌석 가운데 술에 취해 쓰러진 또 다른 박도진이 곤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오뎅 안주와 꼬치, 그리고 소주를 시킨 도진은 먼저 나온 쌀과자인 일명 뻥튀기를 주워먹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하는 말에 토달지 말고 잘들어. 조금 이상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물어보고... 하지만 니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인간들의 주장으로 만들어진 세상이니까 말이야.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방관자이며, 무능력자임을 먼저 고백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무슨 긴 이야기라도 되는 거냐?"
"그래, 아주 긴 이야기이지, 내가 겪은 이야기를 너에게 말하는 것은 너도 반드시 겪게될 것이기 때문이야. 그러니 섣불리 생각하고 판단하면 큰 오해와 오산을 일으킬 것이야."
"꼭 협박이나 경고를 듣는 듯한 기분이군. 그것을 꼭 내가 겪으리라는 법있나?"
"이야기를 듣지 않고서는 이해할수 없는 법이지."
"거참, 궁금해지는군..."
도진은 소주잔을 한번에 들이킨 뒤 숨을 한번 크게 쉬며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천지개벽이라고 들어봤냐?"
도진이 질문을 해오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호경이 고개를 가로 젓으며 대답했다.
"잘은 모르나 그냥 어디서 많이 들어본듯 하다."
"최초에 수운 최제우 선생이 했던 말이지, 세상이 완전 뒤집히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예언이야. "
"그래서 그 천지개벽이 있을 거란 말이냐? 니말은?"
"아니, 그 반대다. 우리는 모두 천지개벽으로 2017년에 모두 죽었다."
도진으로부터 허를 찌르는 엉뚱한말들을 수차례 들어왔던 호경에게 몽환속 대사 같은 그의 말은 그닥 낯선 것이 아니었다.
"아니, 내말은 지금이 1999년인데, 왜 우리가 2017년에 죽었냐, 이말이다. 너는 지금 과거형을 미래시점을 두고 사용하고 있잖아.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두고 그때 모두 죽었다, 라고 결론짓는건 좀 무리아닌가?"
"그래, 하지만 네가 지금 말하는 미래시점이 바로 내가 말하는 과거란 것이다."
호경은 박도진의 공상과학소설 같은 이야기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또한 도진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그것의 모순점을 찾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도진 역시 호경이 완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리라 확신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진심으로 물어오기에 그대로 답을 전해줄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1999년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2017년에 멸망하는 것이네? 그것참 다행이다. 아직 십칠년은 더 남았으니까."
"그래, 많은 예언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1999년 멸망설에 대해 의논하는 이유는 1999년이 바로 20세기의 마지막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양력의 20세기의 마지막은 원년으로 시점을 두면 정확한 마지막을 뜻하지 않아. 세기를 음력으로 셈한다면 2017년이 20세기의 마지막이며 그 이후가 진정한 밀레니엄의 도래라고 볼수 있지.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한 밀레니엄은 도래하지 않았다."
호경은 '소설 좀 그만 써라', 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계속 맴돌았지만 그토록 진지해보이는 도진에게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네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이건 정말 보통 혼란스러운 이야기가 아닐텐데..."
"어떻게 인류가 다 멸종했는지 궁금하지 않냐?"
"어떻게 멸종했는데?"
"바이러스."
"바이러스?"
"바이러스 이후 대지진이 곳곳에서 벌어졌지고, 이상기후 현상으로 세상이 완전히 눈으로 뒤덮혔지. 식량도 물도 없는 우리는 모두 굶어 죽고 말았어."
호경은 침을 꿀꺽 삼키며 더이상 말이 막혀서 질문을 할 수없었다.
"네가 믿거나 말거나 분명 그 현실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야. 우리가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이상은 말이야."
"구, 궁극적인 목적?"
"신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지."
"그것이 무엇이지?"
잠시 정적이 흐르며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도진은 더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호경은 아직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대답은 해줘야 할 것 같았다.
"평화, 세계 평화, 인류평화, 뭐 그게 신의 목적이지."
호경은 도진의 말에 약간 김새는 듯 약간의 아쉬움을 보였다.
"신의 목적은 평화라... 그럴듯하네."
전철 역 앞 포장마차에서 기울어가는 술잔에 테이블 위에는 어느새 다섯 개의 빈 소주병이 덩그러니 남았다. 이미 시침은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인적은 점점 드물어갔다.
박도진은 초저녁 노을이 지는 하늘을 구경하고자 그가 사는 주공아파트 앞으로 산책을 나섰다. 붉은 노을이 하늘에 물들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산 뒤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눈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후폭풍이 밀려오자 박도진은 급하게 집 앞 도로 위에 있던 버스 위로 올라탔다.
무시무시한 후폭풍이 밀려오며 온 사방을 삼키기 시작했다. 박도진은 버스의 시동을 걸고 전속력으로 후폭풍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검은 연기와 불기둥이 삼시간에 버스를 덮쳤다.
도진은 눈을 감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도진은 이불을 걷어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간밤의 꿈을 되새겼다. 그는 꿈꾸는 순간만은 정말 당장에 죽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주말마다 장영지와 함께 이호경은 개근상이라도 탈 기세로 민들레 영토에 출석했다. 특히 호경은 영지를 보기위해서라도 반드시 모임에 참석해야만 했다. 이미 호경의 첫눈에 영지는 그의 가슴속에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호경을 바라보는 도진은 오직 답답한 마음 뿐이었다.
"야, 이호경, 넌 이제 이모임이 지겹지도 않냐?"
"왜? 뭐가 불만인데? 넌 지겨우면서 왜 계속 출석하냐?"
순간 어떤 말을 하다가 실언을 한듯 박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호경아, 미안하다. 오늘부터 이 모임 그만두자."
갑작스런 도진의 발언에 놀란 호경은 잠시 말을 잇지못했다. 옆에 서 있던 장영지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에요? 오빠! 그만둔다니요?"
도진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희들끼리 해. 나는 오늘부터 빠질께. 그동안 즐거웠다."
도진은 두말하면 우스워질 것 같아 곧장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카페를 빠져나갔다. 멍한 표정의 호경은 떠나는 도진의 등을 향해 무슨 말이 해야할 것 같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계속 이상한 이야기를 꾸며내며 소설을 쓰더니, 내 예상대로 정신이 나간게 분명해."
장영지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균관 대학교 방송학과를 중퇴한 도진이 무슨 일때문에 학업을 그만 두었는지 알길이 없다. 어렵게 공부해서 가기 힘든 성균관 대학교에 입학해서 결국 선택한다는 것이 자퇴라니, 도저히 호경의 입장에서는 납득이 안가는 일이었다. 매일같이 술만 퍼마시며 이상한 소리만 지껄이고, 이제는 아얘 자신이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행동하며 세계가 멸망하니 뭐니 하는 허튼 소리나 늘어놓기까지 했다.
그저 호기심 삼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했던 것이었지만 그가 지나치게 호경을 믿은 탓이었는지, 그의 미친 사람같은 발언 들을 호경은 더이상 받아줄수만은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제 이미 헤어진 마당에 연락도 안되는 도진을 궂이 더 생각하고 찾아볼 여유가 없었다. 도진과의 엉뚱한 언론인의 모임은 이제 쫑이 난 마당에 더이상 장영지와의 만남을 지속할 명분이 없었다. 호경은 영지에게 고백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안 떨어졌다. 결국 두 사람의 인연도 거기에서 시간이 멈춘듯 끝나버리고 말았다.
2년 후
2001년
출강팀인 호경은 회사에서는 이대리로 통한다. 입사한지 육개월도 안 된 신입이었지만, 영업력이 뛰어난 그는 초기부터 기선제압에 들어가 여러개의 업체로부터 컨펌을 받은 터였다. 영어실력은 물론이거니와 경쟁자인 기독교인 이삭 주임과 젊은 유부녀 오연지씨를 제치고 그가 고속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퇴근길에 호경은 왠지 심심했다.
"영화나 볼까?"
그러나 그에게는 함께 영화볼 여자친구가 없었다.
그는 종로3가에 있는 서울극장으로 향했다. 그는 영화 매표소 앞에서 여러가지 영화들의 구경했다. 그때 특이한 영화가 한개 눈에 띄었다.
그해 수많은 관객수를 기록했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였다.
호경은 영화관람 후 정신이 몽롱하여 아직도 영화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실례좀하겠습니다."
갑자기 한 여인이 느닷없이 호경의 팔을 붙잡고 말을 걸어왔다.
"누, 누구세요?"
그는 당황했지만 입가에서 행복의 미소가 흘러나왔다.
"인상을 보니 운대가 참 크시네요."
"네? 운대가 크다고요? 제가 무슨?"
"복이 많게 생기셨다고요."
"아니, 초면에 왠 칭찬을 다..."
"칭찬이 아니라 도인으로서 관상을 보고 말씀드리는거에요."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매일같이 길거리에서 지나갈 때마다 튕기고 지나가는 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그날은 발을 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를 본 순간 그는 그녀에게 홀려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기나 도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대꾸에 그녀는 갑자기 날카로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언제 기나 도에대해서 관심있냐고 물었어요?"
당황한 그는 다시 말했다.
"제, 제말뜻은 저는 도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도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냔 말입니다."
허를 찌르는 그녀의 대꾸에 호경은 더이상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
"어쨌든 죄송합니다. 이만 실례를..."
호경은 그의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왜 얘기를 하다가 말고 가세요?"
그녀가 쫓아오며 말을 계속 걸었다. 호경은 재빨리 지하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한참 그녀를 따돌린 뒤 금방 도착한 전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다시한번 닫혀버린 지하철 문 밖으로 그녀가 따라왔는지 확인했다. 플랫폼을 모두 지나간 지하철 문 밖은 온통 검었다.
수유역에 도착한 호경은 전철에서 내려 역 8번출구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또 그의 팔을 누군가 붙드는 것이었다.
"이봐요. 도에 관심없다니까요."
수유역 8번출구 앞에 내린 도진은 곧바로 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중이었다. 문득 낯익은 모습이 불현듯 스치는 느낌을 받은 도진은 곧장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계단을 딪고 올라가는 그는 다름 아닌 호경이었다.
"이호경, 나야 임마, 내가 언제 도에 관심가지라고 했냐?"
"박도진, 네가..."
실로 몇개월 만에 만난 것이었다.
"누나와 북한산에서 운동하고 오는 길에 노원으로 가려다가 널 봤지뭐냐. 그래도 친구인데, 지나칠 수 있나, 서로 싸우고 안보는 사이도 아니고말이야."
호경은 갑자기 특별한 이유도 없이 모임을 해체한 도진은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얌마, 그건 그렇고, 갑자기 모임을 해체하고 그렇게 기분나쁘게 가버리면 내 입장이 뭐가되냐? 전화 한통화 없고? 그게 친구로써 할 짓이냐?"
"미안하다. 그때는 내가 상태가 몹시 안 좋았어. 재학할 기분도 안들었고, 모든 것을 놓고 싶은 심정이었거든. 네가 피해를 줘서 더 미안할 뿐이다. 용서해라."
"뭐, 네가 용서를 받을 정도로 잘못한 것 없지. 어쨌든 사정이 있었다니, 이해할께. 그래도, 현실 감각을 잃지 마라. 천지개벽이니 2017년에 멸망한다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에 빠져살지말고."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런말을 했다고..."
"장영지가 우리 모임에 처음 온 날 네가 나에게 한 얘기 기억 안나? 2017년에 바이러스와 대지진으로 세계가 다 사라졌다고..."
"난 그런 소리를 한적이 없는데?"
"그날 장영지와 한잔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유역 앞 포장마차에서 한잔 한거 기억안나?"
"얌마, 무슨 소리야. 그날 넌 수유역에 내리고, 난 노원으로 바로 갔잖아."
"이게 또 무슨 소리야? 그럼 내가 귀신에게도 홀렸단 말이야?"
"난 절대 너와 2차를 한 기억이 없는데. 그리고 그런 이상한 이야기도 한적이 없고..."
"네가 하도 부정적인 소리만 하고 다녀서 궁금해서 도대체 그 복잡한 심경이 무엇인지 물어본 것 아니냐? 그날 네가 분명 세계가 1999년이 아니라 2017년에 개벽한다고 말했잖아."
"믿을 수가 없군. 난 그런 생각도 해본적이 없는데... 물론 1999년에 멸망하지는 않을까 기대는 해보긴 했어도."
"참나. 그럼 그때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서 푸념만 하고 학교도 때려치고 모임도 해체한 건데?"
"사실은..."
"..."
"사실은 세계의 복잡한 사정때문에 그렇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이 안가는 세상 때문에..."
"자세히 말해봐 네가 무슨 소리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알고, 느끼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모두 가짜라는 것이지."
"이런 또 너의 그 개똥철학사상이 나오는군."
"아니, 진짜가 있지만 거짓에 가려진 것이 많다는 거야. 쉽게 한가지의 경우만 말하자면 말이야."
"말하자면..."
" 실제로 국가를 다스리고,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는 정부가 아니라 자본을 이끄는 자들이지. 소위 상위 1%에의해 세상이 좌우되고 있다는 말이야."
"그, 음모론 나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음모론으로 치부되는 그 사실이 바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난 그것때문에 학교도 그만두고 오직 무술에만 전념하며 살고 있는 것이야."
"무술? 무술은 배워서 어디에 써먹게?"
"나를 비롯해, 내 가족과 가까운 이웃, 그리고 함께하는 모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야."
"그거야 빛좋은 개살구라 명분만 좋다 뿐이지 결국 남을 해하는게 무술이 아닌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고, 요즘에는 건강을 위한 운동으로 하는 사람도 많아.너무 지나치게 파고들지 말아죠. 다 나름대로 뜻이 있으니까."
호경은 자신이 도진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도 애매할 지경이었다. 분명 도진과 한잔을 하며 도진의 그 천지개벽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는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호경 자신이 잘못된 기억속에 사무쳐 있는 것이란 말인가. 왜 이제서야 도무지 이해할 길 없는 딜레마에 빠져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갔다. 지난 과거도 들출 필요가 있는 것이 있지만, 지금의 이야기는 그냥 적당히 그러려니 하며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기억이나 추억은 기록으로 남지만 대체로 잊혀지는 것이 다반사라 역사라해도 진위에 대해서는 아무도 판가름 할 수 없는 것이다.
"근데 정말 넌 그때 나랑 했던 이야기를 기억 못하는 거냐?"
"많은 얘기를 했지만 글쎄 종말론을 거론한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잠시간의 담화를 나눈 두 사람은 종종 연락을 취하자는 약속과 함게 헤어졌다. 호경은 깊은 상념에 빠진 채 천천히 집으로 향해 걸어갔다. 그는 집 대문 앞에서 문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건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실례좀하겠습니다."
깜짝놀란 호경은 등을 돌리며 둥그런 눈으로 갑자기 또 말을 거는 여인을 보았다. 정신이 없는 그를 더욱 몽롱하게 만든 것은 금방이라도 빠져버릴 것 같은 그 여인의 큰 눈동자였다. 정결하게 수놓은 듯한 쌍거풀에 동그란 얼굴, 그리고 작은 입술은 호경의 정신을 더욱 비현실 속에 가둬놓는 듯했다.
"누, 누구세요?"
그는 당황했지만 입가에서 행복의 미소가 흘러나왔다.
"인상을 보니 운대가 참 크시네요."
"네? 운대가 크다고요? 제가 무슨?"
그런데 그 순간 도진은 그녀가 결코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영지?"
"어머?"
아는 사람을 만난 장영지는 부끄러운듯 금새 내달음 치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영지씨."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매일같이 길거리에서 지나갈 때마다 튕기고 지나가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영지씨, 잠깐만서봐요. 뭐가 부끄러워서 그렇게 도망치나요? 뭘 잘못하셔서..."
그가 무엇을 잘못했냐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잘못했냐뇨?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잘하고 있는 거죠."
당황한 그는 다시 말했다.
"제, 제말뜻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절보고 달아냐냔 말이었죠."
호경은 영지를 커피숍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렇게 심각한 관계도 아님에도 호경은 그녀를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수도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2년전에는 그저 학생이었잖아요."
"그건 2년전 일이었죠. 대학을 중퇴했어요. 제게 맞는 일은 실지공부랍니다."
"실지공부가 뭡니까?"
"글공부가 아닌 마음공부를 실지공부라고 하지요. 전 천도교에 들어왔어요. 옛 동학아시죠?"
"아, 그 개벽사상을 펼치는 곳?"
그는 곧 도진의 2017년에 개벽으로 세계가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혹시 도진또한 천도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호경은 영지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를 따라가게 됐다. 그리고 제사의 절차를 빌어 절도 하고 음식도 올려서 조상전에 정성이라는 것을 드리게 됐다.
그리고 음복 후 영지와 헤어지며 다시 찾을 것을 약속했다.
높은 하늘 위로 펼쳐진 희뿌연 구름들이 온 세상을 흐릿하게 물들어 놓았다.
마치 화선지에 붓을 칠한 듯한 구름끼고 황혼이 물든 초저녁의 하늘은 고즈넉한 운치를 자랑한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나른한 초저녁 노을의 하늘 아래 바닷가 백사장 나무 사이에 누울 수 있게 만들어 해수욕장 비치의자 하나가 보였다.
그 해수욕장 의자 위에는 한 남자가 트렁크 수영복 차림으로 누워서 썬그라스를 낀 채 선탠을 즐기고 있었다.
이호경은 밀려오는 잠을 음미하며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파란 바다 위 희뿌연 구름들 사이를 응시했다.
그의 흐릿한 시선 속에서
먼 하늘 바다 위로
길쭉한 구름 꼬리를 형성한 한 개의 혜성운(暳星雲)이
천천히 바다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호경은 약간 놀란 듯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혜성이 떨어지는 바다의 주변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잠시 후 멀리서 혜성이 지구의 해수면과 부딪히는 거대한 파도의 굉음이 들려왔다.
쿠르릉
해수면과 혜성이 조우를 하는 그 순간
땅이 갈라질듯 거대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구르르르르르르르르
그는 멀리서 보이는 바다의 수평선 수면이 평상시 보다 몇배 가량 높아져 있음을 깨달았다.
높아진 해수면으로 바닷물이 안쪽으로 거칠게 넘치기 시작했다.
호경은 정신 없이 해변을 뛰며 최대한 바닷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순식간에 거대한 파도의 아가리가 치솟아 올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밀려오는 거대한 해일의 속도에 비례해 한치의 간격조차 벌이지 못하고 있었다. 해안선으로 향해 거칠게 밀려오는 해일은 대도시의 왠만한 고층 빌딩조차 삼킬 듯한 기세였다. 무시무시한 규모의 해일이 서산으로 넘어가는 태양을 가리며 해변을 집어 삼켰다.
해일에 휩쓸린 호경은 그 순간 눈을 감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간밤의 꿈에 벌떡 일어난 호경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지금껏 태어나서 그렇게 무서운 꿈을 꾼적이 없는 그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회사에 출근한 호경은 퇴근길에 장영지가 있는 천도교당에 들렀다. 그는 영지로부터 다양한 개벽사상을 듣고, 최수운의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찾아간 절대적인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영지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영지와 연락을 끊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영지는 수도생활을 그만두고 포항의 호텔로 취직을 했다. 그 소식에 놀란 호경은 그녀를 따라 포항으로 갈것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몇날며칠의 고심끝에 그는 영지의 뒤를 따를 결심을 세웠다.
어두운 밤 백사장의 방파제 위에 놓인 십층 남짓한 U자 모양의 호텔은 성난 파도가 거칠게 넘실거리는 포항의 동해 앞 바다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새벽 3시경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서 야간 업무를 보고 있던 장영지는 프론트 현관 밖으로 번쩍이는 거대한 섬광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밖의 상황에 대한 호기심에 잠시 프론트를 벗어나 현관 밖으로 나갔다. 추적추적 떨어지고 있는 빗물 앞에서 영지는 기분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주위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더니 검은 하늘 위로 천장에 금이 가듯 번개가 대각선 모양으로 바다를 향해 길게 뻗쳐내렸다.
"어멋!"
놀란 영지는 가슴 한쪽에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천둥소리가 하늘을 울리자 프론트 사무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박용식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사무실 문밖으로 나갔다. 프론트 데스크 안에 영지가 보이지 않자 의아해진 영식은 문득 어두운 현관 밖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뿔테 안경을 고쳐 잡으며 현관 밖을 응시했다.
갑자기 밖이 환한 섬광으로 가득 차오르는 동시에 한 여인의 모습을 한 검은 그림자가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한 3초간 번개의 섬광이 연타로 번쩍이자 떠있는 여인의 모습이 훤히 비춰졌다. 그녀가 장영지라는 것을 알게된 박용식은 그만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장영지의 몸은 마치 새의 날개를 단듯 가벼워 보였고, 얼굴빛은 하얗게 질린데다가 눈가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야간 업무가 끝난 영지는 숙소로 돌아와 갑자기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주 보던 책은 '제우강'과 동학, 천도교에 대한 책을 소중히 보자기에 싸서 가방에 넣었다.
그날 장영지는 본사에서 오양조 회장의 비서로 승진됐다는 통보를 받게됐다. 정확히 프론트 최고참인 박용식 팀장을 통해 받은 공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영지의 승진에 의아해 하지 않을 호텔 직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갸름한 얼굴에 예쁜 눈과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출중한 미모의 소유자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전 날밤 비바람과 번개가 몰아치는 컴컴한 밤 현관 앞에서 이상한 술수를 부리던 장영지가 간계를 벌였는지는 알길이 없었다. 어쨌든 모든 상황이 이상하고 특이할 따름이었다. 또한 평소에 영지는 이상한 주문을 읊는 듯했고, 책도 주역이나, 옛 동학인 천도교 관련 책들을 주로 읽는 것 같았다. 오회장은 그 이상한 여인을 왜 그의 최측근 비서로 데리고 갔는지 통 이해할 길이 없었다.
신관 프론트에 근무하는 호경은 영지가 떠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출강회사를 그만두고 포항의 호텔까지 온 그였는데, 그가 갑자기 호텔을 떠난다니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직 그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기에 그는 더욱 조바심이 생겼다.
오양조가 직접 지시하여 보낸 리무진이 호텔 앞에 서자 장영지는 여러 직원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뒤 차에 올라타고 서울로 출발했다.
그녀가 떠나자 호경의 마음 또한 그 호텔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엘지 트윈타워 33층의 거대한 개인 사무실은 홀처럼 길게 펼쳐져 있었고, 앞 뒤로 서울 여의도의 전경과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오양조는 그의 긴 책상 앞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제목은 ‘제우강’이었다. 그는 비서에게 전화를 넣자 긴 사무실 홀을 한 여자 비서가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오양조를 향해 걸어갔다. 붉은 색 브라우스와 짧은 스커트에 빨간 구두, 그리고 새 빨간 립스틱은 더욱 그녀의 요염함을 뿜어냈다. 그녀는 오양조 앞에 서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오양조는 함께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네가 장영지구나? 그런데 옷은 어째서 빨간 색 투성이냐? 어서 돌아가 갈아입거라."
오양조가 갑작스럽게 의상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자 영지는 민망한 듯 다시 고개를 숙이고 국궁의 자세로 뒷걸음질 치며 넓은 홀을 벗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수행비서들의 협조를 통해 그녀는 다시 평범한 투피스 의상으로 오양조 앞에 나타났다.
"그래, 내 앞에서 그런 자극적인 옷은 입지 말거라. 알겠냐?"
"예, 어르신."
대답을 한 영지는 처음에자신의 의상을 챙겨준 수행 여비서를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떠올렸다. 분명 그녀는 회장님이 붉은 색을 좋아하니 옷또한 자극적인 붉은 색 계통으로 치마 길이는 짧게 입으라고 언지해 주었던 것이다.
"너는 내 마음을 읽을 줄 모르냐?"
갑작스러운 엉뚱한 질문에 영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마, 마음을 읽다니요?"
"네가 아직 덜 익숙하지?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넌 그걸 알고 있느냐?"
영지는 조금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살 끄덕였다.
"네가 받은 강(絳) 때문이다."
"네, 어르신."
영지는 오양조의 말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 채우며 대답했다.
"이제 도술문명시대가 도래했다. 도를 닦는 자들 가운데 도술을 부리는 자들이 상당수 있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정말 아마겟돈의 시작이라고 봐야 해. 성경에 등장하는 신들의 전쟁이라는 것 말이야.”
오양조는 시계를 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비서실장인 장영지에게 일렀다.
"이제 슬슬 호텔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군."
장영지는 수행비서가 전해준 인터컨티넨탈 경영자 회의에 회장님이 참석하러 가신다는 내용과 준비사항을 숙지하고 있었다.
"네. 회장님. 이미 차가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래. 너는 좀더 여기에 머물며 인수인계를 확실히 받아놓도록 하거라."
"네, 어르신, 분부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오양조는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걸었지만 한복차림의 걸음걸이가 매우 위엄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