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르도바의 여유로운 한 때를 포착하고 싶다면, 과달키비르강가의 ‘로마인의 다리’로 향하자.
땅이 비옥하면 사람이 모이고, 교통과 무역이 발달하며 문화를 꽃피운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강렬하고 풍부한 햇빛과 시원한 바람, 대지를 적시는 과달키비르강이 흐르는 코르도바(Córdoba)는 자연의 축복 속에서 한때 서유럽에서 가장 번영을 누린 도시였다. 고대 로마인이 세운 도시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던 800년 간 이슬람 세계의 수도 구실을 해 문화적 부흥기를 보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세월이 스러지고, 이슬람 문화의 요람은 이후 가톨릭 문화로 채색됐다. 고고한 역사적 흔적 위에서 고대 로마와 이슬람, 가톨릭은 마치 본래 하나인 듯 공존하며 오늘날 스페인의 자부심, 코르도바의 표정을 아름답게 채운다.
1 꽃 화분으로 장식한 유대인 지구의 골목 풍경. 2, 4 초록색 오렌지 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가 보기 좋게 어우러진 메스키타 정원. 3 모스크와는 또 다른 매력을 품은 메스키타 중앙에 자리한 대성당 내부
유대인 지구에서 만난 코르도바의 역사
이슬람 통치하의 코르도바는 종교적 관용을 허용하며 찬란하게 빛나는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다. 그 덕에 당시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어 떠돌던 많은 유대인이 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관문 역할을 하는 알모도바르 게이트를 지나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UNESCO World Heritage)으로 지정된 유대인지구가 시작된다. 모스크 대성당으로 불리는 메스키타(Mezquita)와 안달루시아에 현존하는 유일한 유대교회당(Córdoba Synagogue), 이슬람 왕국의 요새였던 알카사르(Alcázar of Córdoba) 등 도시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명소가 이곳에 모여 있다. 새하얀 담벼락마다 붉은 제라늄과 색색의 꽃화분으로 장식한 ‘꽃의 골목(Calleja de las Flores)’ 역시 유대인 지구를 대표하는 볼거리이자 코르도바 주민의 자부심으로 통한다.
코르도바에선 하루가 빠듯하다. 한정된 시간 안에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다. 첫 번째 장소는 가볍게 코르도바 알카사르에서 시작한다. 1300년대 요새로 지은 왕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다. 사실 모든 이유를 차치하고, 이른 아침 이곳을 찾은 목적은 하나다. 말간 아침 정원을 호젓하게 거닐고 싶어서다. 들리는 거라곤 새소리와 물소리뿐인 정원 한복판 네모반듯한 연못에서는 쉴 새없이 물줄기가 솟구치고, 잘 가꾼 나무가 늘어선 가로수 길을 걸을 때마다 상큼한 오렌지향이 풍기는 듯하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문장처럼 초록빛 정원은 마치 찬물로 세수한 듯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1 무더위를 피해 물가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2 메스키타 종탑에서 내려다본 코르도바 전경. 3 잘 가꾼 조경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기 좋은 코르도바 알카사르 정원.
점점 따가워지는 햇살의 기세에 서둘러 메스키타로 향한다. 코르도바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메스키타는 웅장함 그 자체다. 도시가 번성하며 증축을 여러번 거치는 와중에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이슬람 양식이 잘 보존돼 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16세기경 사원의 일부를 헐고 그 자리에 고딕양식의 가톨릭 대성당을 세웠다는 점이다. 메스키타는 ‘모스크 안의 대성당’, 즉 이슬람과 가톨릭의 공존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예다.
우선 내부로 들어서면 끝없이 펼쳐진 기둥과 아치에 전율이 인다. 흰 벽돌과 붉은 벽돌을 교차해 만든 줄무늬 아치는 전형적인 이슬람 양식이다. 대체 이 많은 아치를 떠받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기둥이 필요했을까. 높다란 천장을 지탱하는 야자수처럼 쭉 뻗은 기둥의 수가 무려 855 개다. 들여다볼수록 세심한 건축 기술에 경외심이 이는 것도 잠시, 어두컴컴한 실내가 일순 환하게 밝아진다. 이슬람 성지 메카를 향해 올리는 기도 장소로 조성된 아치형 공간, 미흐라브(Mihrab)는 온통 황금빛 문양으로 가득하다. 수 세기가 흘렀음에도 정교한 문양의 아름다움은 퇴색되기는커녕 초연한 빛을 발한다. 미흐라브를 지나 보물이 전시된 방을 거쳐 드디어 메스키타의 중심, 대성당에 입성했다. 엄숙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모스크와 달리, 대성당은 형광등 수백 개를 켜놓은 듯 밝고 화려하다. 탁 트인 개방감과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예배당 공간을 안온하게 감싼다. 모스크와는 전혀 상반된 매력의 대성당을 감상한 뒤 밖으로 나오면 짙푸르다 못해 싱그러운 오렌지나무가 반긴다. 오렌지나무 사이사이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서있다. 다름을 배척하지 않고 인정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것, 세월이 흘러도 변치않는 공존의 가치를 메스키타는 조용히 웅변한다.
1 파티오는 코르도바 주민에게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전통이자 삶의 위안 같은 존재다. 2 파티오와 골목을 꾸미는데 필요한 화분을 판매하는 매장. 화분 그 자체로도 아름다워 눈길이 간다.
꽃물이 번진 자리, 파티오
메스키타를 나와 조금 걷다 보면 새하얀 집과 미로처럼 얽힌 골목이 나타난다. 나란히 걸으면 서로의 옷깃이 스칠 정도로 좁은 골목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꽃의 골목’은 코르도바의 유명 포토스폿이다. 마치 꽃으로 장식한 미로같다. 눈길 닿는 곳마다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을 닮은 붉은 꽃잎이 강렬한 존재감을 발한다. 골목을 걷는 행위만으로도 괜스레 미소가 번지고 마음이 행복하다. 흰 담벼락과 붉은 꽃, 선명한 색감의 대비는 카메라 버튼을 자꾸 누르게 한다. 예쁜 골목 사진을 남기고 싶다면, 상대적으로 인파가 적은 이른 아침이나 오후 2시 이후의 시에스타 시간에 방문하길 권한다.
사계절 내내 꽃향기가 번지는 ‘꽃의 도시’라는 수식어와 함께 코르도바는 ‘파티오의 도시’라고도 한다. 파티오(Patio)는 스페인어로 ‘안뜰, 중정’이란 뜻으로,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양식이다. 역사적으로 파티오는 로마 시대 건축인 ‘아트리움’에서 기원했다. 건물의 중앙을 뻥뚫어 ‘ㅁ’ 자형 안뜰을 꾸밈으로써, 여러 가옥이 건물 중앙에 자리한 하나의 파티오를 공유한다. 파티오는 덥고 건조한 안달루시아 기후에 최적화된 건축양식이다. 아치 여러 개로 둘러싸인 중정을 만들어 그늘을 들이고, 화초와 분수를 둬 집안의 습도도 조절한다. 단순한 건축양식이 사교의 공간으로 한 단계 발전한데는 이슬람의 영향이 컸다.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 되려면 기능 이상의 심미적 만족감이 필요할 터. 보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꽃과 식물을 가꾸고, 대리석 바닥 중앙에 퐁퐁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감상할 수 있는 분수가 설치되며 파티오는 비로소 스페인의 문화로 정착했다.
이슬람 세력이 융성한 코르도바에서 파티오 문화가 꽃을 피운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코르도바 주민에게 파티오는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전통이자 일상의 위안이다. 이들의 유별난 파티오 사랑의 결정체가 매년 5월 초에 열리는 ‘파티오 축제(La Fiesta de los Patios)’다. 일 년에 한 번 꽁꽁 잠가둔 안뜰의 빗장을 열고 정성스레 가꾼 자신의 정원으로 낯선 방문객을 기꺼이 초대한다. 매년 누가 더 안뜰을 아름답게 가꿨는지 그 맵시를 겨루는 축제로, 집주인의 취향과 부지런함이 고스란히 파티오에 묻어난다. 파티오 약 50개가 경연에 참여하는데 축제 기간 동안에는 입장료가 무료다. 축제가 끝난 후에도 투어를 통해 개개인이 정성스레 가꾼 코르도바의 파티오를 구경할 수 있다.
좀 더 규모 있는 파티오를 감상하고 싶다면 비아나 성(Palacio de Viana)으로 발길을 옮기자. 메스키타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자리한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예술품보다도 각기 다른 매력의 파티오 12개에 더욱 눈길이 간다. 까무룩 한낮의 시에스타에 빠져들고 싶을 만큼 생기발랄한 화초의 조화로움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히 어루만진다.
1 따스한 햇살 아래 여유로운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 2 코르도바에서 꼭 맛봐야 할 음식, 살모레호 코르도베스. 가스파초보다 걸쭉하고 풍부한 토핑 덕분에 한 끼 식사로 손색없다. 3 상큼한 틴토 데 베라노 한 잔이면 무더운 스페인 남부 날씨도 견딜 만하다.
여름이면 생각나는 맛
물을 마셔도 쉬 가시지 않던 갈증이 상큼한 틴토 데 베라노(Tinto de Verano) 한 모금에 말끔히 사라진다. 스페인어로 틴토(Tinto)는 레드와인, 베라노(Verano)는 여름을 가리킨다. 틴토 데 베라노는 일종의 와인 칵테일인데, 레드와인에 톡 쏘는 탄산음료를 섞어 달콤하고 가볍게 마시는 식전주다. 특히 뜨겁고 건조한 스페인 남부에서 사랑받는 여름 음료로, 한여름의 갈증을 풀기에 이만한게 없다. 상큼한 식전주로 입맛을 끌어올렸으니 이제 허기진 배를 채울 차례. 코르도바에 왔다면, 꼭 맛봐야 할 전통 음식이 살모레호 코르도베스(Salmorejo Cordobes)와 베렝헤나스 콘 미엘(Berenjenas Con Miel)이다. 살모레호는 스페인의 여름 수프인 가스파초와 거의 흡사하다. 가스파초는 토마토, 오이, 양파, 피망, 마늘 같은 여러 채소를 넣어 곱게 간 후 올리브오일, 식초, 소금으로 간한 차게 먹는 음료 겸 수프다. 코르도바의 살모레호는 여기에 빵을 추가해 더 걸쭉하고, 토핑으로 삶은 달걀과 구운 베이컨을 얹어 가벼운 한 끼 식사로 손색없다. 베렝헤나스 콘미엘은 여름에 많이 나는 가지를 이용한 요리로, 바삭하게 튀긴 가지를 달콤한 꿀이나 사탕수수를 가공할 때 추출되는 당밀에 찍어 먹는 코르도바 대표 요리다. 한여름의 코르도바를 여행할 계획이라면, 점메추(점심 메뉴 추천)는 위의 메뉴 3가지만 기억한다면 무조건 성공이라 장담한다.
뜨거운 태양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이른 저녁, 과달키비르강가에 자리한 로마인의 다리(Roman Bridge)로 향한다. 기원전 1세기에 지은 다리는 이후 수없이 파괴되고 복구되는 와중에도 고풍스러운 아치 형태의 교각과 이름만큼은 변치않고 이어져 여전히 아름다움을 발한다. 다리 너머로 붉은 노을과 함께 코르도바의 하루가 서서히 저문다. 반짝반짝 빛나는 이국적 정취와 생의 즐거 움을 품고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싱그럽다 못해 눈부시게 펼쳐지는 곳, 여기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 자리한 코르도바다.
대성당과 모스크(Mezquita-Catedral de Córdoba)은 코르도바의 상징이자 세계문화유산인 대성당과 모스크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건축물이 하나로 합쳐진 희귀한 예다.
알카사르(Alcázar de los Reyes Cristianos)는 아라비아어로 궁전을 뜻하는 말로, 코르도바에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궁전이 여러 개 있다. 고딕양식의 성채와 바로크양식의 교회가 있으며, 정원에는 이슬람식 정원과 분수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룹니다.
유대인 지구(Judería)는 코르도바의 오래된 돌길과 골목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유대인 지구에는 작은 꽃길(Calleja de las Flores)이라는 아기자기한 골목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화려한 꽃과 흰 벽, 그리고 대성당과 모스크의 탑이 보이는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유대인 지구에는 유대인 문화를 알 수 있는 유대인 박물관(Museo de la Judería)과 유대인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들이 있다.
비아나 궁전(Palacio de Viana)은 코르도바의 파티오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파티오란 스페인의 전통적인 중정으로, 이곳에서는 꽃과 나무, 그리고 분수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로마다 다리 (Puente Romano)는 코르도바의 대표적인 명소 중 하나로, 구아달키비르 강을 건너는 로마 제국 시대에 지어진 다리이다. 로마다 다리에는 성탑(Torre de la Calahorra)과 성문(Puerta del Puente)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코르도바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박물관과 전망대가 있다.
스페인(Spain) 국장(Escudo de España)은 스페인 왕가의 문장으로 양측에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형상화되어 있다. 각 기둥을 감싸는 띠에 쓰인 PLVS VLTRA(플루스 울트라)는 원래 NON PLVS VLTRA(더 멀리 갈 수 없다)라는 표어로 이곳이 세상의 끝임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카를 5세)가 이를 비틀어 현재의 표어로 만들어, '더욱 더 멀리(Más allá 마스 아야)'라는 의미를 지닌다. 대서양 너머로 뻗어나가겠다는 당시 스페인의 국가적 정신을 요약한 표어로 카를로스 1세 때부터 줄곧 사용되어 왔다. 방패의 문장들은 스페인 왕국을 구성하는 옛 왕국들의 것으로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카스티야(성채), 레온(사자), 나바라(사슬), 그라나다(석류 꽃), 아라곤(적황색 줄무늬)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운데에 박힌 세 개의 백합은 보르본 왕조의 본가인 부르봉 왕조의 상징이다. 레알 마드리드 CF의 엠블럼 위 왕관이 스페인 국장의 왕관에서 따온 것이다.
스페인(Spain: 공식명칭은 스페인 왕국Kingdom of Spain, 다른 이름은 에스파냐Espana)는 유럽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나라들 중의 하나로 이베리아 반도에 있으며 발레아레스 제도 및 카나리아 제도가 포함된다. 인구는 약 47백만 명(2024년 추계), 면적은 505,991㎢, 수도는 마드리드(Madrid)이다.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어 있으며 공용어는 스페인어다. 유럽 중 면적이 넓은 나라 중 하나다. 화폐 단위는 유로(€)다. 양원제, 입헌군주국이다. 국민 대부분이 로마 가톨릭교를 믿는다. 서비스 산업과 경·중공업 및 농업을 기반으로 한 시장 경제가 발달했다. 포도주와 올리브유의 세계적 생산국이다. 남부의 코스타 델 솔 지역이 관광지로 유명하다.
합스부르크 왕조(The House of Habsburg) 문양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가계도
피레네 산맥(Pyrenees), 유럽 남서부에 있는 산맥.
스페인 코르도바 올리브 농장.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글과 사진: 《KB 국민은행 GOLD &WISE, 2024년 06월호, 글: 이은혜(자유기고가)》, 《Daum, Naver 지식백과》|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이대원(李大源, 1921~2005), ‘농원(農園)’, 80×116cm, Oil on Canvas, 2002년.
[현재 KB GOLD&WISE the FIRST 반포 전시 중]
강렬한 색채의 선과 점으로 자연과 나무를 표현한 것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산과 들, 나무와 연못 등 주로 목가적인 자연 풍경을 그리면서 ‘농원의 화가’라고 불린 이대원은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과 함께 한국 구상화의 명맥을 이어온 거장으로 꼽힌다. 시선을 끄는 화려하고 강렬한 원색을 바탕으로 선과 점으로 형태를 표현한 독특한 화풍이 독보적이다.